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뉼이 Sep 30. 2024

어린 날의 봄 그리고 겨울

1983. 6. 3

1983. 6. 3

오늘도 나는 아빠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아빠가 배에 캥거루 주머니를 만들어서 와서 나를 거기에 넣고 다니겠다는 말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따라 더디 내리는 어둠 탓에 기다림 또한 길게만 느껴졌다. 아빠가 캥거루 주머니를 만들어와 거기에 들어가 하루종일 아빠와 함께 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늴리리야~” 아빠는 자신이 붙여준 예명으로 나를 부르며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는 집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포켓 주머니에 한 가득 담아온 동전들을 꺼내놓았다. 나는 전기 코드를 꽂으면 불이 들어오는 예쁜 조개로 만든 집 모양 저금통에 집어 넣었다. 그러고는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아빠에게 안겼다. 

“아빠! 캥거루 주머니 만들어왔어?”

“우리 늴리리, 아빠가 바빠서 못 만들어왔네. 내일은 꼭 주머니 만들어 와서 그 안에 넣고 다닐게. 알았지?” 

실망한 나에게 내일에 대한 기대를 걸게 만들어주는 건 아빠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빠는 다른 모든 일들에 대해서도 순간의 기분을 위한 거짓을 선택하기도 했다. 그것이 그저 아빠의 습성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그것이 좋게만 느껴졌다.


아빠는 내 친구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사실 나는 외동도 아닌데, 친구들에게 다가가는 게 쉽지가 않았다. 그런 나를 으쓱한 상태로 친구들 앞에 서게 만든 것도 늘 아빠였다. 놀이터에서 친구도 없이 혼자 외롭게 놀고 있는 나를 보면 아빠는 동네 구멍가게에서 사탕이고 껌이고 주머니 한 가득 먹을 것을 담아와 나에게 쥐어주며 친구들을 나눠주라고 했다. 아빠가 직접 아이들에게 나눠주며 우리 딸아이하고 잘 놀라고 할 법도 한데 단 한 번도 그런 법이 없었다. 아이들과 놀 수 있는 일종의 권리와도 같은 사탕과 껌들이 내 손을 거쳐 아이들이 받을 수 있게 해줬다. 내가 쭈뼛쭈뼛 아이들에게 다가가 먹을 것을 나눠주면 신기하게 그것들은 나름의 기능을 했다. 내가 나로서 할 수 없는 일들까지 아빠는 나서서 무엇이든지 해줬다. 그게 나를 돋보이게 만들었고 나를 추켜 세워주었다. 그래서 아빠가 있으면 나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아빠가 내 아빠여서 나는 참 좋았다. 그리고 그런 아빠를 둔 나는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늘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아빠가 준 사탕과 껌들은 유효기간이 생각보다 짧았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은 나랑 딱 껌값 만큼만 놀아주다 가버렸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할 수 없었던 어린 나의 나는 사탕을 받아먹고 감칠맛 나게 놀아주다 가버리는 그 아이들이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다. 그 야속함에 울은 적도 있었다. 그렇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았던 껌과 사탕은 결국 나에게 두 명의 친구를 만들어주었다. 혜주와 경민이. 우리 셋은 언제나 뭉쳐 다녔다. 놀이터에서도 꼭 함께 놀았고, 유치원도 같은 곳으로 다니게 되었다. 유치원을 다녀온 후에는 아빠 친구 분이 운영하는 속셈학원도 다같이 다녔다. 속셈학원을 갈 때에는 엄마가 아닌, 아빠가 우리를 데려다 줄 때가 많았다. 하루는 혜주가 등원하는 길에 넘어졌고 일어나 보니 팔꿈치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날 아빠는 약국에 가서 빨간 소독약을 사서 환부에 토끼모양으로 그림을 그려줬다. 나는 질투에 사로 잡혔다. 아빠가 내 팔꿈치에 그려야 하는 토끼를 친구한테 그려줬기 때문에.  모두가 행복한 미소를 짓는 와중에 나는 별안간 큰 소리를 내어 울고 말았다. 사람들이 왜 우냐고 물어도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울었다. 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달래고 얼러도 나는 그치지 않았다. 머리가 얼얼해질 때까지 계속해서 울었다. 학원에 도착해서도 울고 있는 나를 지켜보던 원장선생님은 “아하!” 하는 깨달음의 감탄사를 내뱉고서는 빨간약을 손에 들어 내 팔에 토끼를 그려주셨다. 나는 울음을 그쳤다. 내 팔에 토끼를 그려준 사람이 아빠가 아니어서 싫었지만 나는 빨간 토끼를 팔 안에 얻은 걸로 상황을 종료시켰다. 여기서 더 울기엔 내 주변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원장선생님은 자신의 행동에 만족한 듯 환하게 웃으셨다. “그렇지! 바로 이거였어!” 하며 손가락을 튕기더니 딱 소리까지 냈다. 


아빠는 나에게 과하다 싶을 정도로 용돈을 넉넉히 쥐어주었다. 그래서 나는 늘 내가 사고 싶은 것이나 먹고 싶은 것들을 누리는 데 있어서 단 한 번도 궁한 적이 없었다. 아빠는 내가 다니는 유치원과 속셈학원에도 종종 오곤 했다. 놀이터에서 부렸던 마법을 이들 공간에서 펼쳤던 것이다. 아빠는 먹을 것을 잔뜩 사 내 손에 쥐어주며 친구들 하나씩 나눠주라고 했다. 나는 수업시간에 그렇게 친구들에게 껌 한 통씩 나눠주곤 했다. 친구들이 여기저기서 “아영아, 나도! 나도!” 하며 손을 내밀면 어느 순간 수줍어했던 나의 모습은 없어지고 그 느낌들로 우쭐해져 있는 내가 되어 있었다. 5학년 6학년 되는 큰 언니 오빠들도 나한테 사탕과 껌을 달라고 졸랐다. 그렇게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손에 껌을 쥐어주는 일종의 쾌감은 말로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아빠는 학교 행사며, 운동회며 빠지지 않고 나타나 나의 기를 세워줬다. 아빠는 학교 운동회 때도 본부석 교장선생님 옆 자리에 앉아 운동회를 참관했고 학년 초 학교 이름이 새겨진 수건이 나올 때면 교장선생님이 친히 교실에 들러 아이들 보는 앞에서 나에게 수건을 건네주었다. 그러면 이 이야기는 학원까지도 따라 들어왔다. 

“아영이 오늘 학교 수건 받았다.”

“나도 받았어. 우리 엄마 육성회 회원이잖아.”

“나도 받았지. 근데 아영이는 우리랑 달라 교장선생님이 직접 교실로 찾아와서 수건을 줬거든.”

우리집은 이런 면에서 달랐다. 남들은 엄마의 치맛바람으로 학교생활을 했다면 나는 아빠의 바지바람으로 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늘 나와 관련된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지만 아빠보다도 여덟 살이나 어린 엄마는 나에 관련된 일이라면 늘 기 빨려 하셨다. 아빠와 나이 차이가 많았지만 엄마 젊은 엄마는 아니었다. 마흔이 다 되어 나를 낳은 엄마는 내 친구들의 엄마들에 비해 나이가 한참 많았다. 뿐만이 아니라, 본래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여서 가끔씩 엄마가 아닌 할머니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나이 때문이었는지 엄마는 내가 놀아달라고 하기도 무색하게 피곤한 때가 많았다. 엄마는 한결같이 잠이 부족한 사람 같아 보였고 그래서 내가 집에서 혼자 놀거나 나가서 친구들과 놀기를 바랐다. 심지어 한 번은 놀이터에 나가 엄마가 뺑뺑이를 돌려줬는데, 먼 산을 바라보면서 기계적으로 돌리는 바람에 내가 뺑뺑이에서 떨어지는 것도 모른 채 한참을 더 돌렸다. 가운데 기둥을 붙잡고 제자리 돌기를 하던 게 싫증이 났던 나는 다른 언니 오빠들처럼 끝쪽에 가서 타려고 자리를 옮겼다. 내가 턱에 올라앉는 순간 엄마는 뺑뺑이를 돌렸고 나는 손잡이를 잡으려다 말고 바닥에 떨어졌다. 아픔 보단 하늘이 내 눈앞에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어 어지러웠다. 그런데 나는 소리를 지를 수도 울 수도 없었다. 그렇게 난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엄마는 나와 놀아주는 것을 상당히 귀찮아했지만 나는 매번 엄마한테 놀이터 흙바닥에 그림을 그려달라고 졸라댔다. 끊임없이 졸라대는 통에 마지못해 내 손에 이끌려 놀이터로 나간 엄마는 그림을 그려주곤 했다. 나뭇가지에 의해 그려지는 여자 아이의 얼굴은 내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남자가 그리는 그림 같아 투박하고 예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엄마가 그리는 그림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늦둥이가 누릴 수 있는 호사라며 황송하게 여길 줄 알았던 것처럼 나는 정말 그런대로 좋아했다. 


유치원을 다니면서 나는 도대체 낮잠 시간이 왜 있나 싶은 생각을 매일 같이 했다. 잠이 오질 않아 멀뚱멀뚱 천장만 바라보며 천 년 같은 시간을 보내곤 했던 나는 집에서도 낮잠 시간을 가져야만했다. 엄마는 나를 엄마 옆에 눕히고 같이 자자고 했다. 그러면 나는 엄마의 말대로 엄마 옆에 가만이 누워 눈을 꿈벅거리며 천장만 바라보았다. 만약 내가 천재로 태어났다면 그 때 천장을 백지 삼아 많은 것들을 그렸을 것도 같단 생각도 든다. 그 정도로 나는 숱한 시간을 누워서 보내야했고 나는 그 위에 글을 바둑 포석처럼 늘어 놓지도 그렇다고 체스판을 그리지도 않았다. 그저 천장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 침묵의 시간이 길어질 때면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엄마의 감은 두 눈을 떼어 눈을 뜨게 만들었다. 어떤 날은 ‘엄마가 죽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꿈쩍도 하지 않다가 나의 공작이 견디기 힘들 쯤에 그제야 엄마는 몸을 뒤척였다. 그리고는 좀 더 자라고 내 몸을 토닥거려주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엄마가 나를 늘 이렇게 방치해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엄마는 내가 조르지 않더라고 가끔 밀가루 반죽을 쥐어주며 같이 뭔가를 조물조물 거리기도 했고, 비누 거품을 만들어 빨대를 이용해 종이에 대고 투명한 이글루 같은 것들을 만들어주기도 하셨다. 요리를 할 때도 최대한 나에게 기회를 많이 주었다. 만두를 같이 빚고 그리고 부드러운 계란 향이 집안 가득 퍼지는 카스테라를 함께 만들었다. 엄마는 뭔가를 만들 때 모든 것들이 지저분한 상태로 변해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참여하도록 인내심을 발휘했다. 


하지만 엄마의 만성 피로 탓에 어린 나는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아빠를 엄마보다 더 좋아했고, 내가 태어나서 가장 많이 했던 말 역시 아빠에 관련된 것이었다.

 “아빠한테 이를 거다.” 

나는 아빠가 있으면 세상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아빠한테 이르면 모든 걸 내 편에서 해결해줬다. 그래서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고자질쟁이로 살았다. 기분이 상하기만 하면 아빠한테 이른다고 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그렇게 늘 어린 시절 나의 편에서 든든하게 나를 지켜주는 사람이었다. 다섯 살도 안 된 나이에 나는 집을 나간 적이 있다. 정말 아빠한테 이른다며 집을 나섰다가 큰길가까지 나갔다가 동네 어른들한테 잡혀서 집에 들어왔던 적도 있었다. “아영 엄마, 아영이가 혼자서 막 가길래, 물어보니 아빠한테 간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데리고 왔어.” 어린 날의 나는 울 때도 엄마를 부르며 울지 않았다. “아빠~ 아빠~”이러면서 울었다. 하루는 이렇게 울고 있으면서도 ‘나는 왜 울 때마다 아빠를 부르며 우는 걸까?’ 하는 자각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아파~ 아파~’하고 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내가 아파서 아빠라고 우는 건가?’ 스스로 분석을 해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온 마음을 다해 나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다 주었던 아빠의 사랑도 의도치 않게 불안정한 방향으로 흘렀다. 아빠는 유독 딸 셋 중 막내딸인 나만 예뻐했다. 그래서 우리집의 부성은 편애가 공식처럼 받아들여질 정도였다. 아빠는 늘 나를 공주처럼 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마를 왕비처럼 대하진 않았다. 아빠는 엄마를 함부로 대했다. 무시했고 부려먹고 마치 하녀처럼 막대했다. 가슴 속에 있는 모든 상처와 울분을 엄마한테 풀어내듯 그렇게 함부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아빠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순종했다. 엄마는 매일 저녁 아빠가 집에 들어오면 따뜻한 물을 세숫대야에 받아서 아빠의 발을 닦아주는 일부터 했다. 무엇 때문인지 엄마는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헌신적으로 아빠를 위했다. 그 시절 엄마들이 다 그러고 살아서여서 그랬는지 나는 지금도 알 수는 없지만 엄마는 어쨌든 그랬다.  심지어 엄마는 아빠가 폭언과 폭력으로 엄마를 대할 때도 아빠에게 대응하거나 맞서지 않고 그냥 자기를 죽여달라며 울었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화조차 낼 수 없는 사람인 마냥 아빠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툭하면 아빠는 밥 먹다가 뭔가 수라도 뒤틀리면 차려놓은 그릇들을 쓸어 내 식탁 아래로 죄다 떨어뜨렸고 주로 육두문자와 함께 ‘돌대가리’라고 했다. 그나마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질 땐 나았다. 심한 날은 그릇들이 허공에 포물선을 그리며 날다가 바닥에 곤두박질 쳐지기도 했고 어떤 날은 전등에 부딪혀 전기가 나가기도 했다. 아빠는 엄마가 “재수가 없다.”고 했다. 강자가 일방적으로 터트리는 내전은 반복처럼 일어났다. 그 어떤 이유도 없어보였다. 그것은 되어 나의 어린 시절을 채우는 이야기 중 하나의 패턴이었다. 


이 모든 것을 보고서도 나는 엄마보다도 아빠를 좋아했다. 나를 귀애하는 아빠와 착하고 나약한 엄마 사이에서도 나는 사람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를 묻는다면 이를 묻는 사람이 오히려 무안해 질 정도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빠”라고 답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참 기괴한 대답이었다. 아빠가 좋아서 아빠가 좋다고 했던 건 나의 진심이었지만 왜 나의 대답 속에 엄마에 대한 배려는 없었을까 하는 생각에 질문이 맞닿으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나는 자라면서 돌변했기 때문이다.  


자아가 형성이 되면서부터 나는 무척이나 달라졌다. 아빠가 나를 귀애해주는 자상한 사람으로 인식되던 시절은 끝이 났다. 한 여자의 삶을 처참하게 만든 폭력적 남편으로 보는 통찰력이 생겨난 까닭이다. 엄마가 가진 끝도 없을 비극이 내 눈에 그리고 가슴 속에 들어오면서부터 나는 나에게 극진했던 아빠로부터 멀어졌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아빠가 엄마에게 하대를 하면 늘 엄마 편에 서서 아빠를 막았다. 그렇게 엄마와 아빠 사이의 부부 싸움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내가 나서서 싸움을 말리면 아빠는 진정이 됐고 아빠는 그런 나를 보고 멈춰 설 줄 알았다.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나를 아빠는 그 순간조차도 예뻐했다. 나의 변절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아빠는 나를 언니들과 차별하면서까지 귀애해줬지만 나는 아빠가 아닌 언니들의 편에 섰기 때문이다. 나가 지닌 양심과 내가 가진 정의가 나를 이전과 다르게 만들었다. 나는 그렇게 우리집에서 검은 머리 짐승이 되어버렸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아빠의 캥거루 주머니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실체도 없던 희망 고문. 캥거루 주머니. 허구의 저 너머에서 무색해져버리고 만 그것. 


좋은 아빠, 나쁜 남편이라는 양립. 나에겐 양가의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이것은 곧 공기처럼 관계 사이를 비집고 들어 틈을 벌려 놓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결국엔 사이를 틀어버렸다. 그렇게 나는 아빠에게 “왜 엄마를 힘들게 했나?”를 묻는 딸로 서버렸다. 내 인생의 혁명과도 같았던 그때의 의식들은 이성이 되었지만 어려서 목격했던 부부싸움의 장면들은 나의 본성이 되어 나라는 인간 내부에 박혀 버렸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생각나는 몇몇의 폭력적인 장면들이 봉인을 풀고 튀어 나오는 순간의 괴로움을 마주하게 된다. ‘내 안의 분노 기재들이 이로부터 비롯되었구나.’하는 자가적 분석과 함께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좋든 싫든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나의 생존 방식으로 고착되어 버렸다는 것은 문제가 됐다. 이것이 ‘은아영’이 쓸 수 있는 말과 행동의 근원이자 전부인 채로 그렇게. 나는 착한 엄마를 닮지 않고 못된 아빠를 닮아 그때 봤던 모든 분노들을 내 잠재의식 속에 넣어 뒀다가 본능처럼 터트린다. 전갈의 독처럼 절대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서도 위기 순간에 나도 모르게 상대를 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전 01화 유난히도 길었던 겨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