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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림 Dec 24. 2023

팥죽의 간은 어떻게?


"제수씨, 팥죽에 설탕 넣었습니꺼?"

"... 예?"


동지란다. 지나가는 말로 팥죽 한 그릇 먹고 싶다 했더니 남편이 들어오는 길에 팥죽 두 그릇을 사 왔다. 옛날식 팥죽으로 새알심이 잔뜩 들어간 비주얼이 입맛을 돌게 했다. 팥죽 한 그릇에 문득 신혼 초가 슬금슬금 흘러나왔다.


내가 결혼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시댁에 갔을 때 시어머니가 팥죽을 쑤라며 붉은팥을 건넸다. 핸드폰도 유튜브도 없던 때라 크게 고려해야 할 게 있는 줄 몰랐다. 팥을 씻고 끓여내 첫물을 버리고 다시 푹 삶아 으깨 새알심 만들어 빚은 걸 올렸다. 달달한 것을 좋아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단맛을 조금 첨가해 먹기 좋은 상태로 팥죽을 만들었다. 마침 장가도 안 간 손 윗 아주버님이 제수씨가 만든 거라며 한 그릇 담뿍 담아 달라 해 물김치와 함께 상을 차려냈다.


지금에서야 기억났지만 그때 내 등 뒤에서 쭉 뽑아 내리던 식은땀이 내가 뭘 잘못했나 긴장하게 했다. 경상도 시골 사람이라 팥죽이라면 당연히 찹쌀이 듬뿍 들어간 시골식 팥죽을 떠올렸던 것이다. 시누이만 연신 맛있다며 몇 그릇씩 먹었지만 설탕이 들어간 단팥죽의 맛에 놀란 걸 몰랐던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서로의 취향이라는 게 존재하는데 우린 그런 것도 묻지 않고 내게 음식을 만들라고 시켰으니 내가 시댁 식구들의 입맛과 자라오면서 먹었던 음식을 어찌 알았겠는가. 서울 입맛으로 음식을 먹고 자란 내가 만든 팥죽인데.


남편은 지금도 팥죽이라면 나를 놀린다. 하긴 오랫동안 먹지 않던 팥죽이 왜 생각났을까. 큰 대접으로 한 그릇 달라던 팥죽을 몇 술 뜨지 않고 남기던 시숙의 얘기를 곁들이면서. 시골 사람이라 촌스러워 죽에 간을 안 하고 먹는다는 둥, 단것을 좋아하지 않는 다느니, 자라면서 단팥죽을 못 먹어봐서 그렇다는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나를 위로하곤 한다. 오래전 일이라 지금에야 웃으며 팥죽에 얽힌 이야기라고 풀어놓지만 왠지 그때가 아직도 낯설다.


갓 시집온 며느리가 호기롭게 팥죽을 쑤었는데 설탕 간 맞춘 팥죽을 먹었을 때의 그 당혹스러움이 어땠을지. 솜씨를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자랑도 하고 싶었겠지만 적어도 어떤 취향인지 정도는 알려줘야 했을 텐데. 나 또한 물어볼 엄두도 못 내던 시절이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소통의 부재라 할 것이다. 팥죽을 보며 새알심을 빚고 끓여 냈을 정성과 들인 수고가 갑자기 떠올랐지만 한편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웃으며 넘길 나이가 되었어도 지나간 일이 뭐든 추억이 되진 않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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