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지운다_러다이트
1. 눈을 뜬다. 다시 눈을 감는다. 그리고 눈을 다시 뜬다. 불러주는 곳도, 갈 곳도 없으니, 항상 침대에 누워 눈만 껌뻑인다. TV를 볼까? 리모컨은 어디에 있더라. 손 닿는 주변에는 없다. 일어난다. 집 안을 살핀다. 돼지가 진흙탕에서 구르다 자기 집을 착각했을까? 영락없이[66] 돼지우리다. 눈에 보이는 건 무질서하게 흩어진 지로[67]용지들, 초록색 술병, 형형색색[68]을 띤 과자봉지, 먹다 남은 소시지, 이유는 모르지만, 바닥에 엎어진 컵라면 용기로 흘러나온 라면 국물. 발을 디딜 틈조차 없다.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간다. 바퀴벌레인가? 아니다, 그러기에는 너무 빨랐다. 먼지로 가득 찬 방 안의 공기는 답답하고 텁텁하다. 그리고 코끝을 찌르는 퀴퀴한 냄새로 어지럽다.
무엇이면 어떠냐?
어차피 싫어하는 벌레다.
어차피 혐오스러운 것이다.
만 45세. 이게 나의 결과물이라니. 침대로 돌아가서 눈을 감으련다. 눈을 감는 것 외에는 선택의 결과를 벗어날 방법은 없으니까. 아, 맞다. 리모컨을 찾아야지. 전원을 켠다. TV에 익숙한 누군가가 나온다.
“대중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고요? 솔직해지자고요. 누가 연예인을 하려고 합니까. 제가요? 좋아서요? 그럴 리가 없지요. 아시잖아요. 사회 적응 평가에서 ‘부적합’ 평가를 받은 자만....... 딴따라를....... 그래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사회생활을 하니까요. 특수학교에서 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많아요. 과거에는 연예인을 귀족처럼 대우했다고 하더라고요, 뭐 그런 위안으로 삼지요. 인생, 뭐 별거 있나요? 그냥 살아갑니다.”
그래, 연예인들 참 딱하다. 차라리 돼지우리에서 사는 내가 천배 만배는 낫다. 사회 적응 평가를 통과하지 못한 자들은 특수학교로 간다. 그리고 4년의 교육수료 후, 최종 적합 판정을 받으려면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하나다.
딴따라[69]
(가수, 배우, 코미디언, 예술가, 모델, 등)
정부는 특수학교를 이수한 모든 이를 일괄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최선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월급을 받던가? 자원봉사였던가? 쓸데없는 끼를 왜 숨기지 않았을까? 보이지 않는 주홍글씨를 평생 몸에 지닌 이들. 딴따라. 가엽다. 기억나는가? 더블 엑스 중 비슷한 산업에 종사하는 혼혈인.
XXa- 유럽계 혼혈인
(패션 산업, 미디어 산업, 관광 산업 등)
하지만, 이들은 퍼포먼스와 관련한 일은 하지 않는다. 연예인을, 그러니까 무대에서 퍼포먼스를 행하는 자를 관리하는 게 그들 몫이다.
2. 대한민국은 끼를 발산[70]해 수익을 창출하는 모든 직업을 천대[71]한다. 이유? 원래[72]? 처음의 기준을 말하기는 어렵다. 그래,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 연예인은 특정한 상황을 연출해 부자연스러운 감정을 생산한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을 그릇된 행동으로 몰아간다. 의무교육 내내 듣는 소리다. 귀에 못이 박힐 정도다. 성인이 되어보니 그 뜻을 알 것 같다. 아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다들 나와 비슷한 생각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딴따라는 불가촉천민[73]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국민이 존중하고 사랑하는 직업은 무엇인가? 한 단어로 말하자면,
회사원
우리는 경력을 쌓아 연봉을 높이는 회사원을 으뜸으로 삼는다. 꾸준하게 오랜 시간 노력해 자기 발판[74]을 탄탄하게 만드는, 소위 한 우물을 파지 않으면, 어느 산업에서도 돈을 벌기 어렵다. 우리는 돈을 급하게 벌 수 없는 시스템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방식을 ‘빌드업’이라 부른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연예인도 정점에 서려면
누구보다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맞다. 하지만, 출발이 틀렸다. 방향이 틀린 거다. 특수학교 출신이 노력한다는 게 욕심이다. 노력해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었다면, 특수학교로 걸어가서는 안 되는 거다. 일반적으로 특수학교 출신은 욕심을 내지 않는다. 욕심을 낸다 한들 그들의 인생이 주변에서 중심으로 변하기 어려워서다. 그게 정상이다. 하지만, 문제는 말이다. 호기[75]롭게 스스로 특수학교를 선택하는 천둥벌거숭이[76]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기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언젠가는 사회가 그들을 이해하여 존중하리라 믿는다. 그런 실낱[77]같은 희망을 쥔 채 투쟁[78]을 멈추지 않는다. 그런데, 그 투쟁의 방향이 문제인 거다. 대한민국의 주류인 ‘회사원’이 좋아하는 것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언제나, 늘, 주류와 척지고[79], 결괏값을 원한다. 그러니, 도대체 누가 그들을 바라보고 존중하겠는가?
연예인을 딴따라라 천대[80]하는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수천만 명의 회사원이
수만 명의 연예인을 위해서?
그렇기에 올바른 ‘빌드업’을 따르지 않는 자거나, 이른 시일 안에 일확천금[81]의 요행수[82]를 꿈꾸는 자는,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그런 행동은 사기꾼이나 하는 짓이다. 대한민국은 어떠한 경우도 이를 용납[83]하지 않는다. 가끔 도서관에서 자유민주주의 공화국 시절의 대한민국에 관련한 신문기사를 읽는다.
○○ 배우, 청담동에 200억 고급 아파트
전원 현금으로 구매.
○○ 가수가 소유한 강남의 꼬마 건물
5년 만에 60억 차익 실현.
이런 기사를 읽고 있으면, 기가 차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이지만, 당시는 연예인을 귀족 취급한 게 분명하다. 가장 하대받는 직업인 가수가? 배우가? 무슨 돈으로?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청담동과 강남에 투자한다는 사실은 실소[84]를 자아낸다. 현대 사람들은 누구도 그곳에 살기를 꺼려서다.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 구청입니다. 자원봉사로 전화했어요, 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네, 말씀하세요.”
“김준서 님의 경력을 고려해 구청에서 알맞은 자원봉사를 추려봤어요. 통화로는 설명의 한계가 있으니, 시간 내서 구청으로 오세요.”
할 수 있는 일이 그렇게 많을까? 내가? 공무원은 꼭 일을 만든다. 유선상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경력을 토대로 알맞은 자원봉사를 추천한다고? 궁금하기는 하다. 무엇이 내게 알맞은 일일까? 묶을 때를 밀고 마음을 다잡는 것처럼, 돼지우리인 이곳을 정리하며 쇠사슬로 묶인 과거의 잘못을 털어내기를 원한다. 과거의 잘못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감당할 수 없는 큰 돌은 마음을 짓누른다. 언제부터인가 시간의 흐름을 느끼기 어렵다. 내일은 오지 않는 하루의 반복을 겪는다. 보일 듯 말 듯한 불투명한 한지[85]로 덮인 세상을 아는가? 손가락으로 한지에 구멍을 내어 한지 밖의 세상을 뚜렷하게 보고 싶다. 하지만, 너무나 질기고 두꺼워서 힘으로는 뚫기 어렵다. 그렇게 수년간을 불투명하게 살아간다. 그렇게 짓눌린 마음은 시간을 강제로 빼앗는다. 이유도 모른 채,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다.
무엇을 해도
무력[86]하다.
그래, 해결한 뾰족한 수[87]도 없다. 바깥이라도 비워내자.
청소하는 중입니다.
쓱싹쓱싹, 부드럽게 바닥을 구석구석 쓸어내리며, 부스럭부스럭, 천천히 허리를 숙여 작은 먼지들까지 하나하나 주워 담는다. 사각사각, 손끝으로 먼지를 가볍게 털어내니 공기마저 맑아지는 듯하고, 퍽퍽, 걸레를 정성스레 짜서 마른 자국 하나 없이 바닥을 닦아낸다. 치익치익, 유리창에 물기가 맺히고, 드르륵드르륵, 손목을 휙휙 돌려 빛나는 창을 만든다. 휙휙, 다시 한번 바람결처럼 빠르게 움직인다. 후루룩후루룩, 물걸레를 적셔 바닥에 착착 누를 때마다, 남아있던 흔적들을 말끔히 씻어낸다.
to be continued.......
[66] 영락없이 (零落―): 조금도 틀리지 않고 들어맞다.
[67] 지로(giro): 은행 따위의 금융권에서, 고객을 대신하여 어떤 사람이나 회사 따위
[68] 형형색색(形形色色): 모양과 빛깔 따위가 서로 다른 여러 가지.
[69] ‘연예인’의 낮춤말.
[70] 발산(發散): 정열·울분·감정 따위를 행동으로 나타내어 밖으로 흩어지게 함.
[71] 천대(賤待): 업신여겨 푸대접함.
[72] 원래(元來): 본디. 처음부터.
[73] 사회적 관습 또는 법적 구속에 의해 주류 인구와 분리 및 격리되는 집단 (출처: 위키피디아)
[74] 발판(―板):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나 기반이 되는 것.
[75] 호기(豪氣): 꺼드럭거리며 뽐내는 기운이 있다.
[76] 무서운 줄을 모르고 주책없이 날뛰는 사람.
[77] 실낱같다: 아주 가늘다.
[78] 투쟁(鬪爭): 사회 운동이나 노동 운동 따위에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다툼.
[79] 척지다(隻―): 서로 원한을 품어 미워하게 되다.
[80] 천대(賤待): 업신여겨 푸대접함.
[81] 일확천금 (一攫千金): 단번에 천금을 움켜쥔다는 뜻으로, 힘들이지 않고 단번에 많은 재물을 얻음을 이르는 말.
[82] 요행수 (僥倖數): 뜻밖에 얻는 좋은 운수.
[83] 용납(容納): 너그러운 마음으로 남의 말이나 행동을 받아들임.
[84] 실소(失笑): 어처구니가 없어 저도 모르게 웃음이 툭 터져 나옴. 또는 그 웃음.
[85] 한지(韓紙): 닥나무 껍질 따위의 섬유를 원료로 하여 한국 고유의 제법으로 뜬 종이
[86] 무력(無力): 능력·활동력이 없음.
[87]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나 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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