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지운다_러다이트
4. 그렇다. 난 싱글 엑스다…… 대한민국에서 정말로 찾기 어려운 순수 혈통이다. 가물에 콩 나듯 만나기 어려운 순혈인을 대접하기는커녕, 오히려 불쌍하게 바라본다. 각 혼혈인은 대부분 이중국적자다. 그들은 한국어와 각 출신의 언어와 그리고 공통으로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그들은 활동무대를 대한민국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세계가 그들의 보금자리[32]이다. 하지만 순혈인은 다르다. 이중국적자도 아닐뿐더러 구사하는 언어도 한국어뿐이다. 순혈인도 영어를 구사[33]한다고 해야 하나? 일단, 그 기준에 나는 속하지 않는다.
순혈인은 그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외톨이다. 대한민국에서 순혈인의 설 자리가 없다는 게 나만의 피해망상[34]은 아니다. 겉으로는 순혈인과 혼혈인이 어우러져 사는 대한민국이라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현실은 대한민국에서 순혈인을 만나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서도 우리는 출신을 밝히지 않아서다. 나 역시 출신을 숨기고 일을 한다. 싱글 엑스라고 밝히면 능력이 없는 쓸모없는 인간이라 여겨서다.
싱글 엑스가 사회에서 사라지는 이유는 명확하다.[35] 나쁜 유전자를 버리고 좋은 유전자를 취해 더 좋은 인간을 만들자는 비뚤어진 우생학에 빠져서다. 비뚤어진 우생학으로 혼혈인은 혼혈인 증명서를 몸에 늘 지닌다. 대한민국의 삐뚤어진 밈[36]이다.
-혼혈인 증명서-
이 증명서는 본인이 여러 인종의 유전적 특성을 결합해, 신체적·정신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증합니다.
본인은 다양한 유전자들이 조화를 이루어 강한 적응력과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미래 세대의 행복과 발전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는 중요한 자질로 인정됩니다.
따라서 본인은 인류의 밝은 미래와 종의 진화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임을 증명합니다.
-Certificate of Mixed Heritage-
This certifies that the holder of this document possesses exceptional physical and mental abilities as a result of combining the genetic traits of different races.
The individual shows strong adaptability and potential thanks to the harmonious blend of diverse genes, which is recognized as an important trait that can contribute to the future happiness and progress of humanity.
Therefore, this certificate proves that the individual is well-suited to play a key role in the bright future of humanity and the evolution of the species. [37]
망상[38]이다. 망상. 아, 그런데도 이 쓰레기 종이 쪼가리인 혼혈인 증명서를 위조해 몸속에 지닌다. 내 처지가 초라[39]하여 구슬프다.[40]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주민등록등본으로는 싱글 엑스인지 더블 엑스인지를 알기는 어렵다. 교차기능문화를 고려한 배려라고 정부는 말한다. 이는 정말 다행이다. 만약에 등본으로 싱글 엑스의 출신이 밝혀지면, 우리가 마음 편하게 일할 곳은 대한민국 그 어디에도 없을 거다. 혼혈인 증명서? 나라에서 인정하는 증명서도 아니다. 사실, 정부는 혼혈인 증명서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혼혈인 증명서로 무엇을 공적으로 대변할 수도 없다. 하지만, 혼혈인 증명서는 우리가 어디에 있어야 하며, 어디로 갈 수 없는지를 암묵적으로 말해주는 지침서가 되었다. 각 혼혈인은 증명서를 지닌 채, 그들의 우월함을 오늘도 알린다. 여하튼, 증명서는 공문서가 아니라 사문서이기에 위조가 쉽다. 이 또한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우리는 남들의 눈을 속이며 꾸역꾸역 살아간다.
하지만,
정부를 속일 수는 없다.
정부는 나의 출생지, 가족, 그리고 교우 관계 심지어 이직한 직장과 연봉까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독신세를 피하려 몇 번을 이사했는지 모른다. 싱글 엑스는 정말로 돈벌이가 없어서다. 그래서 지금 머무는 공간은 전입신고도 안 한, 심지어 명의자도 다른 집인데도, 아까 보았는가? 여지없다.[41] 기막히게 나를 찾아온다. 심지어 찾아오는 공무원조차 늘 같은 사람이다. 이유는 모른다. 정부라서? 설마 내 동태[42]를 살피려고 감시자를? 왜? 그럴 이유는 전혀 없다. 나는 아무도 아니라서다.
독신세를 내기는 어렵다. 만 45세, 국가의 보조금으로 삶을 이어가는 백수라니, 믿을 수 없다. 대한민국은 결혼하지 않은 시민에게 죽을 때까지 청년 보조금을 지급한다. 하하하, 아직도 난 청년이다. 좋은 일인가? 사회민주주의 공화국을 탈바꿈해 이익을 본 세대라고 해야 하나? 이렇게나 가난하고, 이렇게나 형편없는 내게 악착같이[43] 독신세를 징수[44]하려는 정부. 그럼 차라리 보조금을 주지를 말던가. 모순[45]이라고! 모순!
아, 모르겠다. 어린 시절 꿈꾸던 만 45세의 모습은 아니다. 꿈을 꾸었던, 매일 웃고, 걱정이 없던 날도 있었는데. 분명히 있었는데, 요즘은 이런 생각을 한다. 과거의 기억은 누군가 내게 주입했고, 처음부터 어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처음부터 독신세를 걷으려고 만들어 낸 싱글 엑스. 아쉽지만, 아무리 몸을 샅샅이 둘러보아도 로봇이라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그래, 망상이다.
망상.
창창[46]한 날이 다가오리라 믿었던 과거는 지나간 날이다. 그리고 앞길이 창창[47]한 젊은이라고 믿었던 시절도 지나간 날이다. 더는 꿈을 꿀 수 없어서다. 얼씨구. 좋다. 좋다고. 현재 심정은? 정말 창창[48]합니다. 창창하다고요! 더는 공무원을 만나서 시달리기도 싫다. 저출산? 그것도 할 말은 많다. 하지만, 지금은 구청으로 가자. 할 수 있는 자원봉사 자리가 있을지도.
“안녕하세요,
독신세를 대신해 자원봉사를 하고 싶은데요.”
“주민자치과로 가보세요, 3층에 있습니다.”
5. 3층에 올라오니, 많은 남성이 보인다. 여성도 더러[49] 있기는 하네. 이곳저곳에서 서로 다른 헤르츠를 지닌 목소리가 공기의 틈을 가른다. 탁 트인 공간에 수많은 목소리가 전쟁 중이다. 누가 이겨도 누구도 기쁘지 않을 그런 누군가의 잘못을 성토[50] 중이다. 수많은 하소연이 공기를 찢어 내게 다가온다. 섞이지 않는다. 오디오가 물리니, 머리가 아프다. 휴대폰을 꺼내 주민자치과의 모습을 담는다. 찰칵. 사진을 확인하니 자리에서 일어나 바삐 움직이는, 분주[51]한 사람은 없다. 목소리가 사라진 주민자치과의 모습은 너무나도 정적인 장소이다. 다시 고개를 들어 이곳을 바라본다. 누가 보아도 이곳은 동적인 장소이다. 시끄러워서다. 곧 이들과 비슷한 전쟁을 치르겠지. 내 처지가 참.참.참.참.참...... 그렇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아, 그게, 제가 독신세를 낼 형편이.......”
“자원봉사지원요?”
무언가 목적어가 빠진 대화다.
“네, 자원봉사를 지원하려는데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잠시만요, 주민등록증을 주시겠어요?”
안 가지고 왔다. 사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아, 주민등록증을 깜빡했어요.”
“흠, 그럼 이름과 생년월일을 말씀하세요.”
“이름은 김준서입니다. 생년월일은 2150년 5월 30일입니다.”
“본인확인을 해야 하니, 오른쪽 손바닥을 이곳에 올리세요.”
손바닥을 생체시스템 스캐너에 올린다.
“확인되었습니다. 김준서 님. 만 45세, X(싱글 엑스), 특수학교 경험 없음, 생년월일은 2124년 5월 30일, 쌍둥이자리, 혈액형 B형, MBTI는 INTJ”
INTJ? 그건 몰랐네. 검사한 기억은 없는데? 자세하게도 알고 있네.
“제가, INTJ인가요? 언제 검사했나요? 기억이 없는데.”
“김준서 님, 대한민국 정부는 김준서 님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정부는 김준서 님을 포함한 모든 시민이 태어난 날을 시작으로 의무교육까지, 그러니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고등교육인 대학교까지 꾸준하게 관찰합니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시절에는 의무교육을 초등교육과 중등교육 9년만 진행했지만, 사회민주주의 공화국인 현재의 대한민국은 고등학교와 대학교까지 의무교육으로 포함합니다. 이처럼 정부는 모든 시민을 정말로 사랑해요.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검사하는 게 있었는데요, 기억 안 나세요? 그것을 통과해야 사회로 나아갈 수 있어요. 이때 검사해요. 대한민국 정부는 MBTI 검사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관련한 결과를 개인에게 알려주지는 않아요.
여하튼, 그 검사를 통과하지 못하는 이들을 사회부적격자로 판단합니다. 물론 잠정적[52] 사회부적격자입니다. 정부는 그들을 포기하지 않아요. 갱생[53]을 위한 특수학교로 그들을 보내요. 그리고 4년을 더 교육합니다.
그래야, 대한민국에 걸맞은 시민이 되니까요. 결국,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 특수학교 4년, 총 20년을 의무교육이라 생각합니다. 정말로 놀랍지 않아요? 이렇게나 우리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
그러다 울겠어요, 아줌마. 아니, 이미 눈가가 촉촉해졌네. 그렇게나 찬양할 일인가? 이게 부자연스러운 미소[54]를 머금고 눈가가 촉촉해질 일이냐고? 내가 이상한 건지, 앞에 앉아서 일장[55] 연설을 토해내는 당신이 이상한 건지, 모르겠다. 그래, 기억이 났다. 그 시험. 사회적 적응 평가.
“대한민국은 모든 시민이 평등하고 공정한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사회 일원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대한민국 정부는 사회적 적응 평가로 지원과 재교육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본 평가는 사회적 적응 능력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 사회적 적응 능력 확인, 재사회화 방안, 그리고 사회의 질서와 안전 유지를 실행하고자 합니다.”
-사회적 적응 평가 전문-
분명히 그 평가에 ‘적합’이라는 도장을 받았는데, 도대체 현재의 나는 ‘부적합’처럼 느껴질까? 사회부적격자, 지금의 내 모습. 그러니 독신세도 밀려서 이 자리에 앉아있겠지.
“김준서 님? 일단, 김준서 님의 그동안의 행적[56]을 파악해 꾸준하게 자원봉사할 수 있는 일을 몇 가지 추려야 합니다. 오늘은 집에 돌아가시고요. 곧 다시 휴대전화로 연락할게요.”
“알겠습니다. 이대로 가면 될까요?”
“오늘은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무슨 큰일을 했다고, 속이 출출하다.[57] 하긴, 얼마만의 타의적[58] 외출인가? 근처에 요기[59]할 곳이 있던가? 한 골목 왼편에 작은 간판이 보인다. 간판에 적힌 글씨를 물끄러미[60] 바라본다.
대박칼국수집
대박이라, 대박, 내 인생에도 그런 대박이 있을까? 그런 날이 왔으면, 참, 좋겠다.
“어서 오세요, 한 분이세요? 편한데 아무 곳에 앉으시면 됩니다. 저녁이라고 하기에는 이르고, 점심이 좀 늦으셨네요.”
아, 왜 말을 시키지? 부담스럽구나. 모르는 척하련다.
“그곳은 에어컨 바람이 닿지를 않아요. 음식 드시면 좀 더울 수 있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아, 내가 어디에 앉든지. 무슨 상관이실까?
“괜찮아요, 아직 저녁 장사 전이라, 4인석에 앉으셔도 됩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아, 그냥 가기 싫다고. 난 여기가 좋다고.
“손님 같은 분만 있다면, 참 좋을 텐데요. 혼자 오셨다고 알아서 후미진[61] 곳에 앉으시고요. 가끔, 바쁠 때 혼자 와서 4인석에 앉으면 참 난처해요. 아시죠? 그 마음?”
아, 모른다고, 그냥 일어나서 다른 가게를 갈까? 그래, 일어나서 다른 가게를 가자.
“그래요, 이쪽으로 오세요. 여기가 시원해요.”
아, 그래요, 사장님이 이기셨어요. 네, 네, 그쪽으로 가지요.
“그래서 주문은?”
“칼국수 주세요.”
아지랑이[62]를 몽실몽실[63] 피운 보글보글한[64] 칼국수가 다가온다. 멍멍히 칼국수를 바라본다. 포슬포슬한[65] 김 가루와 오묘하게 섞인 말랑말랑한 밀면. 젓가락을 들어 한 입 베어 본다.
대박. 맛있다.
인생도 이처럼 맛났으면.
to be continued.......
[32] 보금자리: 지내기에 포근하고 아늑한 자리.
[33] 구사(驅使): 말이나 기교, 수사법 등을 자유자재로 다루어 씀.
[34] 피해망상(被害妄想): 남이 자기에게 해를 입힌다고 생각하는 일 《조울병의 억울 상태에 있는 환자에게 자주 보임》.
[35] 명확하다(明確―): 뚜렷하여 틀림이 없다. 명백하고 확실하다.
[36] 밈(meme)은 한 사람이나 집단에게서 다른 지성으로 생각 혹은 믿음이 전달될 때 전달되는 모방 가능한 사회적 단위를 총칭한다. (출처: 위키피디아)
[37] 소설의 풍미를 위한 완전한 허구로 비롯된 망상입니다. 이러한 그릇된 생각은 한순간도 마음에 품어서는 안 됩니다.
[38] 망상(妄想): 이치에 어그러진 생각.
[39] 초라: 보잘것없고 변변하지 못하다.
[40] 구슬프다: 마음이 쓸쓸해질 만큼 슬프다.
[41] 여지없다(餘地―): 더 어찌할 나위가 없을 만큼 가차 없다.
[42] 동태(動態): 움직이거나 변하는 상태.
[43] 악착같다(齷齪―): 끈기 있고 매우 모질다. 악착스럽다.
[44] 징수(徵收): 국가나 공공 단체에서 행정 목적 달성을 위해 국민에게서 조세·수수료·현품 따위를 거두어들임.
[45] 모순(矛盾): 말이나 행동 또는 사실의 앞뒤가 서로 맞지 않음.
[46] 창창(蒼蒼): 바다·하늘 따위가 새파랗다.
[47] 창창(蒼蒼): 앞길이 멀어서 아득하다.
[48] 창창(倀倀): 갈 길을 잃어 갈팡질팡하고 마음이 막막하다.
[49] 전체 가운데 얼마쯤.
[50] 성토(聲討): 여럿이 모여 어떤 잘못을 소리 높여 비판하고 규탄함.
[51] 분주(奔走): 몹시 바쁘게 뛰어다니다.
[52] 잠정적(暫定的): 임시로 정하는 (것). 일시적인 (것).
[53] 갱생(更生): 생활 태도나 정신이 본디의 바람직한 상태로 되돌아감.
[54] 미소 (媚笑): 아양을 떨며 아첨하듯이 웃는 웃음.
[55] 일장(一場): 어떤 일이 벌어진 한 판. 한바탕.
[56] 행적 (行蹟): 평생에 한 일이나 업적.
[57] 출출하다: 배가 고픈 느낌이 있다.
[58] 타의(他意): 다른 사람의 뜻.
[59] 요기(療飢): 시장기를 겨우 면할 정도로 조금 먹음.
[60] 물끄러미: 우두커니 한곳만 바라보는 모양.
[61] 후미지다: 구석지고 호젓하다.
[62] 아지랑이: 맑은 봄날 공중에 아른거리는 공기 현상.
[63] 통통하게 살이 쪄서 야들야들하고 보드라운 느낌을 주는 모양.
[64] 아득히 정신이 빠진 것 같다.
[65] 가루 따위가 물기가 적어 엉기지 못하고 바스러지기 쉬운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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