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의 여행은 지난날 고통을 삭제하는 것이다. 그 고통이 떠난 자리에 성숙된 내가 저장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고통이 완전히 삭제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삭제되리라, 확신한다.
조금씩 검은 기억이 퇴색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육이 줄어든 줄도 모르고, 자주 나의 몸과 기억은 기차선로 위를 계속 달리고 싶어 한다. 그러다가 결국 어느 한쪽이 지칠 땐 몸과 기억의 속도는 느려지기도 한다.
작년 겨울부터 나는 종종 자연휴양림을 찾게 되었다. 남편이 추천한 덕분이다. 본디 산과 계곡을 좋아했던 터라 숲 속에서의 ‘편안한 잠’이 최상의 바람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물소리와 새소리가 들리는 곳이라면 괜찮았다. 우리나라, 라면 먼 곳이라도 좋았다. 근간에 나의 바람이 하나씩 채워지고 있다. 어둡고 아프고 외롭고 쓸쓸한 마음들이 멱 감는 기분이랄까. 꿈속에서 나의 서재에 만큼은 푸른 나무로 가득 채워지길 바라면서 잠깐 기도 후 잠을 청하곤 했다.
오늘은 신불산 자연휴양림으로 향했다. 영남알프스로 알려진 신불산, 우리의 20대 젊음이 불탔던 신불산, 오후 3시에 도착했다. 간월산도 오르고 싶었으나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는 가급적 낮은 곳에서 쉬면서 책을 읽거나 낮은 자세로 담소를 나누기로 계획했다. 자연휴양림 하단 주차장에서 차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보라색 꽃들이 나를 향해 인사를 했다.
“그래. 보라야, 나도 참 반가워! 근데 너희들 모습 너무 예쁘다!” 나는 처음 본 꽃이라 식물 이름이 몹시 궁금했지만 잠시 참기로 했다. 오늘은 파래소 폭포 오르는 것이 목표이니까.
그나저나 힝... 내가 파래소 폭포를 다녀올 수 있을까? 이렇게 무더운 날씨에? 신불산 정상은 우리 두 아이가 꼬맹이였을 때 꼬맹이들과 함께 정상까지 갔었던 곳인데. 파래소 폭포는 내가 숲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을 때 혼자서도 몇 번 가본 곳인데... 막상 휴양림 주차장에 도착해서 높은 산봉우리를 바라보니까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질문을 하고 나에게서 답을 얻었다.
“너는 왜 산에 왔니?”
“응. 나는 편안한 잠을 자고 싶어.
너를 알고, 나를 알고 싶어.
그리고 어제의 내가 아니고 싶어.”
“응. 그렇구나. 그렇다면 내가 아닌 것에 집착하지 마, 산에만 집중해!”
"허긴 이미 일어난 일을 되새김질할 필요가 없지.
앞으로 나아가기도 버거운 세상이잖아."
파래소 폭포 가는 길은 원만해서 좋았다. 길의 폭이 좁지 않아서 좋다. 돌들이 많은 길이라 운동화나 등산화가 필수다. 그리고 예전 내가 왔을 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거리를 두고 나무의자가 비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자연휴양림과 마찬가지로 취사와 물놀이도 금지다.
숙소에서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금세 긍정이 나를 삼켰다. 산을 오르다가 힘들면 의자에 앉아서 쉬었다. 물가에 앉아서 손도 씻어 보고 물고기도 보고, 새소리 계곡 물소리 들으며 걸음을 옮기는 동안만은 어제가 비워졌다. 숲을 만난 기쁨만이 어제의 자리를 채워가는 것 같았다. 비좁은 마음을 넓혀가는 물소리가 나를 다독거렸다. 파래소 폭포 물소리가 나로 변해갔다. 설렘과 발전의 방향을 몇 줄의 글로 나타나게 했다. 검은 기억, 나쁜 기억은 자연 속에서 자연히 삭힌다고 나무, 식물, 새, 물, 곤충들과 교감하면 할수록 삭혀지는 강도는 더 세진다고.
이튿날 귀가하기 전 다시 산길을 걸었다. 남편은 파래소 폭포까지 올라갔지만 나는 중간까지만 갔다가 되돌아왔다. 나의 느린 속도가 어제 만난 보라색 꽃들을 만나게 했다. 핸드폰으로 꽃과 잎을 찍었다. 그리고 인터넷검색을 해보았다 확인결과 ‘잔대’라고 나왔다. 사실 ‘잔대’라는 식물은 처음 접했다. 아주 작은 꽃이다. 종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딸랑딸랑, 꽃들이 종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사실 숙박했던 숙소 이름이 ‘잔대’라고 해서 ‘대나무’ 인가 싶었다. 그 잔대가 아니었다. 뒤늦게 알았다. 남편은 어렸을 때부터 잘 아는 식물이라고 했다. 뿌리가 도라지처럼 생겼다고. 그 뿌리를 캐서 깨끗하게 씻어서 간식처럼 먹었다고 했다.
세상에나! 그렇다면 우리가 머문 숙소가 잔대? 어젯밤 ‘잔대꽃방’에서 일박을 했군요. 어쩐지 잠이 잘 오더라니요. 여보, 이번 여행에서 잔대를 알게 되어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신불산 하단자연휴양림은 야영장이 잘 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조용해서 좋다. 계곡을 바로 바라볼 수 있고 주변이 환해서 좋다. 텐트 치는 곳이 많지 않아서 고요히 산을 느끼고 싶은 분이라면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