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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zue Mar 25. 2024

맑스와 니체의 이야기 (시리즈 1/6)

과거를 재현하지 말고 미래를 재연하라. 혁명가이자 꿈을 이루는 방법



마르크스 동상




1.

마르크스의 200년 기념행사의 신문기사에 실린 글


"맑스가 페이스 북의 출현을 내다보지는 못했지만 마크 주커버그 사업 모델의 핵심은 파악하고 있었다"


사상가를 기념한 다는 것은

1, 희극적 반복 2, 비극적 반복 이다.


1. 희극적 반복은 옷과 문구를 빌려와 재연하는 것이며

2. 비극적 반복은 종교개혁의 정신처럼 죽은 영혼을 깃들게 하는 재현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니체다.

니체는 <삶에 대한 역사의 이로움과 해로움>에서


행동하려는 자가 역사를 대하는 방식이라고. 현재와 거대한 투쟁을 벌이려는 자. 주변에 배울만한 사람이 없어 과거의 역사적 인물로 부터 스승을 찾는 자. 루터형처럼 행동하고 투쟁하려는 자.


바로 이를 '기념비적인 태도'로 본다는 것이다.


기념비적으로 보기의 무수한 원인은 헛되다


역사를 기념비 적으로 본다는 것은, 무수한 원인들을 생략하고 결과만 보는 것과 같다. 과거의 영광을 들먹이며 새로 태어날 위대한 것들을 독살해버리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그래서 역사를 회귀한다는 것은 결과를 중요시 하기 때문에 생략과 반복이 이는 판타지를 만들어, 광신적 행위를 만들어 낸다. 이를 기념비 방식에는 "재난이 발생"한다는 말이다.



미래로 부터 현증하기


반복과 기념을. 미래와 반복을. 미래에 기록될 것을 현재로 가져와 적는 것. 이는 니체의 영원회귀와 같다.


즉 연구실 (과거의 경험한 것 : 영감) 과 놀이터 (패러디 : 안맞는 옷이 맞는 옷이다) 일 뿐인 것이다.


맑스는 말한다. "조짐들 속에서 우리의 용감한 친구 로빈 굿펠로우" (굿펠로우는 로봇으로, 미래를 예언했다)



메시아의 로봇


굿펠로우가 미래를 조짐하자 이를 우습게 여기기 보다 미래도 흔적을 남긴다 즉 '현재를 조짐'하는 것으로 예측. 메시아 선지자, 과거를 해석하는 것이 아닌 선지자. 차라투르스트라처럼 조짐을 읽어 내리는 것이다.


니체는 꼰대처럼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읊지 말고 디오니소스와 같은 유혹을 목소리를 내는 방법을 익혀라고 한다. 즉 과거에선 배워나갈 것이 없다. 오로지 혁명. 미래로의 걸음이 꿈을 이루고 새로운 변혁을 탄생시킨다는 것이다.


대강보는 것 = 현미경 관찰


2.

현미경을 겨낭하는 것은 '대강 보는' 사람들이다.

유물론자처럼 까다롭고 용감하고 섬세하고 박학다식해야 한다.


겉보기의 인사성은 독서의 해다.


데모크라테스 : 감각을 믿지 않음, 현상에 불만족, 결핍을 조사해 최대한 알아내야 한다고 해 세계여행 (박학)

에피쿠로스 : 감각을 믿음, 현상에 만족, 과학의 필연은 압박이고 노예적인 것이라 싫어함.


현미경은 전체를 가르는 미세한 균열을 볼 수 있는것. 전체의 차이를 보는 것. 우린 차이를 동일선에서 차이를 찾는다. 하지만 차이는 차이에서 낳는다. 작은 차이는 큰 차이를 만들고 이를 균열의 존재론, 사건의 존재론이라 한다.


빅뱅


빅뱅은 균열에서 시작한다. 그것이 가려낸다. 미세한 균열. 차이에서 동일성은 생기지 않는다. 차이에서 차이다.


그리스 철학 제2기(헬레니즘)에서 보편적인 것의 특수한 적용을 중심으로 한다. 보편적인 진리와 특수한 현실의 조화. 참된 것의 판단기준을 '자기의식'이라는 주관성으로 답변. 이에 회의주의 학파는 '부정'을 말해 정. 반. 합이 탄생한다.


*에피쿠로스의 문원 파피루스 증언. (기원전 3세기) 루크레티우스 시인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 = 에피크로스 증언


맑스의 헤겔철학사의 두가지 문제

1. 철학사의 거대한 계획아래 사변적이다 (개별철학의 독특성이 없다)

2. 에피크로스 등의 중요한 면모를 놓쳤다. (사유의 여러가지 독특성을 모은 히스토리. 하나의 예에 불과)


헤겔은 유물론이라는 정의를 파악할 수 없었다. 즉 대강 보는 사람들은, 헤겔과 막스의 차이를 모른다. 그렇기에 노력해야 하고 사이와 사이를 봐야하고 동일성이 아닌 경우의 수도 들여다 보아야 하는 것이다.


프로메테우스



3.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에서 국가의 목적은 자유에 있으며 국가들의 '사상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17세기 에는 군주와 교회의 복종을 삼고 있었다. 그래서 국가에 대한 자유를 요구한다. 특히 사상에 대한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한다. 사상의 억압에 대한 문제가 컸다.


막스는 19세기에 스피노자를 보았다. 청년 헤겔파 논쟁 (신앙론적 문제) 이때 성경을 어떻게 볼 것인가? 였다. 신학에 대한 논쟁이 이어졌다. 프로이센 당국은 프랑스 7월 혁명 이후 언론을 강하게 통제하기 시작했다. 특히 '검열'이 대폭 강화되었다. 이런 평행적 사고(표절) 한 막스의 논문이 있다고도 한다.


스피노자


스피노자를 놓고 막스를 보면 헤겔과는 다른 사회의 전통이 보이는 데 이것이 바로 '유물론의 계보'인 것이다.


'철학의 계보' '우발성 유물론의 계보' 철학을 '히스토리'로 볼 것이냐(이념- 단계= 철학사), '말과 사물' (고고학적)

(구조적인 사유법), 또는 계보학적(니체의 사유 유형들, 다르지만 어떤 타입, 유형들을 묶어 유사성을 말하기도 하는)

으로 말하는 것은 확연히 다르다.


이 대립은 헤르메스(신의 해석자=신학자)가 프로메테우스(철학자, 니체)에게 '제우스의 종살이'를 요구하자 이를 거부한 프로메테우스는 '바위를 나르겠다'를 자진한 것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에피쿠로스(헬레니즘 시대)'이 세계'에 '가른 삶'이 있다는 것, 그러니까 헛된 망상이나 환각, 미신을 말하는 것이 아닌 자기 삶을 가꾸고 주권적 삶을 사는 것.


 자기 긍정, 초월성의 철학구도(신학적 구조)을 지적한다.이는 내세의 삶안에서 해결하는 '에피쿠로스 정신'이 막스의 정신이며, 이는 기독사상에 반발을 샀다.


아타락시아의 철학언어 (자기 의식 갖기)가 필요한 것. 헬레니즘 시대의 삶을 '자기의 독특한 삶을 살아내는가'의 물음인 것이다. *삶의 주권성을 주장하고, 자기 역량을 강조해야 한다. 자기 무능력을 드러내서는 안된다.


<막스의 논문 참고>


 



4.

모든 운동 (클리나멘)은 심리적 자유가 아니라 자연의 우발적 사건의 문제다. 정해져 있는 충돌을 깨는 세계의 움직임처럼 사건이 우발적이지 않게 일어나 깨지고 사건이 커지는 것이다. 이는 신은 영향을 주고 있지 않으니 자기 복이나 누려라는 말로 니체가 '신의 죽음'을 말하게 된다.


즉, '사건'이 있지. '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이는 나의 주권성(아타락시아)를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유물론자들은 '신'이 아닌'사건'을 주목하고 사건을 찾는다.


*부동의 동자(에피쿠로스, 원자의 타자)를 거부하고 클리나멘이 있다 (내안의 원자, 제1원리, 사건)



(이 칼럼은 작성중입니다. 시리즈로 탄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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