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인간은 ‘질문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동물과 구분된다. 인류의 문명은 계속해서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을 던지는 인간들의 산물이다. 질문을 멈추지 않은 덕분에 우리는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은 물론, 정신세계에서의 성장까지 이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질문하기’의 중요성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질문 빈곤 사회’에 살고 있다.
‘물음표 살인마’라는 신조어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끝없는 질문 공세로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는 사람을 ‘물음표 살인마’라고 한다. 인기리에 방영했던 드라마 속 서브 남자 주인공도 끊임없이 질문을 퍼붓는 직장 동료 여자 주인공을 ‘물음표 살인마’라고 핸드폰에 저장해둔다. 또, 인터넷 용어 중에는 ‘핑거프린세스’ 줄여서 ‘핑프’라는 말도 종종 쓰이고 있다. ‘핑프’는 검색해도 나오는 정보를 게시판 질문 글로 올리는 사람에게 손가락이 공주님이라서 검색도 할 줄 모르냐고 비하하는 의도로 쓰인다.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부정적인 용어들이 적지 않게 쓰이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다양한 질문과 사유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막는 사회적 분위기를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질문 빈곤 사회>라는 책에도 나와 있듯이, 학생들은 선생에게, 아이들은 부모에게, 종교 공동체에서 구성원들은 지도자에게, 직원은 상사에게, 국민은 정치가들에게 자유로운 질문이 허용되지 않는다. 비판적 질문을 던진다면 공동체를 어지럽히는 국민, 질서를 무시하는 직원, 신앙이 부족한 교인, 버릇없는 아이로 낙인찍힌다. 개개인이 의견을 자유롭게 펼치는 것에 눈치를 주거나,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공격적으로 응대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태도는 사회를 경직되게 만든다. 이제는 그 굳은 부분들을 풀어서 유연하게 만들 시간이다.
#물음표가 박탈된 사회
<질문 빈곤 사회>의 저자 강남순 교수는 현재 대학에서 자크 데리다 사상, 코즈모폴리터니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페미니즘 등 정치·철학·종교·인권의 담론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정치, 언론, 종교, 인권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선으로 거침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데카트의 말을 빌린 ‘나는 질문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표현이 딱 알맞다. 인간은 질문하는 존재답게 계속해서 세상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책의 1부 ‘권력과 언론에 물음 묻기’에서는 세계 곳곳의 언론과 미디어를 지배하고 있는 ‘가짜뉴스’, 진실과 사실이 무엇인지 관심을 두지 않고 단지 누군가를 선동하고, 선동당하는 소위 ‘탈진실 시대’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2부 ‘타자의 얼굴에 물음 묻기’에서는 한국의 나이 집착과 서열 문화, 그리고 사랑과 휴머니티에 주목한다. 3부는 ‘관행과 대안에 물음 묻기’를 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인간의 지성 능력과 철학적 사유, 발전을 막는 반지성주의, 능력주의, 위계주의와 같은 다양한 관행을 들여다본다. 4부 ‘존재와 혐오에 물음 묻기’에서는 누군가를 혐오하고 그 혐오를 확산하는 혐오의 평범성의 심각성에 대해 언급하며, 이에 저항하여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5부는 ‘희망과 생명에 물음 묻기’를 하고 있다. 5부에서는 여러 사회 구성원과 ‘함께-잘-살아감’을 실천하는 방법과 연민과 연대의 필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질문 빈곤 사회>를 통해 저자는 비판적 사유를 하지 않고 주어진 대로 현상 유지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타자의 삶까지 파괴하는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한다. 혐오와 차별을 정당화하고 갖가지 잣대로 자기 자신, 그리고 타자를 몰아세우는 것은 비판적 사유의 부재, 질문의 빈곤이 가져온 ‘질병’이라는 것이다. 물음표가 박탈된 지금 이 사회에서 물음표를 지닌 사람은 평화를 깨고 공동체의 조화를 어지럽히는 위험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가정, 학교, 직장 등 사람이 모여있는 곳은 위계적 관계가 뒤따르고, 이런 위계주의에서 질문하기는 지양해야 할 파괴적 행위라고 보는 시선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피하지 않고 질문할 줄 알아야 한다. 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를 성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답처럼 굳어진 관행과 무의식적으로 분출되는 혐오적 표현, 비판적 사고 없이 무분별하게 선동당하는 태도에 대해 우리는 문제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얼간이의 행성을 떠나서
물음표를 박탈해가는 건 현재 굳어져 있는 교육과 문화구조이다. 기존의 구조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결코 질문하지 않는다. 나이 집착 사회, 능력 위주 사회에서 벌어지는 불편하고 숨 막히는 경쟁, 허영심과 자기과시로 도배된 SNS 교류 등은 사회를 병들게 한다. 이러한 차별과 배제를 은밀하게 가리는 문화구조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또한 입시 위주의 주입식 교육방식이 질문을 봉쇄하는 문화를 지속시키고 강화하기 때문에 이러한 교육방식에서도 벗어나야 할 때이다. 영화 ‘세 얼간이’를 보면, 주인공 란초는 획일화된 교육방식을 토대로 수업을 하는 교수들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란초는 이런 말을 한다.
“저희는 공학을 배우기보다 점수 잘 받는 방법만 배우고 있습니다. 서커스의 사자도 채찍의 두려움으로 의자에 앉는 법을 배우지만, 그런 사자는 잘 훈련됐다고 하지 잘 교육됐다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교육방식은 배움을 위해 한자리에 모인 학생들에게 그저 한정된 틀에 자수 놓는 법만 가르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교육은 사고의 다양성을 잃게 만들고 권위에 무조건적 복종을 유도한다. 진정한 배움은 무엇이고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단순히 새로운 지식 습득만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 책에서는 배움을 자신의 고유한 관점이 형성되고, 그러한 관점이 내가 타자를 보는 방식, 인생관, 세계관 등 내 삶의 방향성을 규정할 수 있는 가치관을 구성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있는 그대로의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수업에서는 새로운 배움이 불가능하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구조와 현상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라고 묻는 것을 두려워하고, 질문을 회피하고, 아예 물음표까지 빼앗긴 이 사회는 ‘얼간이’들이 사는 ‘얼간이의 행성’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얼간이’의 질문과 사유가 세상을 하나둘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행성에 물음표를 던지는 용기, 물음표를 허용하고 받아들이는 용기를 가지면 된다.
#좋은 질문은 우리 행성에 있다
의견의 충돌로 인해 어느 한쪽이 귀를 막거나, 더 이상 소통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면 곤란해진다. 질문의 빈곤을 극복하려면 우선 소통의 부재부터 해결해야 한다. 소통은 누군가를 이해하고 서로가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나와 ‘다름’을 나쁜 것으로 간주하면서 내 편-네 편, 또는 정상-비정상의 이분화된 이데올로기가 공기처럼 사회 곳곳에 퍼져 있다. 내 편이 아니면 모두 나쁜 편이라는 흑백 논리적 편 가르기가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이 행성의 한 구성원으로서 지향해야 할 사회적 가치관은 무엇일지 사유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진정한 세상을 구성하는 건 존중, 인내, 정직, 친절, 연민의 가치이다. 저자는 <질문 빈곤 사회>를 통해 우리가 추구하고 성찰해야 할 가치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 질문들은 다소 거침없고 입을 떼는 데에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오랜 시간 바뀌지 않아 녹이 슬어버린 사회를 향한 외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가지고 있는 물음표가 과연 옳은 것인지 스스로가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의문은 잠시 접어두고 질문하는 연습을 할 때인 것 같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나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열정적으로 궁금해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질문은 호기심을 구체화한다. 저자는 해답을 찾는 것이 아닌, 좋은 질문하기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좋은 질문을 통해서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들을 새로운 눈으로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좋은 질문하기를 연습해야 한다. 좋은 질문이 부재한 개인이나 사회에서, 좋은 해답이나 새로운 변혁은 불가능하다.
그 좋은 질문은 우리 행성에 있다. 이곳이 ‘얼간이의 행성’이 아닌 ‘사유의 행성’이라고 생각해보자.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들에 물음표를 붙이기 시작하면 그곳은 더 이상 ‘얼간이의 행성’이 아니다. ‘사유의 행성’으로부터 초대를 받은 것이다. ‘예’ 또는, ‘아니요’만을 요구하는 질문은 구체적인 사유와 비판, 성찰을 불러오지 못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에 ‘왜?’라고 질문하고, 대안적 세계를 상상하는 것, 그리고 다양한 문제를 문제로 보기 시작하는 것에서 새로운 배움과 변화를 마주하게 된다. ‘사유의 행성’이라고 꼭 어디 먼 곳으로 나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사유의 행성’이고 ‘좋은 질문을 끌어당기는’ 곳이다. 이제 당신은 이 행성에서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가.
#우리가 함께 잘 살아가려면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그의 책 <희망의 원리>에서, 이러한 새로운 세계를 향한 인간의 꿈을 ‘낮꿈’이라고 명명한다. 낮꿈을 통해서 인류의 문명은 무수한 변화와 변혁을 거듭해왔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는 모두 낮꿈을 꾸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어떤 낮꿈을 그리고 있는가. 나 자신이 잘살기 위해, 그리고 함께 하는 주변 사람들과 행복하기 위해 우리는 아름다운 낮꿈을 꾸고 있다. 그렇다고 낮꿈이 단순히 머리 대고 누워서 하늘만 바라보면서 꾸는 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꿈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변혁적 실천이 동반되는 꿈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기존의 현실에서 무엇이 결여되어 있고, 그것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사고하는 것부터가 낮꿈의 출발점이 된다.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성찰만큼 중요한 것은 바로 ‘함께-잘-살아감’이다. ‘함께-잘-살아감’이란 개인의 사적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정치·경제·종교·생태 등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영역과 연결되어 있다. ‘함께-살아감’의 세계로 만드는 것은 이렇게 처음에는 불가능한 것 같은 일들을 조금씩 해나가는 이들에 의해서 가능하다. 한국 사회만이 아니라, 인류가 직면하는 다층적 위기들을 넘어서서 ‘함께-살아감’이 가능하게 하려면 동질성을 지닌 사람들만이 아니라, 나와 ‘다름’을 지닌 사람들, 가까운 타자만이 아니라 기피하고 싶고 외면하고 싶은 먼 타자에게까지 연민과 연대의 손길을 확장하는 의식과 행동, 그리고 사회정치적 제도화를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위기 시대, 연민과 연대의 정치학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요청되는 이유이다. 자신의 인간됨을 지켜내면서 모두가 ‘함께 살아감’의 세계를 가꾸기 위해서는 타자의 고통과 절규에 대한 예민성을 기르고, 피해자와 연대하며, 폭력과 불의에 저항하는 사람이 되는 연습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흑백 세상에 색을 입히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다양하고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어 어느 한 문제에 말끔하고 완벽한 해답을 제시할 수는 없다. 이런 사회구조를 직접 경험하면서 불편함을 느끼게 되면, 기존보다 나은 방향으로 사회가 바뀌길 바라게 된다. 그러나 어떤 방향이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길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문제점을 시사할 때는 흑백 논리적 편 가르기 혹은 이분법적인 사고로 흐르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절대적 악과 절대적 선은 없을뿐더러, 미국 정치에 빗대어 한국 정치를 비판하는 저자의 시선은 무조건 정답이 될 수는 없다. (한국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외부자인 저자가 보는 사회와 직접 그 사회를 몸소 느끼는 내부자의 생각은 같은 점도 있겠지만, 다른 점도 분명 존재한다. 이게 맞다, 저건 아니다 판단하기 어려운 미해결 과제들은 아직도 우리 눈앞에 있다. 그런 이해관계는 뒤로 미뤄두고 당장 우리가 사는 사회를 ‘문제가 많아서 하나하나 고쳐 나가야 하는’ 곳으로 정의 내린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하다.
그리고 <질문 빈곤 사회>에서 저자는 보편적인 사회 정의에 대해 말하지만,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정의라고 할지라도 이 정의에 구체적인 사례를 들게 되면 의견이 갈라지기도 한다. 정치적 성향이나, 개개인의 손해와 이익을 따지게 되면 더더욱 그렇다. 누군가에겐 그저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이 하는 불편한 충고 정도로 들릴 수도 있다. 저자의 외침이 독자에게 그렇게 와닿으면 안 되는 일이다. 그러니 저자가 이런 점을 고려하여 독자와 섬세한 조정을 해야 한다. 또한 택배 노동자나 청소부 외에 언급되지 않은 이 사회의 수많은 사회적 약자 계층에 대한 문제에도 더 자세히 시사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 책이 한계점과 보완할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저자가 보여준 눈부시고 대담한 질문과 사유는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준다. 흑백 논리와 이분법적 사고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무채색의 사회에 색을 입히기 시작한 저자처럼 우리도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을 알록달록한 색으로 칠할 차례이다.
#사유의 세계로 가는 입장권
얼마 전에 흥미로운 드라마를 봤었다. 법학 전문 대학원을 배경으로 그리고 있는 드라마였는데 어떤 교수를 학생들이 소위 ‘양크라테스’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교수의 성(姓)과 소크라테스를 결합한 단어였다. 교수는 ‘소크라틱 메소드’라고 하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활용하여 수업을 진행했다. 교수가 질문을 던지면 학생들은 그 질문에 대답하고 교수는 그 대답을 논박한다.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하며 제자들이 본인의 무지를 성찰하길 바랐던 소크라테스처럼, 그 교수는 학생들이 계속해서사유할 수 있도록 유도한 것이다. 질문이 부재한 사회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회 사이의 연결고리도 끊어지게 된다. 물음표라는 갈고리를 이용해 끊어진 고리들을 다시 연결해야 할 때이다. 물음표는 사유의 행성으로 가기 위해 문을 여는 열쇠의 역할도 한다.
완전한 세계라는 건 도래하지 않았다. 완전한 세계는 언제나 ‘아직-아닌-세계’로 남아있다. 우리는 각자 다양한 방식과 가치관으로 지금보다 나은 ‘아직-아닌-세계’를 꿈꾼다. 질문을 하는 사람과 그 질문에 대답을 해줘야 하는 사람도 모두 용기와 노력이 필요하다. 질문을 통해 성찰하고 비판적 사유를 하게 되면 ‘함께-잘-살아감’도 실천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사유의 행성으로 가는 초대장을 받았다. 필요한 준비물은 물음표와 꿈이다. 준비가 다 되었으면 걸어 나아가보자. 지금보다 더 밝고 눈부신 세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