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촌부 일기

어탕을 끓이며

by 박래여

어탕을 끓이며


가을장마가 길다. 오곡이 무르익어가고 벼 타작이 시작되는 철이다. 가을볕은 따가울수록 좋은데 날마다 흐리고 소나기 온다. 텃밭의 가을무와 배추는 벌레가 숭숭해도 너풀너풀 잘도 자란다. 속을 채우기 시작한 배추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일회용 나무젓가락과 통을 들고 일을 삼으며 벌레를 잡아내던 시어머니를 기억한다. 나도 어머님처럼 벌레를 잡아볼까 하고 쪼그리고 앉았다가 겨우 한두 마리 잡고는 손을 턴다. ‘너희들도 먹고 살아야지. 나누어 먹지 뭐. 그래도 우리 먹을 거는 남겨주면 좋겠다.’ 잡은 벌레를 죽이지도 못하고 울타리 너머 던진다.


참 오랜만에 혼자의 시간이다. 아침 일찍 농부는 이웃집 비닐하우스에 일손을 돕기 위해 떠났고, 딸은 도시의 지인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한다고 떠났다. 말을 나눌 상대도 없으니 침묵수행은 기본이다. 세탁기가 돌 동안 황정은 작가의 연작 단편집 『연년세세』를 읽는다. 며칠 전 그 작가의 장편 『백의 그림자』를 읽었다. 최근에 나온 에세이 집 『일기』를 먼저 손에 잡았다가 뒤로 넘겼다. 연휴에 딸은 황정은 작가의 작품집 세 권을 선물했다. 책 읽기에 게을러진 엄마를 채근하는 뜻이 담기기도 했다. 술술 읽히는 소설이다. 소설을 읽다가 고단하면 널브러진 채 편안함을 추구하기도 한다.


혼자 놀다 무료해지면 일거리를 찾는다. ‘맞다. 어탕 끓여야지.’ 손이 많이 가는 어탕, 비린내가 진동하는 어탕을 끓이려면 일이 많다. 지난 오일장에 회를 사고 매운탕거리를 덤으로 받아왔었다. 장날마다 난전에서 회를 쳐주는 요리사가 있다. 수족관에는 활어가 춤을 추고 남자는 활어를 다듬고 여자는 회를 친다. 회가 싱싱하기도 하지만 매운탕거리를 덤으로 준다. 나는 회보다 매운탕거리를 더 반긴다. 시부모님 살아계실 때부터 단골이다. 굳이 횟집 갈 필요 없이 계절에 어울리는 횟감을 맛볼 수 있다. 지금은 전어 철이다. 전어와 밀치, 방어, 줄돔 등, 다양하다. 전어와 밀치 줄돔을 한 팩씩 샀었다.


어탕에 들어갈 재료도 냉장고에 든 것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텃밭에서 무청을 솎아다 삶고 표고버섯, 새송이 버섯, 무와 양파, 대파, 마늘과 생강, 들깨가루, 제피가루, 고추장, 고춧가루, 된장을 준비했다. 생선뼈와 대가리를 씻어 냄비에 넣어 푹 고우는 동안 준비했던 재료를 큰 양푼에 주물러 간이 배게 해 놓고 허리를 폈다. 막간을 이용해 현대에서 시간여행으로 에도시대에 불시착한 젊은 의사의 활약상을 그린 일본 드라마를 본다.


그 사이 생선뼈가 푹 고였다. 체에 걸렀다. 주걱으로 요리조리 저어가면서 뼈를 발라낸다. 노란 기름이 동동 뜨는 생선국물이 찐하다. 그 국물에 준비한 재료를 넣어 불 위에 올려놓고 설거지를 해 놓고 창문을 몽땅 열었다. 내 옷에도 손에도 비린내가 진동한다. 집안에 깃든 비린내를 없애기 위해서 향도 피운다. 나이 탓인지. 어탕이나 추어탕, 곰탕을 끓이면 식구들은 좋아하지만 나는 끓이는 과정이 번거로운데다 비린내가 싫다. 그렇다고 소량을 마당가에서 끓이기도 귀찮다. 명절 때는 대량으로 끓이니 마당에 솥을 걸지만.


잰걸음 치다보니 오전에 훌쩍 갔다. 혼자 사는 사람은 늘 사람이 그립겠지만 가족과 함께 사는 사람은 가끔 혼자의 시간이 필요하다. 가만히 머릿속을 비울 수 있는 시간, 혼자만의 시간은 값지다. 맛있는 냄새가 난다. 어탕이 끓는 시간, 정성이 들어간 음식은 한 맛 더 난다던가. 농부와 딸을 위해 큰 일 한 가지 치른 것 같은 뿌듯함으로 남은 시간을 독서에 골인한다. 머릿속이 맑아지면 눈에 보이는 사물도 맑아지겠지.


그러나 저녁 햇살이 기우뚱하자 자꾸 삽짝으로 눈이 간다. 올 때가 됐는데.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내 인생의 한 컷, 특별한 결혼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