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으로서의 교실
“시간이 부족해요!”
논술 평가 시간 마지막 10분, 교실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이다. 그 순간 아이들의 글씨는 완전히 변한다. 평소 또박또박 쓰던 아이도, 이미 휘갈겨 쓰던 아이도, 모든 아이들의 펜이 광속으로 움직인다.
재밌는 건 이 ‘광속 필기’에도 나름의 패턴이 있다는 점이다.
‘폭풍족’은 말 그대로 폭풍처럼 쓴다. 펜이 종이 위를 미끄러지는 소리가 "사각사각"을 넘어 "서걱서걱" 교실에 울려 퍼진다. 글자의 형태는 거의 알아볼 수 없지만, 그 절실함만큼은 확실히 전달된다. 종이가 찢어질 것 같은 필압으로 마지막 한 글자까지 채워 넣는다. 정말 찢어질 때도 있다. 답안지 뒷면을 만져보면 올록볼록하게 엠보싱 효과가 느껴질 정도다.
‘스프린터족’은 다르다. 평소에는 느긋하게 쓰다가 마지막 순간에 폭발적인 속도를 낸다. 마치 100미터 달리기 선수처럼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의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이들의 답안지 뒷부분을 보면 앞부분과 완전히 다른 글씨체를 볼 수 있다. 한 사람이 쓴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극적인 변화다.
반대로 ‘일정속도족’도 있다. 시간이 부족하든 넉넉하든 항상 같은 속도로 쓴다. 이들을 보고 있으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만의 리듬을 잃지 않는다. 이들에게 글씨 쓰기는 어쩌면 외부의 압력에도 흔들리지 않으려는 일종의 수행일지도 모른다. 다만 시간이 부족할 때는 문제가 된다. 끝까지 쓰지 못하고 시간이 끝나는 경우가 많다.
글씨를 쓰는 속도를 보면 그 아이의 성격이 보인다고 했던가. 정말 그런 것 같다.
평소 수업 시간에도 마찬가지다. 칠판에 판서를 할 때 누군가는 번개처럼 빨리 받아 적고, 누군가는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쓴다.
‘질주족’은 선생님이 칠판을 지우기 전에 무조건 다 받아 적는다. 내용을 이해하는 건 나중 문제다. 일단 받아 적고 본다. 펜을 쥔 손은 바쁘지만, 눈동자는 멍할 때가 많다. 이들의 노트는 정보량은 많지만 가독성은 떨어진다. 이해보다 기록을 앞세우는 태도. 어쩌면 불안감의 표현일 수도 있다.
‘선별족’은 다르다. 중요한 것만 골라서 쓴다. 속도는 느리지만 효율적이다. 선생님이 농담을 할 때는 펜을 놓고 같이 웃다가, 핵심 키워드가 나오면 다시 펜을 든다. 이들의 노트는 얇지만 알차다. 시험 때 이런 아이들의 노트가 인기가 많다. 이들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 판단하는 자신만의 기준을 가진 셈이다.
요즘은 새로운 ‘카메라족’도 등장했다. 수업 내내 팔짱을 끼고 눈으로만 보다가, 수업이 끝날 무렵 칠판 전체를 사진으로 찍어간다.
“너 그거 다시 안 볼 거잖아. 들으면서 필기하는 연습도 좀 해봐.” 한마디 하면, “아닙니다, 선생님. 필기하는 잠깐의 시간 때문에 선생님 수업의 황홀한 호흡을 놓칠 수 없습니다.”라며 말도 안 되는 허세를 부린다. 나중에 물어보면 역시나 다시 보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아마 그 사진은 마음의 위안, 혹은 일종의 '안전빵'일 것이다.
필압도 흥미롭다. 어떤 아이는 깃털로 쓴 듯 가벼운 글씨를, 어떤 아이는 못을 박듯 강한 글씨를 쓴다. 독자 당신의 필압은 어느 쪽인가?
그런가 하면 ‘파워족’도 있다. 연필심이 자주 부러진다. 샤프 심도 마찬가지다. 볼펜을 쓸 때는 종이 뒷면까지 자국이 난다. 이들의 글씨에는 힘이 있다. 확신에 찬 느낌이랄까. “내가 여기 있다! “고 외치는 것 같다. 어떤 아이는 중지에 굳은살이 베일 정도로 힘을 준다. 그 굳은살이 마치 장인의 증표처럼 보이기도 한다.
반대로 ‘솜털족’의 글씨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연하다. 형광등 아래서도 각도를 맞춰야 겨우 보인다. 처음엔 자신감이 없어서 그런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도 하나의 스타일이다. 은은한 매력이 있다. 이들은 손이 종이에 거의 닿지 않는다. 마치 공중에서 글씨를 쓰는 것 같다.
글씨의 힘은 곧 그 사람의 의지일까? 강한 필압은 진심을, 약한 필압은 무관심을 의미한다고 섣불리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어쩌면 필압은 그저 그 사람 고유의 에너지일 뿐, 성실함의 척도는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맞는 힘을 찾는 과정이다.
오늘도 교실에서는 스물몇 가지 다른 속도로, 스물몇 가지 다른 필압으로 이야기들이 써져 나간다.
빠르든 느리든, 강하든 약하든, 그 모든 것이 아름다운 그들 만의 리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