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고요한 아우성 - 시험 시간의 풍경들

풍경으로서의 교실

by 오이랑

논술 평가 시간의 교실은 이상하다. 스무 명 남짓의 아이들이 한 공간에 있는데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다.


하지만 정말 조용한 걸까?


아니다. 이 교실은 사실 아주 시끄럽다. 다만 소리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가장 먼저 들리는(?) 건 ‘절망의 소리’다. 문제를 보는 순간 굳어지는 표정, 천천히 고개를 푸는 모습, 깊은 한숨. “이건 뭐야…” 하는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다. 펜은 들고 있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답안지만 뚫어져라 쳐다본다.


곧이어 들리는 건 ‘시도의 소리’다. 일단 뭔가라도 써보겠다는 의지. 펜끝이 종이에 닿는다. 서론의 첫 문장을 썼다가 지운다. 다시 써본다. 또 지운다. 답안지에는 지우개 찌꺼기가 쌓인다. 이 흔적들은 실패의 기록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으려는 노력의 증거다.


‘영감의 소리’도 있다. 갑자기 뭔가 떠올랐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펜이 빨라진다. 표정이 밝아진다. “아, 맞다!” 하는 마음이 글씨에 그대로 담긴다. 이때의 글씨는 평소보다 더 크고 자신감이 넘친다.


그런가 하면 ‘포기의 소리’도 들린다. 더 이상 쓸 말이 없을 때. 펜을 내려놓고 팔짱을 끼거나, 시계를 본다. 어떤 아이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본다. 이미 마음은 교실 밖으로 나가 있다.


답안지를 자세히 보면 더 재밌다. 각각의 답안이 하나의 드라마다. 독자 여러분의 학창 시절 답안지는 어떤 유형이었는지 떠올려보자.


‘완벽주의자’의 답안지는 박물관에 전시해도 될 만큼 깔끔하다. 글씨체도 일정하고, 줄도 맞춰 쓰고, 여백도 적절히 사용한다. 심지어 글을 시작하기 전에 연필로 개요를 짜고 그 위에 펜으로 덧쓰는 치밀함을 보인다. 하지만 가끔 시간이 부족해서 마지막 문제를 못 푸는 경우가 있다.


‘현실주의자’의 답안지는 다르다. 아는 건 확실히, 모르는 건 솔직히. “이 부분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쓰는 용기도 있다. 이런 솔직함이 오히려 좋을 때가 있다.


‘창의파’의 답안지는 예술 작품이다. 논술 답안인데 여백에 그림도 그리고, 화살표로 설명도 연결하고, 때로는 만화까지 그린다. 답의 논리적 흐름은 엉망일지라도 보는 재미는 있다.


‘전략가’의 답안지는 계산적이다. 배점이 높은 문제부터 푼다. 시간 배분도 철저하다. 서론, 본론, 결론의 분량을 미리 계획한다. 모르는 내용은 아는 척이라도 하며 분량을 채운다. 효율성을 추구한다.


가장 인상적인 건 ‘진실파’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고, 확실하지 않은 건 “아마도”라는 표현을 쓴다. 추측인지 확신인지 명확히 구분한다. 이들의 정직함은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 않는 용기'에서 나온다. 점수라는 현실적인 불이익 앞에서도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는 태도. 나는 이것이야말로 교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빛나는 윤리적 순간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답안지 곳곳에는 작은 흔적들이 남는다. 답을 고민하다 생긴 연필 자국들, 지우개로 문지른 흔적들, 때로는 작은 땀방울 자국까지. 이 모든 것이 50분간의 치열한 사투를 증명한다.


시험이 끝나고 답안지를 걷을 때면 항상 생각한다. 이 조용했던 50분 동안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오갔을까. 좌절과 희망, 포기와 도전, 절망과 영감이 종이 위에 그대로 담겨 있다.


어떤 답안지는 읽는 것만으로도 그 아이의 마음이 느껴진다. 어떤 답안지는 해독하는 게 숙제다.

하지만 모든 답안지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

50분간의 고요한 아우성. 그것이 논술 평가 시간, 교실의 진짜 모습이다.


keyword
토, 일 연재
이전 03화속도와 리듬의 미학 - 글씨 쓰는 속도와 필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