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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의 여백은 누구의 땅인가 - 낙서의 고고학

풍경으로서의 교실

by 오이랑

교과서를 펼쳤을 때 가장 먼저 보는 곳은 어디일까? 본문? 아니다.


여백이다.


그 여백에는 온갖 것들이 살고 있다. 글자, 그림, 도형,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암호 같은 것들까지. 교과서 여백은 하나의 우주다.


‘도형파’가 가장 많다. 네모, 세모, 동그라미를 끝없이 그린다. 처음엔 단순한 점과 선에서 시작해서, 나중에는 페이지 전체를 덮는 거대한 프랙탈 아트나 3D 큐브로 발전한다. “집중할 때 손이 저절로 움직여요.”라고 한다.


‘인물화파’도 있다. 만화 캐릭터를 그리거나, 친구 얼굴을 그리거나, 때로는 선생님을 그리기도 한다. 실력은 천차만별이지만 열정만큼은 프로급이다. 교과서 속 칸트 사진에 뿔과 수염을 그려 넣거나, 셰익스피어에게 선글라스를 씌워주는 식이다. 그들의 손에서 위인들은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한다.


‘글자파’는 이름을 쓴다. 자기 이름, 친구 이름, 좋아하는 연예인 이름. 같은 이름을 수십 번 쓰기도 한다. 글씨체도 다양하다. 뾰족한 고딕체, 흘려 쓴 필기체, 속을 비워낸 버블체까지. 여백이 폰트 디자인 연습장이 된다.


‘철학파’는 문구를 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꿈을 포기하지 말자” 같은 진중한 문구부터 “배고프다”, “집에 가고 싶다” 같은 솔직한 문구까지. 교과서가 일기장이 된다.


교과서 본문이 ‘주어진 의무’라면, 여백은 ‘스스로 찾는 의미’의 공간이다. 교과서 본문이 ‘평가받는 세계’라면, 여백은 ‘평가받지 않는 자유의 영토’다.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오롯이 자신만의 것을 펼쳐놓을 수 있는 공간. 어쩌면 인간에게는 이런 쓸모없는, 그러나 자유로운 여백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스토리파’는 여백에 연재소설을 쓴다. 한 페이지에 한 장면씩. 다음 페이지에 “계속”이라고 써놓는다. 옆자리 친구가 "다음 화 언제 나와?" 하며 독촉한다. 교과서가 웹툰 플랫폼이 된다.


‘건축파’는 건물을 그린다. 처음엔 단순한 집 그림에서 시작해서, 점점 복잡한 빌딩, 성, 우주선까지 그린다. 여백이 부족하면 다음 페이지로 이어진다. 교과서가 설계도가 된다.


‘메모파’는 실용적이다. 중요한 부분에 화살표를 그리고, 요약을 써놓고, 시험에 나올 것 같은 부분에 별표를 친다. 여백이 참고서가 된다.


어떤 아이들은 여백에 친구와 대화를 한다. “이거 무슨 뜻이야? “라고 쓰면 옆 친구가 답을 써준다. 교과서가 메신저가 된다. 이 독자 여러분도 학창 시절, 자신만의 여백 활용법이 있었을 것이다. 당신은 어떤 ‘파’였는가?


가끔 여백을 아예 건드리지 않는 아이도 있다. 깔끔하게, 원래 모습 그대로. “교과서는 교과서답게 써야죠.” 하는 마음인 것 같다. 이것도 하나의 철학이다. 정해진 규범을 따르는 것도 존중받아야 할 선택이다.


한 번은 교과서를 걷으며 여백들을 유심히 봤다. 정말 다양했다. 어떤 페이지는 미술관 같았고, 어떤 페이지는 일기장 같았고, 어떤 페이지는 설계도 같았다.


“선생님, 교과서에 낙서하면 안 되나요?” 한 학생이 물었다.


나는 잠깐 생각했다. “안 된다고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네. 네 교과서니까.”


예전 중학교에 근무할 때, 학년 말에 '교과서 표지 꾸미기' 활동을 공식적으로 진행해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아이들 반응이 영 시큰둥했다. 한 녀석이 말했다. "선생님, 이런 건 몰래 해야 희열이 있는데, 샘이 이렇게 판을 깔아주니 재미가... 왠지..."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 낙서의 본질은 어쩌면 금지된 영역을 침범하는 '일탈의 즐거움'에 있는지도 모른다.


교과서의 여백은 아이들만의 공간이다. 상상력이 펼쳐지는 공간, 창의력이 자라나는 공간, 개성이 표현되는 공간. 그 여백 하나하나가 그 아이의 내면을 보여준다.


어떤 여백은 질서 정연하고, 어떤 여백은 자유분방하다. 어떤 여백은 채워져 있고, 어떤 여백은 엉성하다.

또, 어떤 여백은 깔깔거리고, 어떤 여백은 쓸쓸하다. 하지만 모든 여백에는 공통점이 있다. 살아있다는 것.


오늘도 교실의 교과서들은 여백에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스무 가지 다른 우주. 그 모든 우주가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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