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너머의 존재들
B는 내가 중학교에 근무할 때 가르쳤던 학생이다.
그리고 몇 년 후, 내가 인문계 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기면서 운명처럼 그 아이를 다시 만났다. 교무실 책상에서 출석부를 넘기다가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을 때의 반가움도 잠시, 나는 B가 중학교 시절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음을 금방 알아차렸다. B는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스스로의 색채를 지우는 아이였다. 교실 맨 뒷줄 구석, 창가 자리는 언제나 그의 차지였다. 발표를 시키기 전까지는 목소리조차 듣기 힘들었고, 쉬는 시간에도 시끌벅적한 아이들 무리에 끼지 않고 홀로 이어폰을 낀 채 창밖을 내다보거나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그의 존재감만큼이나 희미했던 것이 바로 그의 손글씨였다. B의 노트와 답안지는 채점자를 고행의 길로 인도했다. 필압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펜 끝이 종이 표면을 겨우 스치고 지나간 듯한 글씨들은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각도를 조절해야 겨우 형태를 판독할 수 있었다. 채점할 때마다 내 미간에는 주름이 잡혔다. 처음에는 그저 성의 부족, 혹은 무기력함의 표현이라 생각했다. "B야, 글씨에 힘 좀 줘.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선생님이 알 수가 없잖아." 다그치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B의 대답은 언제나 "네..."뿐이었고, 다음 날 그의 글씨는 어김없이 현실의 중력을 거부한 채 허공으로 날아갈 듯 희미했다.
남학생들의 세계는 종종 불필요할 정도로 거친 힘을 숭배한다. 목소리가 커야 하고, 행동이 과감해야 하며, 심지어 글씨조차 힘 있게 휘갈겨 써야 '남자답다'라고 여겨지는 분위기 속에서 B의 글씨는 이질적이었다. 그것은 마치 이 모든 소란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는 소극적인 시위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B의 글씨를 보며, 이 아이가 현실 세계와의 마찰을 극도로 회피하고 있으며, 어쩌면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라 섣불리 진단했다. 교사로서의 조급함에, 이 아이를 '개선해야 할 대상'으로 분류했던 것이다.
그 편견이 깨진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였다.
학기말 자율교육과정 활동으로 진행한 철학 개념으로 노랫말 개사하기에서 걷은 원고들 사이에서 B의 시(詩)를 발견했다. 제목도 없이 제출한 몇 편의 시는, 내가 알던 B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담고 있었다. 언어는 날카롭고 이미지는 선명했으며, 존재의 소외와 현실의 부조리를 꿰뚫는 시선은 서늘하기까지 했다. 충격을 받은 나는 B의 교과서를 다시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때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본문의 필기는 여전히 의무감에 눌린 듯 희미했지만, 교과서의 여백은 B의 진정한 영토였다. 그곳은 B가 구축한 정교하고 광활한 우주였다. 역사 교과서 속 인물의 초상화 옆에는, 그 인물이 겪었을 법한 심리적 풍경이 초현실주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지루한 과학 도표 옆에는 그 원리를 기반으로 한 상상의 기계 장치가 복잡한 톱니바퀴를 맞물린 채 그려져 있었다.
B는 현실의 단단한 텍스트 위에서는 최소한의 접촉만을 유지한 채,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여백에서 자신만의 언어로 세계를 재창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B에게 손글씨는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의 소음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방음벽이었고, 그 누구의 침범도 허용하지 않는 내면의 성소(聖所)였다. 그의 가벼운 펜 끝은 현실의 마찰을 피하는 나약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마찰에 닳아 없어지지 않으려는 섬세한 저항이었다.
윤리 교사로서 나는 학생들에게 '공동체 속에서의 역할'을 강조하지만, B는 나에게 '개인의 우주를 지키는 일'의 중요성을 가르쳐주었다.
모든 존재가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내야만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가장 희미한 글씨 속에 가장 농밀한 이야기가 담겨 있음을, 나는 B를 통해 배웠다.
교사의 역할은 모든 학생을 양지로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늘 속에서 피어나는 고유한 빛깔을 발견하고 그늘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