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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짊어진 듯한 손아귀, A의 이야기

행위 너머의 존재들

by 오이랑

몇 해 전 담임을 맡았던 반에 A라는 아이가 있었다.


A의 손글씨는 힘이 넘쳤다. 단순히 필압이 강한 정도가 아니라, 종이 한 장을 넘겨 다음 장에까지 펜 자국을 새겨 넣을 정도였다. 그의 필기 노트를 걷어 빛에 비춰보면, 앞장의 글씨들이 뒷면에 올록볼록한 점자로 솟아올라 있었다. 펜을 쥔 셋째 손가락 마디에는 항상 검붉은 굳은살이 단단하게 박여 있었고, 그 굳은살은 학기 말이 되어도 좀처럼 옅어지지 않았다.


얇은 샤프심은 A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툭하면 부러졌다. “아, 또.” 작게 탄식을 내뱉으며 샤프심을 가는 소리가 유난히 자주 들렸다. 그래서 그 아이는 언제나 1.0mm 이상의 두꺼운 심이나, 잉크가 왈칵 쏟아지는 유성 볼펜을 고집했다.


처음에는 그저 승부욕이 강한 남학생의 전형이라고 생각했다. 소위 말하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글씨'에 대한 통속적인 이야기들처럼 말이다. 강한 의지력, 목표 지향적인 태도, 지기 싫어하는 성격. 글씨가 운명을 결정한다는 식의 자기 계발서에서 흔히 예시로 드는 그런 필체였다.


하지만 A의 학교생활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체육 시간에는 누구보다 맹렬하게 뛰어다녔지만, 정작 교실에서는 필요 이상의 말수가 적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웃다가도 문득 먼 곳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짓곤 했다.


성적은 그 노력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오르지 않았다. 특히 유연한 사고를 요구하는 국어 서술형이나 윤리 토론 과목에서는 글씨의 힘이 무색하게 낮은 점수를 받았다. 그의 답안지는 힘은 넘쳤지만, 논리의 흐름이 경직되어 있었다.


A의 글씨에는 힘은 있었지만 리듬감이 없었다. 속도를 내야 할 때와 멈춰야 할 때를 구분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압력으로 종이를 짓눌렀다.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가 저속으로 벽을 밀어붙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A의 어깨는 필기할 때뿐만 아니라 앉아 있을 때조차 늘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윤리 교사로서 나는 '책임감'이라는 덕목을 가르친다. 하지만 A를 보면서 그 덕목이 때로는 한 사람을 옥죄는 흉기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학기 중반이 지나서야 알게 된 그의 가정사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홀로 생계를 책임지시는 어머님, 그리고 자신이 돌봐야 하는 어린 동생. 열여덟 살의 어깨에는 이미 한 가정을 짊어진 무게가 실려 있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시간은 그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자신만을 위한 투자'였고, 그렇기에 단 한순간도 허투루 보낼 수 없다는 강박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때서야 A의 필압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미래를 향한 진취적인 에너지가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 무너지지 않으려는 절박한 버티기였다. 글자 하나하나를 눌러쓰는 행위는,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은 자신을 종이 위에 고정하려는 필사적인 의식이었다. 우리는 종종 눈에 보이는 현상만으로 타인을 쉽게 판단한다. 강한 필압을 보고 '공격적이다' 혹은 '의지가 강하다'라고 단정 짓는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수백 가지 다른 이유가 존재할 수 있다.


A에게 교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섣부른 조언이나 경제적 지원에 대한 언급은 오히려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 있었다. 그저 그의 노트를 묵묵히 보며 그 눌러쓴 글자들 속에 담긴 무게를 가만히 느끼는 것이었다. 때로는 이해한다는 말보다, 그저 알아봐 주는 시선 하나가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으니까.


A가 졸업하던 날,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동안 정말 애썼다. 이제는 손에 힘 좀 빼고 살아도 괜찮다." 그는 그저 멋쩍게 웃기만 했다. 그 웃음 뒤에 가려진 삶의 무게를 감히 짐작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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