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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유 Dec 17. 2022

나는 나를 아프게 두지 않을 거야.

짧은 우울증 약 복용기.

 지난 글에서 내가 무던하다고 했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아직 한 달이 조금 지난 이야기인데 벌써 그럴 수가 있다고?

도파민 과다 아니야?

너 막 방어기제 이런 거 아냐?


 많은 분들이 걱정해 주셨다. 하하. 

결론은 그 당시의 감정은 약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정직하게 상실의 5단계를 아주 착실히 겪어나가고 있다.

심리학 개론에서도 배우고, 많은 책과 미디어에서 다루는 슬픔, 혹은 애도, 상실의 5단계는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확실히 부정의 단계는 지났다. 


 가끔 분노는 치밀긴 하지만 그래도 그건 어쩔 수 없는 내 인간성의 한 부분이라, 

아주 나중에도, 할머니가 돼서도 이 사건을 떠올리면 분노할지도 모른다.

한번 시원하게 욕하고 말면 되니 이것도 문제없다.

지금은 수용으로 가는 그 어디 길목에서 조금 왔다 갔다,

뒤로 빽도 했다, 어떤 날은 앞으로 마구 달려갔다 이러는 중이다.


 봄이 올 때까지 잘 견뎌보자고 스스로 다짐했었다.

그런데 마음이 뒤로 많이 뒷걸음질 쳤던 어느 날, 심장이 커피를 다섯 잔 원샷한 것 마냥 너무 두근거렸다.

그래서 병원을 찾았다.

동네 커뮤니티를 검색해서 선생님이 친절하고 말을 잘 들어준다는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정신건강의학과 초진 같은 경우는 웬만한 곳이 예약이 필수였다.

지금 마음이 아프고 불안하다고 막 달려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가장 빨리 예약이 가능한 날은 일주일 후였다. 그렇게 초진 예약을 잡아 놓고, 하루하루를 보내는데 또 다음날은 '나 너무 멀쩡한데?'싶어 예약을 취소할까 싶다가, 

또 어떤 날은 '왜 이렇게 일주일이 긴 거야?' 싶다가...

그렇게 생에 첫 신경 정신과 진료를 받게 되었다.


 졸업한 지 거의 6년이 다 되어가 대부분 잊어버렸지만 난 나름 심리학과 출신이다.

자살 방지 콜센터에서 인턴으로 근무한 적도 있고, 학부 시절 제일 열심히 공부했던 과목도 

'Abnormal Psychology'(이상 심리학)이었다. 

이상 행동과 정신 장애에 대해 체계적,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심리학의 한 분야로 수많은 약 이름을 외웠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마음이 아프고, 정신적으로 불안한 곳이 있으면 병원에 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막상 정신과에 가려니 겁도 나고.... 

그렇게 잔뜩 긴장을 안고 선생님을 만났다.


 상담센터를 간 게 아니라 병원을 찾았기 때문에 증상을 말하면 약을 처방받고 끝날 줄 알았다.

병원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간 곳은 사람들이 추천하는 이유가 있었다.

선생님은 지금 내가 처한 상황부터 가족 관계까지 아주 자세한 것들을 물어봤다.

조금은 무서운 의사 선생님이 따뜻한 기계 같은 어투로 말씀하셨다. 


 "지금 이 상황에서 괜찮은 게 더 이상한 거예요. 우울증이다, 불안장애다, 공황장애다 이런 진단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세상 어떤 사람 누구든 이 상황이 되면 이런 증상을 겪을 거예요. 

우리 우선 잘 자고, 두근거리는 걸 멈춰봐요."


 그렇게 약을 처방받았다.

집에 와서 처방전을 검색해보니 보통 우울증과 불안장애에 처방되는 약인데 일반적인 환자들이 먹는 양의 1/4 정도 되는 수준이었다. 

하루 끝, 자기 30분 전 일주일 동안 먹어보기.


 약 복용을 시작하고 며칠 후, 이상하게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이 들었다.

일주일을 보내고 다음 진료 때 선생님께 그런 증상을 이야기하니 흔히 있는 부작용이라고 했다.

약의 종류를 바꿔보기로 하고, 역시나 꽤 오랜 시간 상담을 했다.

일주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하고... 

첫 상담 때와는 달리 울지도 않았다.


 "아주 잘 이겨내고 있는데요?"

 선생님의 입꼬리가 살짝 호선을 그렸다.

 "제가 생각해도 그래요."

 그 와중에 칭찬 들었다며 좋아했다.


선생님은 나에 대한 어떤 기록을 하셨을까?


 그렇게 바뀐 약을 들고 와서 복용을 시작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이번 약은 더 말썽이었다. 엄청난 무기력증과 멍해진 머리.

글이 써지지도, 책이 읽히지도 않았다. 그리고 밤에 잠에 들 때도 깊은 잠을 자는 게 아니라 이상한 형체가 눈앞에 떠다니는 거 같기도 하고...

덜컥, 겁이 났다.


 '아, 내 몸이 약을 먹지 말라고 하는 거구나.'

스스로 약 먹기를 중단하고 일주일 뒤 약속된 날 다시 병원에 찾았다.

선생님 역시 약을 그만 먹을 것을 권했다.

우울증 약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은 생각을 멈추게 돕는다는 것.

그런 작용을 한다는 걸 나도 어렴풋이 기억해냈다.


 내가 아픔을 대처하는 방식은 울고 싶을 땐, 실컷 울고, 화내고 싶을 땐 화도 내고. 

또 글로 써내고. 그런 거였는데.

첫 상담 때, 선생님은 내가 이 일을 글로 쓰고 있다고 말하자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거 같은데.... 과거가 자꾸 떠오르지 않겠어요?"

 라며 글을 쓰지 말라는 조언을 하셨었다.

난 말도 안 듣고 괜한 고집으로 계속 글을 썼다. 그리고 생각보다 빠르게 괜찮아졌고,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기회도 만났다. 


 "건강한 사람이네요."

 라는 칭찬을 또 들었다. 머쓱했다.

사실 나는 나대로 혼돈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그 남자에게 전화도 했다. 다시 부정의 시기로 돌아가기도 하고, 분노 상태가 되기도 하고. 그를 탓하기도 하고, 걱정하기도 하고, 보고 싶다며 울기도 하고. 


 그렇게 세 번째이자 마지막 상담이 끝이 났다.

갑자기 두근거리는 증상이 찾아오면 먹으라며 새 처방전을 받았다.


 "혹시라도 너무 힘들고 심장이 두근거릴 때, 마지막 기댈 곳이라고 생각해요."

라며 선생님은 '안심용'약을 주셨다. 그리고

 "우리 더 안 봐도 될 것 같은데. 새로운 출발 응원할게요."

 라며 환하게 웃어주셨다.


 약이 주는 효과는 확실하다. 내가 지난 글에서 적은 것처럼 나의 이야기가 다른 먼 사람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별로 슬프지 않아'라고 말할 수도 있고 '이제 기억도 잘 안나'라고 말이 나올 때도 있었다.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면, 그래서 몸과 마음이 힘들다면 병원에 가보기를 추천한다.

나 같은 경우는 병원에 세 번 가는 동안 내가 상실을 극복하는 방식이 뭔지 깨달았다.


 많이 생각하고, 표현하고, 또 생각하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해버리고.

엄살 부리고 싶을 때는 마구 엄살도 부리면서.

사람마다 다른 극복의 과정. 나도 이게 정답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조금은 덜 헤매고 길을 찾아가는 기분이다.


한 순간에 바닥을 쳤지만 이제 더 이상 지하로 들어가진 말아야지.

나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더 많고, 하고 싶은 일이 있고 새로운 세상이 궁금하다.

이 정도면 나 잘하고 있는 거 맞지, 뭐.




사진 출처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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