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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유 Jul 01. 2023

저의 안부를 전합니다.

얼렁뚱땅 씩씩하게.

2월 1일에 이 이야기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글을 쓰고 난 후, 한동안은 일기를 쓰지 않았다.

어느 정도 감정의 해소가 되었고, 새로운 일에 적응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다이어리에도 일정 메모 말고는 다른 말을 붙이지 않았다.


봄이 오면 다음 글을 써야지.

하다 어느새 벚꽃이 피었고,

벚꽃이 다 지면 글을 써야지 했는데,

여름이 왔다.


아예 글을 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순간의 기억을 적곤 하는 핸드폰 노트에

3월 7일에는 그 애를 데리고 처음 할아버지 댁에 갔던 날, 할아버지가 깎아주신 과일이 생각난다는 짧은 메모를 남겨놓았다.


키위 두 개, 수박, 그리고 토마토 하나.

수박은 먹기 좋게 초록 껍질 부분이 좁은 부채 모양이었고, 토마토는 속살을 드러낸 채 얇게 잘라져 있었다.

방금 들은 말도 깜빡하시는 할머니에게 그 애가 이름을 여섯 번쯤 말해주는 동안, 아흔을 넘긴 할아버지는 부엌에서 우리에게 줄 과일을 깎고 계셨다.


그 애를 떠올리게 만드는 수많은 사진을 전부 지우면서도, 이날의 이 사진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아마 오랜 후에 내가 할아버지의 나이가 되어 할아버지를 그리워 할 때, 껍질 벗긴 토마토가 예쁘게 담긴 과일 한 접시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 같다.



그리고 4월 17일쯤에는

‘그날 이후로 아직 행복했던 순간이 없다’라는 메모를 남겨두었다.

그리고 5월 20일에는

‘나의 오랜 외로움이 다시 찾아왔다’라는 말과 함께

내 외로움의 역사에 대해 주저리 써놓은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브런치에 쓸 생각으로 짧게 남겨 논 메모였을 텐데.

변덕인지, 게으름인지... 쓰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조금 전 강변북로를 따라 퇴근을 하는 길에 '오늘 글을 써야만 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얼렁뚱땅 이상한 하루였다.

어제까지 하루 종일 비가 오다가, 오늘은 다행히 해가 떴다.

비가 오는 날은 차를 두고 지하철을 타고 출근한다.

금요일이라 집으로 가져올 짐이 많은데 다행이다 싶었다.


차를 가지고 여의도 작업실로 가는 길.

올림픽대로에 들어가기 전, 손이 건조해 가방을 뒤져 핸드크림을 찾았다.

별것도 든 게 없는 가방에서 잡히지 않는 걸 보니 집에 두고 온 모양이었다.

그러다 꽤 오래전 콘솔박스 안에 넣어 둔 당근 크림이 생각났다.


얼굴에 바르는 크림이었는데 할인 행사 때 샀다가 향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핸드크림으로 쓰려고 넣어둔 거였다.


그 당근 크림을 꺼내 손에 바르고,

'윽, 역시 향 마음에 안 들어...' 인상을 한번 쓰고 올림픽 대로를 10분쯤 달리는데 뜬금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뭐야? 미친 거 아니야? 왜 이래?? 갑자기!?’

우울함이라곤 1도 없던, 오히려 금요일이라 기분 좋은 출근길이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돌자 울컥해서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잖아. 순서가 이상하잖아.’


울진 않으려고 손으로 부채질을 하는데 뭔가 매웠다.

아! 당근 크림 때문이었다.

당근 크림이 오래돼서 그런지 더 요상해진 향을 뿜어내며 따끔따끔 공기 속에서 존재감을 알리고 있었다.


어이가 없네...

그때 자동차 앞 유리에 커다란 새똥이 팍!

난 평소 걸어 다니면서도 새똥을 자주 맞는다.

울지 말라고 새가 도와주나?

이게 뭐라고 웃겨서 깔깔거리며 워셔액을 마구 뿌려 새똥을 날렸다.


옆 유리로 날리는 미세하게 남은 새똥이 신경 쓰이는 참에 갑자기 부슬부슬 비가 내려줘서 또 와하하 웃으면서 작업실에 도착했다.


함께 작업하는 언니와 앞으로 쓰고 싶은 내 드라마 얘기를 하며 들떠서 조잘거리기도 하고.

삘 받았다며 신나서 대본을 와다다 쓰다가, 이건 아니라며 다 지우며 머리도 쥐어뜯고..


그렇게 어둑해진 무렵, 언니가

 “내일이 벌써 7월 1일이네.”

 라고 말했다.


아!!! 그때 갑자기 생각났다.

작년의 이날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헐! 언니. 1년 전 오늘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생각나버렸어요.”



2022년 6월 30일.

웨딩 촬영을 하는 날이었다.

이때도 일찍 시작한 장마 때문에 하루 전까지 비가 계속 왔었다.

걱정을 얼마나 했던지. 다행히 밤새 비가 내리고 아침에는 해가 떴다.


밝은 햇살 아래서 야외 촬영을 하고 스튜디오로 들어오니까 갑자기 부슬부슬 비가 내렸었다.

얼굴도 잘 떠오르지 않는 사진작가님과 헬퍼 분이 운이 좋다며 와하하 웃었었다.


언니한테 작년에 있었던 일들을 말한 적이 거의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웃으면서 그날의 일을 말하고 있었다.

오늘같이 해가 났고, 그러다 잠깐 부슬비가 왔고, 습도는 무지 높았다고.


 “똑같네요, 오늘이랑?”

뭐가 웃긴지 말하는 나도, 듣는 언니도 와하하 웃었다.


그리고 퇴근길에 강변북로를 달리며 생각한 것이다.

‘아, 설마 아침에 눈물이 고인 게 당근 크림 때문이 아니었나? 뇌가 작년의 오늘을 기억하고 있었나?’

그러다 또 무슨 쓸데없는 생각이야 하고 피식 웃어버렸다.


밤 10시가 넘은 퇴근길을 참 좋아한다.

강변북로를 따라 달리면 보이는 도시의 불빛들이 아른아른 비치는 한강.

동호대교 지날 때 위로 지나가는 지하철.


서울 운전이 무서워 한동안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 두 달 만에 처음 운전대를 잡은 날, 집으로 가는 내내 울컥했었다.

‘그랬지. 난 어릴 때부터 서울에 살고 싶어 했었지.’


이 풍경을 보며 달리는 밤 시간엔 생각이 많아진다.

며칠 전 퇴근길에는,

‘그 애와 함께 보낸 시간에서 써먹을 수 있는 멜로 라인이 몇 개야.’

하고 언젠가 쓸지도 모를 드라마를 상상하며 그때의 기억을 하나하나 되짚어가기도 했다.


왜?

왜 오늘 글을 쓰고 싶어 졌는지 답을 알 것 같았다.


이제는 네비 없이도 집까지 잘 가는 내가 대견해서,

어느새 작은 것에도 와하하 잘 웃고 있는 내가 기특해서.

나 이거 좀 재미있는데? 행복한진 모르겠지만 사소한 일에 기뻐하는 내가 신기해서.


얼렁뚱땅 인과관계 따윈 없지만 이 기분을 남기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들었나 보다.



그동안 감사하게도 나의 안부를 궁금해해 주시는 분들이 계셨다.


지금은 어떤지 조심스럽게 물으며, 잘 지내고 있길 바란다는 편지를 써준 분도 있었고,

비슷한 일을 겪었는데 이럴 때는 어떻게 버텨야 하는지 묻는 분도 계셨다.


어떻게 버텨야 하는지 명확한 답은 드릴 수 없지만,

나는 꽤 잘 지내고 있다는 답을 드리고 싶다.

초반의 내 글에 남겨져있는 몇몇 분들의 댓글처럼

‘뻔한 위로지만 시간이 답이다’라는 이야기도 맞는 것 같다는 말을 덧붙인다.




  앞으로도 많은 감정에 휩쓸려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겠지만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씩씩하게 잘 지내겠습니다!

  공감하고 위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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