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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K에게. 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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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원 Jun 08.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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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고 행복했던 밴드 활동을 그만두게 된 계기가 있었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문제는 나 자신이었다)

보컬 오빠의 일본 유학이 결정되면서 밴드는 한차례 위기를 맞았다.


새로운 보컬을 구할 때까지- 남은 공연을 소화할 보컬이 필요했다. 당장 내일모레 공연이 잡혀있으니. 밴드가 연주하는 모든 곡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일수록 좋았다. 자체적으로 멤버들의 노래실력을 평가했다.

그 결과 임시 보컬로 뽑힌 사람이 나였다. 나는 가창력이 있거나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졌거나 파워풀한 성량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밴드의 다른 멤버들이 오죽 노래를 못 불렀으면 내가 뽑혔을까. 어이없는 결과와 어이없는 연습의 시간들. 어이없는 무대. 어이없는 공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내 생각은 그랬다. 모든 것들이 어이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노래 부르는 것을 즐기지 않거나 못 들어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그랬다. 딱히 실력이 있지도 그렇다고 특별한 매력이 있지도 않은 애매모호. 당시의 나는 목소리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자신감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제일 큰 문제는 목소리보다- 우리들의 의견이 하나로 합치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지만. 나는 이 모든 문제를 내 목소리 탓이라 여겼다.


건반을 치면서 노래를 할 때도 있고 그냥 마이크 앞에 뻘쭘하니 서서 부를 때도 있었는데. 내가 지향하는 음악과 밴드 멤버들이 나에게 요구하는 음악은 스타일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제일 끔찍했던 무대를 꼽으라면. M.Y.M.P의 say you love me를 피아노로 치면서 노래했던 솔로 무대다. 지금도 생각하면 닭살이 돋을 만큼 싫다. (이 노래는 진짜. 너무 하기 싫어서 멤버들 앞에서 한 번도 안 부르고 리허설도 안 했다) 내가 노래를 하기 전까지 밴드는 확실한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잘하든 못하든 멋지든 멋지지 않든 우리만의 소리를 냈고. 우리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좋았는데. 내가 가진 음색이 지나치게 깨끗(?)하고 서정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자꾸만 이상한 노래를 불러야 했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선율의 노래라는 것을 알지만. 내 스타일이 아니었음)


오빠들에게 대들었고 싸웠다. 목소리를 허스키하고 섹시하게 만들고 싶어서 제일 독한 담배도 피워봤다. (‘3호선 버터플라이’의 보컬인 남상아 언니가 원래 자기 목소리는 깨끗하고 맑았는데. 허스키하게 만들고 싶어서 말보로 레드를 피웠더니 지금의 목소리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목소리를 낮은 음색으로 만들고 싶어서 별짓 다해봤는데. 아무 소용없었다. 그 언니는 담배를 안 피웠어도 알아서 그렇게 될 운명이었을 것이다. 내 목소리의 특이점은 낮은음을 내기 어렵다는 것에 있다. 평소 말할 때도 높은 음성인 데다 탁한 소리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높은음은 얼마든지 부르겠는데. 남자 키는 죽어도 못 부르겠는 거다. 여자 키로 바꿔도 웬만한 도입부는 어렵다. 확실히 밴드에 어울리는 목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성가대를 하던가. 아가들 자장가 불러주는 거면 몰라도.


신기한 것은 성대를 아무리 혹사시키고. 노래방에서 다섯 시간씩 노래를 부르고 소리를 질러도 단 한 번도 목소리가 쉬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어릴 때는 목소리가 꾀꼬리 같이 맑다고. 사람들의 칭찬을 듣기도 했는데. 이제 더 이상 어리지 않은데. 클 만큼 컸는데도 그 목소리 그대로였다. 얼마나 스트레스였는지 아무도 내 맘을 이해 못 할 거야!라고 생각했다. 성숙한 여자의 목소리를 원하는데. 중학생 같은 앳된 목소리인 것이 불만이었다. 높은 음성은 사람을 한없이 가벼운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거라 믿었다. 내가 아무리 멋진 걸 해내도. 가벼운 사람으로 비치겠지. 겉모습은. 때에 따라서 속이는 것이 가능하지만. 목소리는 그럴 수 없다. 타고난 것의 결정체.


히스테리컬 하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온갖 짜증과 신경질을 부리다가 밴드를 나왔다. 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수용하려고 하지도 않고 독불장군에 연산군처럼 굴었다.


이 세상의 어린것들은 전부 못됐다. 엄마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과 젊음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곤 하지만. 나는 엄마의 나이가 되어도 그러고 싶지 않을 것이다. 밴드를 나오고. 멤버들과 예전같이 자주 만나지 않았다. 관계의 소원함이 가져다주는 교훈도 있었다. 지금 내 옆에 있어주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길 것. 한번 저지른 잘못은- 할 수 있다면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할 것. 비록 밴드를 계속하는 사람은 한 명밖에 안 남았어도. 그 한 명이 계속 음악을 해주고 있어서. 희망이나 용기 같은 양지바른 감정을 느낀다. 내가 밴드를 나오고 나서도 남은 멤버들은 꽤 오랫동안 밴드를 이어나갔다. 밴드 오빠들은 정말이지 멋진 구석이 있다. 철이 없어 보이는데 철이 든 상태를 유지하며 지내는 것까지.


대학에 들어가서 한창 독립영화를 찍고 돌아다닐 . 오빠들은 직업을    개씩 가지기도 하고.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해가면서까지 밴드를 계속해 나갔다.  명이 차를 뽑았는데 ‘프라이드라고. 정말 오래되고 거의 ‘티코다음으로 작은 차를 타고 다니면서 자신들을 불러주는 곳으로 공연을 다녔다. 그때 이미 길거리에서 프라이드나 티코를   없는 때였는데도. 똥차 프라이드를 뽑았다. 나는 프라이드를 똥차라고 불렀다.  이런 똥차를 샀냐는 물음에. '어차피 돈은 없고.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라고 대답하는 사람. (프라이드라는 이름이 멋지다고 했다)


대학시절 우연히 만난 적이 있는데. 프라이드에 성인 남자 네 명이. 악기까지 끌어안고 탔을 때의 모습이란. 만화책 보는 것처럼 웃음이 나는 광경. 창문을 열어야만 악기를 안고 탈 수 있었다. 열린 창문으로 베이스나 기타의 끝부분이 더듬이마냥 튀어나와 있었다. 프라이드는 무게를 감당하기 버거워 속력도 잘 안 났다. 지금의 나는.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힘을 얻는다. 현재는 뿔뿔이 흩어져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 조차 마음먹고 해야 하는 일이 됐지만-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일은 즐겁고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가끔 그립다. 안녕 밴드! 안녕 좋은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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