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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K에게. 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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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원 Sep 21. 2022

트라우마



내가 자라온 가정은 화목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결혼을 한 남녀가 서로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거나 사랑스럽게 여기는 모습은 단 한순간도 목격한 적이 없었다. 엄마와 아빠는 쇼윈도 부부였다. 아빠는 직업군인이었고, 엄마는 드라마 작가였다. 두 사람은 평생 마주칠 접점이 전혀 없을 정도로 다른 인생을 살았다. (아직도 드는 생각인데, 두 사람. 대체 어떻게 만난 거지?) 한 집에 살고 있었지만 각방을 썼고, 우리 집을 출입하는 도우미 아주머니와 나와 내 동생을 제외하면 이런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타인의 눈으로 보는 우리 가족의 모습은 남부러울 것 없는 집.


아빠는 가난한 집 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한 형편과 명석한 두뇌는 아빠를 그 누구보다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자라게 했다. 동생들의 대학공부를 위해 자신은 나라에서 운영하는 공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꿈이라는 것이 자리 잡기 전에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몸에 배어버린 탓 일거다. 공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한 것만 봐도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짐작이 된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군대에서 나왔지만. 그전까지 아빠는 제트기를 조종하는 파일럿이었다. 아빠는 제복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하늘을 나는 것도 좋아했다. 패션에 관심이 없고 (아빠가 세상의 무엇에 관심이 있었을까) 차가운 인상의 얼굴. 183cm의 신장은 제복을 입었을 때 세상에서 가장 멋있게 보이도록 그 역할을 다했다. 군대에 있었던 탓에 각 잡힌 정리정돈 스킬과 인간 내비게이션이라 부를만한 능력을 가진 아빠.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아빠. 그럼 엄마는 어땠을까?


거의 모든 면에서 반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공직자 생활을 하신 외할아버지 덕에 외가댁은 부유한 편에 속했다. 엄마는 생전(작가가 되기 전까지) 자기 손으로 1원도 벌어본 적 없는 한량이었다. 단언컨대, 우리 엄마가 가진 가장 큰 능력은 ‘글쓰기’가 아닌 ‘돈쓰기’ 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안하무인 스타일은 아니었다) 엄마는 지독한 책벌레였다. 그리고 뭐든 쌓아놓길 좋아하는 여자다. 중학교 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면-학교에서 돌아온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정말 혼자 보기 아까웠다. 여기저기 읽던 책이 널브러져 있고, 책 속에 파묻혀 뒹굴 거리는 엄마. 도우미 아주머니가 계셨지만, 책만큼은 자신이 꽂아놓는 순서대로 있어야 한다며 정리를 거부했다.


친구 집에 놀러 가서 봤던 친구 엄마들과는 많은 면에서 달랐다. 지나치게 감정적이라 웃기도 잘하고 울기도 잘하는 엄마. 낭만적인 시구를 줄줄 읊어대는 엄마. 클래식을 좋아하는 엄마. 세상의 아름다운것들을 사랑할 줄 아는 엄마가 가장 큰 사랑을 베푼 존재는 나와 동생일 것이다. 어린시절에 엄마가 들려준 찬란한 문장들이 지금의 나에게 영향을 줬다. 그래서 나 또한 책을 사랑하고 영화를 사랑하고 음악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랐다.


나는 아빠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는 몰랐지만 엄마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는 알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아빠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힘든 사람이었지만, 엄마는 알기 쉬운 여자였다.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안 봐도 비디오다. 정확히 언제부터 둘 사이가 삐걱거렸는지 나는 모르지만, 아마 결혼한 다음날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내가 기억이 있는 나이부터 항상 사이가 나빴으니까) 신기한 것은 이렇게나 다른 두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 하나 있었는데.


자식만큼은 끔찍하게 사랑한다는 사실이었다. 서로에게 주지 못하는 사랑을 자식에게 모두 쏟아 붓기로 한 건지. 그 덕에 나는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자랐다. 


어떤 면에서 넘치는 사랑은 비극이었다.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사는 여자는 대게 두 분류로 나뉜다. 자식을 내팽개치고 자신을 사랑해줄 수 있는 남자를 찾아 떠나든지. 자신의 모든 인생을 자식에게 걸어버리든지. 우리 엄만 후자였다. 지나치게 나를 걱정하고 지나치게 나의 교육에 힘썼다. 


어린 시절에 가지게 된 트라우마는 꽤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렇다고 해서 우울한 감상에 젖어있거나 슬퍼하는 쪽은 아니다. 누구나 트라우마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니까.


나의 트라우마는 엄마로부터 시작됐다.





때는 내가 열 살 때.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전국 피아노 콩쿨에 나가서 최우수상을 탔다.


입상 이후 학교 내에서 피아노 신동 소리를 듣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내 콩쿨에도 나가게 되었다. 우리 엄마는 나의 대상 수상을 100% 확신하는 상태. 그러나 결과는 장려상이었다. 사람들이 강당을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우리 엄만 심사위원 석만 노려보고 있었고, 나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빨리 여길 벗어나고 싶어서 문 뒤에 서 있었다. 엄마는 문 뒤에 서있는 나에게 자기 쪽으로 오라는 눈짓을 하면서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억지로 내 손을 잡아끌고 심사위원 앞으로 가서 따지기 시작했다. 왜 우리 애가 장려상인지 인정할 수 없다며 다시 한번 평가를 해보라는 말. 우리 아이는 외부에서 인정받은 아이라는 말. 그 밖에도 많은 말을 했던 것 같지만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다. 재평가를 받기 위해 빈 무대에 다시 올라가서 연주를 했다. 너무 쪽팔려서 온몸이 뜨거웠다. 심사위원 중 제일 젊은 여자가 내 페달 사용을 지적했다.


엄마는 인정할 수 없다며 끝까지 싸우고 그런 엄마를 진정시키기 위해- 이번에는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백발의 심사위원이 나선다. 사립학교는 학교에 투자를 해주는 학부모의 자녀에게 큰 상을 주게 되어 있다고 엄마를 타이른다. 백발 아저씨는 계속해서 내 실력은 거론하지 않으면서 목표는 이뤄내는 화법을 구사한다. 그다음 기억나는 장면은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 엄마는 운동장에 주차된 차에 도착할 때까지 갑자기 내리는 비에 짜증을 낸다.(내가 대상을 타지 못한 것에 대한 짜증일 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내 손에는 상장과 화려한 꽃다발. 내가 대상을 탈 줄 안 엄마는 콩쿨에 참여한 아이들 중에 제일 돋보이도록 가장 비싼 꽃다발을 사 왔을 거다. 엄마가 운전하는 차, 조수석에 앉아서 집에 도착할 때까지 울었다. 대상을 못 타서 운 것이 아니다, 나는 아무래도 괜찮은데, 엄마는 괜찮지 않은 것이 슬펐다. 선명하게 기억하는 이미지는 와이퍼의 움직임, 자동차의 깜빡이,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 엄마가 틀어놓은 테이프에서 나오는 쇼팽 왈츠 10번, 내 손에 들려있는 엄청나게 화려한 꽃다발, 물에 젖은 상장.(장려상은 트로피가 없다) 엄마의 얼굴은 기억이 안 난다. 아마 무서운 마음에 운전하는 엄마 얼굴은 못 봤던 것 같다. 그다음 기억은 없다. 집으로 곧장 갔는지 중간에 음식점에서 밥을 먹고 갔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지금도 빈 무대는 공포스럽다. 나는 객석이 꽉 찬 무대보다 오히려 빈 무대가 더 떨린다. 발가벗겨진 기분으로 무대 위에 서있는 건 곤욕 중의 곤욕이다. 무대에 서는 것에 공포를 느끼면서 직접적인 연주자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 나는 그냥 음악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작곡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건 그 무렵이었다. 꿈에도 나오는 장면. 지금 생각해보면 음악을 좋아했던 나는 엄마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무대에 섰던 적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내 모습을 좋아했다. 아빠에게 사랑받지 못해 늘 외로워하는 엄마를 웃게 해주고 싶었다. 환하게 웃는 엄마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때는 내가 피아노 의자 위에 앉아 있을 때니까. 사실은 큰 무대보다 방 안에서 혼자 치는 것이 훨씬 더 즐거운 일이었는데- 엄마가 원하는 나의 모습과 내가 원하는 것에는 괴리감이 있었다. 그리고 열 살의 교내콩쿨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내가 가진 트라우마 중에 가장 강력한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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