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수업을 위해 매월 나는 아이들에게 읽을 책을 골라준다. 회사에서 받은 책을 매주 읽어온 뒤 수업을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비는 주가 있는데 그 주에는 어김없이 내가 그동안 골라뒀던 책들을 아이들의 손에 한 권씩 안겨준다.
중학생 애들은 세계명작이나 인문고전을 위주로 빌려준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싫어할 법한 두꺼운 벽돌 책들이 나오곤 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물론이고, 헤르만 헷세, 톨스토이의 작품 등도 내가 즐겨 빌려주는 책들이다.
중학생 애들이 책을 고를 때의 우선 기준은 순전히 책의 두께이다. 과연 몇 페이지까지 되는지가 가장 주요한 관심사이다.
페이지가 적을수록 아이들 사이에서 서로 빌리겠다고 경쟁이 치열하다.
내용이나 작품의 명성은 그 뒷전이다. 그런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면서 나는 될 수 있는 한 좋은 작품들을 권하느라 진땀을 뺀다.
지난겨울방학 때 아이들이 책을 많이 빌려 갔어서 새 책들을 구비할 필요를 느꼈다. 나는 아이들에게 서점 구경도 시켜줄 겸 모처럼 큰맘 먹고 묵혀뒀던 도서상품권을 챙겨서 집 근처 교보문고로 서점 나들이를 갔다.
청소년 도서 코너를 가보니 그간 못 봤던 책들이 알록달록 매력적으로 켜켜이 포개져 있다. 함께 간 막내아들 주성이는 만화를 보다가 이내 눈을 돌려 책들을 들춰 보더니 나에게 사달라고 두어 권의 책을 가져왔다.
‘가짜 모범생’ ‘ 나를 팔로우하지 마세요’ 등의 신간 청소년 소설들이다. 왜 이걸 사야 하냐고 물으니 주성이는 자신이 몇 페이지 훑어 봤는데 제법 재미있게 생겼다고 자신 있게 이유를 댄다. 그런 아이의 모습이 대견해서 책을 사줬다.
돌아온 뒤 수업시간에 새로 사 온 책들을 골고루 빌려줬다. 의외로 이번에는 아이들이 눈치작전을 벌이거나 두께 등을 따지지 않았다.
도리어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어, 저 이 책 제목 들어봤어요’ 혹은 ‘내 친구가 이거 읽는 거 봤는데..’라면서 명랑하게 책에 대해 아는 척을 한다. 의외로 책을 읽은 뒤의 감상문을 보니 슬프거나 재미있었다, 공감했다 등의 실제적인 글들을 많이 써서 첨삭하는 나로서도 아이들의 감정을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주에도 책을 빌려주기 위해 책상에 쌓아놓고 한 권씩 안겨주는데 제법 책을 많이 읽고 좋아하는 희찬이가 한 마디 한다.
‘선생님, 저 전번에 빌렸던 그런 책 주세요. ’ 그런 책이 뭐냐고 물으니 ‘그러니까 요새 나온 그런 소설 있잖아요. ’한다.
당황스러운 나는 그 책들은 다른 친구들 빌려줬으니 오늘은 이 책을 읽으라면서 G허버트 웰스의 ‘우주전쟁’을 빌려줬다. 지구와 우주인의 전쟁을 다룬 내용이라니까 다시 희찬이는 눈을 빛내면서 책을 가지고 갔다.
어떤 책이 아이들에게 좋은 책일까?
나는 그동안 아이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명목으로 아이들의 말랑말랑한 가슴을 울려줄 유력 작가들의 문학이나 고전을 읽히기에 급급했다. 그리고 그런 책들을 읽고 함께 글 쓰고 이야기하면서 아이들의 사고의 지평이 확실히 넓어지는 경험도 했다. 그러나 꼭 명작이나 고전이어야 할까?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 모습들을 풀어내는 작품도 나름 의미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예전의 걸작들이 아니라도 오늘날의 작품들 속에는 우리 아이들의 친구들, 자신과 비슷한 분신들이 숨 쉬고 있다. 오늘날의 아이들처럼 소설 속에는 게임, 동영상, sns 등을 즐기고 사춘기 반항을 하면서 부모와 부대끼고 입시에 시달리면서 돌파구를 찾는 아이들의 생생한 삶이 있다. 은연중에 나는 아이들에게 내 기준의 책들만 권한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내가 빌려주는 책이 마음에 안들 때 볼멘소리로 질문을 했던 친구가 있다.
‘그냥 재미있는 책 읽으면 안 돼요?’
그때 아이의 모습이 귀여워서 나는 그만 푸흣 하고 웃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애가 한 말이 옳다. 왜 꼭 책을 통해서 무언가를 얻고 배워야만 할까? 그냥 재미있게 읽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배울 수 있지 않을까?
그냥 재미있는 책을 가지고 시간을 정해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가슴이 설레어도 보고, 안타까움으로 한숨도 지으면 충분하지 않은가?
그래서 다 읽은 뒤 수업에 들어올 때 내가 ‘이 책 어땠어?’ 하고 물을 때 ‘재미있었어요.’ 하면 나는 물을 것이다. ‘뭐가 가장 재미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