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분 소개로 한 엄마가 독서논술 수업을 받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6개월 내에 완벽한 글쓰기를 하게 해 주세요.’
아이는 이제 중 3으로 올라간 여자아이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학업 부담이 많아져 사실상 독서논술 수업이 불가능하다.
아이 엄마는 급한 마음에 얼마 남지 않은 중 3 기간 동안 아이가 글쓰기를 완벽하게 하는 사람이 되길 요구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 여겼지만 아이가 책 읽기를 원체 좋아해 지금까지 많은 책을 읽어왔고, 글쓰기도 제법 한다는 말에 아이와 독서능력 테스트를 해보자고 했다.
테스트 날 문을 열고 들어선 아이는 깡마른 체구에 마스크로 가린 얼굴이었지만 눈빛만은 날카롭게 빛이 났다. 아이는 나와 30분 가까이 테스트를 하고 짧은 서술형 글을 썼다.
테스트가 끝나고 질문을 할 때 아이는 도리어 나에게 더 많은 질문을 하면서 자신이 정말 글쓰기를 잘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 왜 그렇게 글쓰기를 잘하고 싶어?’ 하고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아이는 예의 그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말했다.
‘학교에서 수행평가가 거의 글쓰기인데 수행평가에서 만점을 받고 싶어요. 지금까지 저는 20점 만점에 16-18점을 받았어요. 점수가 좀 모자란데 글쓰기를 배워서 기왕이면 만점을 받고 싶어요. 그러면 성적이 오르잖아요.’
수행평가의 만점이라....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면서 지금의 네 점수도 좋은 것 같은데 굳이 만점을 받아야 하냐고 물었다.
아이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번개 같은 속도로 답했다.
‘전 특목고를 가고 싶어요. 꿈이 외교관이거든요. 국제고를 갈 거예요. 그러니까 내신을 잘 받으려면 수행평가 만점이 필요해요.’
아이의 설명을 듣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테스트 결과를 보니 기대보다 조금 낮았다.
책을 이해하는 능력은 보통 수준이었지만 아이가 쓴 문장들은 오류가 많았다.
아이의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결과를 말씀드렸다. 자신의 딸에 대한 자부심이 컸던 엄마는 날 선 목소리로 내게 항변했다.
‘왜 이렇게 점수가 낮게 나왔지요? 우리 아이는 어딜 가나 매우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평가에 오류가 있는 거 아닌가요?’
글쎄. 글은 내가 첨삭했지만 독서 능력 테스트는 아이가 답한 시험지를 가지고 컴퓨터가 채점한 것이다. 컴퓨터 오류가 아니고서야 이 결과는 정확하다.
이후 아이의 엄마는 나와 직접 상담을 하기 위해 찾아왔다. 아이의 결과표를 보고 여전히 화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엄마는 나에게 단호하게 요구했다.
‘완벽한 글쓰기를 하게 해 주세요. 어떤 글을 써도 완벽한 글을 쓰도록. 6개월이면 되지요? 우리 애가 기본은 돼 있으니까요.’
‘그렇게는 못할 것 같네요. 6개월 내에 완벽한 글쓰기가 가능하다고 저는 장담 못해요. 글쓰기도 워낙 오랜 시간의 훈련과 연습이 필요한 것이라서요. 만약 그 안의 결과를 보길 원하신다면 저 아닌 다른 선생님을 찾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이의 엄마는 여전히 노기가 서린 표정으로 문을 나섰고, 결국 다른 선생님을 찾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모녀를 만난 이후 생각했다.
세상에 과연 완벽한 글쓰기가 있을까?
6개월 만에 글쓰기를 뗄 수 있을 정도로 글쓰기가 그리 쉬운 기술인가?
그 쉬운 기술을 기간 내에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내가 무능한 사람인가?
나는 지금껏 한 번도 글쓰기가 쉬운 적이 없었다.
글쓰기는 늘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글을 쓰는 날은 그나마 살만한 날이었다.
너무 힘들거나 지친 날은 도저히 글을 한 줄도 쓸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1년간 썼던 소설 원고지500장 분량을 모아 책을 출판했었다. 100 페이지 내외로 나온 내 이름의 책을 보고 글쓰기의 무게를 실감했다.
그 책이 사람들에게 팔리고 읽힐 때 마치 나의 모든 신상과 생각이 들통난 듯한 난감함과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지나고 보니 그 책의 내용은 물론이고 문체며, 틀린 맞춤법까지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세상에 뿌려진 책을 다시 회수할 수만 있다면 회수하고 싶을 정도였다.
어린 나이에도 글쓰기가 얼마나 막중한 책임감과 에너지를 요구하는지 그때 다 깨달은 것 같다.
글은 그만큼 힘든 세계이다.
어린 때 피아노를 10년 넘게 배웠다.
체르니의 곡 하나를 마스트하는 데에도 수 십, 수백 번의 연습이 필요했다. 단계가 올라갈수록 연습은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나는 끝내 체르니 50까지 치지 못했다.
엄연한 재능의 한계가 있었고, 거기까지 도달할 정도로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
요즘 아이들 중 제법 욕심 있는 아이들은 당연히 글을 잘 쓰고 싶어 한다. 중학교 2학년부터 학교에서 수행평가를 보는데 교과의 30%를 차지한다. 수행평가는 90% 이상이 논술형 글쓰기이다. 고등학교 가면 내신의 중요성 때문에 더욱 글을 잘 써야 한다.
심지어 대내외 모든 대회는 글쓰기와 연관이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학업과 대회 수상을 위해 글쓰기를 잘하고 싶어 한다.
나를 찾아온 아이도 그런 이유로 찾아온 것이다. 아이들은 인생에 필요하기 때문에 글을 배우고 싶어 한다. 글쓰기가 그냥 좋고 즐거워서 배우는 아이들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글쓰기가 삶을 사는 데에 유용한 하나의 기술이 되고 그 기술을 마스트하기 위한 나름의 시간을 설정해 놓는다. 그리고 나는 그 설정된 시간을 맞추지 못하는 선생이다.
나에게 글쓰기는 변변치는 않지만 나름 숭고한 작업이다.
글쓰기를 하면서 생각이 정리되고 내가 겪었던 상황들을 먼발치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내가 겪은 상황과 그 속의 사람들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그 이후 글쓰기는 나에게 고통스럽지만 나름 보상을 주는 즐거운 작업이 되었다.
글을 쓸 때 나의 생각과 감정의 근육들을 총동원해서 나는 마침내 내가 원했던 그 한 문장을 이어 붙인다. 그리고 그 문장들이 마침내 한 편의 글이 될 때 내가 요리나 청소를 할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생산적인 희열이 따른다.
그래서 나는 고통스럽지만 글쓰기를 사랑한다.
그리고 내가 글을 쓰면서 수업하는 아이들의 고통도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1000자 내외의 글을 쓰기까지 얼마나 많이 사고하고 분투하는지, 그러면서 힘들게 꾹꾹 눌러쓴 글자들을 사랑한다. 글쓰기를 통해 아이들과 연대하고 하나가 된다.
아이를 보내고 나는 한참 생각했다.
나 역시 도구적인 글쓰기, 시험을 위한 글쓰기에 동조하고 그것으로 밥벌이를 해오지 않았나?
물론 글쓰기의 동기가 꼭 고상할 필요만은 없다. 수행평가, 대회를 위한 글쓰기가 꼭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글을 쓴다는 건 대견한 일이다. 문제는 그것만을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이다.
그 이상의 가치를 줄 수 있는 작업을 그 현실적 목적만을 위해 사용한다면 너무 아깝지 않나?
아이들과의 독서수업 이야기를 수필집으로 냈던 작가 이슬아는 자신의 책 ‘부지런한 사랑’에서 글쓰기를 이렇게 표현했다.
글쓰기는 게으르고 이기적인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다른 이의 눈으로도 세상을 보자고, 스스로에게 갇히지 말자고 설득했다. 내 속에 나만 너무도 많지 않도록.
내 속에 당신 쉴 곳도 있도록.
글을 쓰는 사이에 우리에겐 체력이 붙었다. 부지런히 쓸 체력과 부지런히 사랑할 체력.
이 부드러운 체력이 자신뿐 아니라 세계를 수호한다고 나는 믿는다.
다음에 아이들과 수업을 할 때는 꼭 이 말을 들려주고 싶다.
6개월 만에 완벽한 글쓰기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는 이런 부드러운 체력을 쌓을 수는 있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