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50대에 들어서면서 가끔 퇴직 얘기를 한다. 아무도 물어 보지 않았는데 혼자서 퇴직하면 00 등을 하고 싶다는 일명 '00하고 싶어요' 시리즈를 입버릇처럼 말한다. 퇴직하면 '꽃꽂이를 배우겠다. 요리를 제대로 배우겠다. 탁구를 전문적으로 치고 싶다....' 각종 화려한 희망사항들을 나열한다.
한 때는 진짜 자신의 희망사항들을 실현해 줄만한 교육과정 등을 열심히 알아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하는 말.
"퇴직하면 내가 살림 도맡아서 다 할테니까 당신이 나가서 일해."
나 참, 어이가 없어서....자신이 힘들게 직장생활 해온 것은 익히 알지만 그런다고 퇴직 이후의 생계를 나에게 전부 맡기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게다가 그의 나이 60이어도 우리 막내는 그제야 군대갈 나이이고 둘째도 아직 대학 다닐 나이인데 어떻게 저리 호기롭게 그만둘 생각을 하지?
나는 남편에게 눈을 흘기며
"여보, 우리는 최소 70까지 벌어야 돼. 그래야
애들 장가도 보내고 할 거 아니야?"라고 현실 조언을 한다. 그럼, 남편은 나에게
"야, 내가 앵벌이도 아니고 뭐 평생 일만 하다 가니? 나도 좀 쉬고 싶어."라고 볼멘 소리를 한다.
물론 나도 그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말이 쉽지, 70까지 일한다고 생각하면 앞으로 20년 가까이 남았는데 지나온 만큼 또 일해야 한다면 그의 마음인들 편하겠나. 그러나 어쩌랴. 그의 나이 60이어도 우리는 큰애가 28세, 막내는 이제
갓 대학생일텐데 그 뒷바라지는 무슨 수로 감당하겠나. 이러니 결혼과 출산은 일찍 하고 볼 일이다. 직장생활 하느라고 늦게 결혼, 출산을 하니 체력도 딸리고 여러모로 힘들다.
한동안 궁리를 하다가 남편은 비장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한다.
" 정 그러면 당신이 조금만 벌어도 돼. 내가 알뜰하게 쓸께. 그냥 쉬엄쉬엄 일해."
처음에는 농담으로 받았는데 남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지혜로운 여성이라면 이런 때 남편의 힘든 심정을 감안해서 호기롭게
"그까짓거, 내가 벌지. 걱정마. 내가 있잖아."라고 말해야겠지.
그러나, 나는....그렇게 못한다.
예전에 직장 상사가 늘 부인이 ' 내가 벌면 되잖아.'라고 호기롭게 말한다고 했는데, 정말로 사업에 실패한 뒤 그가 부인에게 빌붙어 사는 것을 본 이후로 나는 저런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지 나름 다짐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남편을 돌아본다.
그리고 나즈막하면서도 절도 있게 말한다.
"응, 그럼 내 용돈은 내가 벌께. 당신 용돈은 당신이 벌도록 해."
남편은 결국 아무 말없이 등을 돌린다. 저 반응은 실제로 용돈을 벌 궁리를 하는건지, 그냥 일을 하고 말겠다는 건지, 아니면 그래도 쉬겠다고 말하는 건지
알 턱이 없다. 다만 나는 남편이 알아듣길 바라는 마음으로 솔직한 심정을 알려줄 따름이다.
말 안해도 익히 안다. 평소에 개그맨 울릴 정도로 위트있고, 흥 많고, 아이처럼 호기심 풍부한 남편이 일생 직장 생활에 갇혀 사는 게 얼마나 답답한지.... 여유를 누리면서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얼마나 갖고 싶어하는지 오죽하면 전에는 베란다를 막아서라도 본인의 방을 만들어 달라고 우겼을까.
나는 그 때 남자들은 자기만의 동굴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실히 느꼈다. 그러나 결국 집에서는 그 동굴을 못만들고 어머님 집으로 효도하기 위해 들어가서야 자신의 방을 가진 남편. 그가 노후에 편히 쉬면서 여유있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현실은 아직도 부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 아들들이 우리 눈앞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지 않은가.
사내의 한 생애가 무엇인고 하니, 일언이폐지 해서 돈을 벌어 오는 것이다. 알겠느냐?
ㅡ김훈 '돈1'중ㅡ
여보, 사내의 한 생애 알겠지?
나도 당신과 함께 일해볼께.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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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요약:힘드냐? 나도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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