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문제가 있는 아이를 상담한 뒤 오은영 선생님이 아이들을 교정하는 과정을 담은 프로그램이었다.
나 역시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었기에 그 프로그램을 즐겨 봤다. 프로그램 속에서 드라마틱하게 변화하는 아이를 보면서 탄성을 지르기도 하고, 아이의 이상 행동 뒤에 있던 말 못 할 사연에 가슴이 먹먹하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집에서는 '우리 남편이 달라졌어요'이다.
50대가 되어서 뒤늦게 발견한 사랑을 미치도록 불태웠는데, 남편이 이제 그 사랑을 버리기로 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한결같이 자신을 위로하고 힘이 되어준 탁구. 남편에게 탁구는 그야말로 열렬한 사랑의 대상이었다. 주말은 물론이고 퇴근 후에도 탁구장으로 달려가 땀이 흠뻑 나도록 라켓을 휘두르고 와야 직성이 풀렸다.
생일이나 어버이날마다 아이들에게 사달라는 선물은 일관되게 탁구 용품들이었다. 탁구티셔츠, 라켓, 신발 등을 매년 기념일마다 아이들을 졸라서 선물로 받아냈다.
몸살 걸려 아픈 날도, 코로나 백신 후유증에 시달렸을 때도, 정작 코로나로 일주일 꼬박 격리된 뒤에도 남편이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탁구장이었다.
그렇게 탁구장에 매일 살다시피 하면서 나에게 넌지시 건넨 말.
"나 정말 행복해. 이게 사는 맛이지."
그가 그렇게 진지하게 자신의 행복을 고백한 게 처음이었어서 나는 그나마 남편 곁에서 위안이 되어주는 탁구에 고마워해야 할지 남편을 뺏아 갔다고 짜증을 내야 할지 머릿속이 혼돈 그 자체였다.
그런 남편이 어느 날 탁구장을 더 이상 다니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유를 물으니, 퇴직 이후를 대비해서 자격증 공부를 하겠다는 것이다. 오래간만에 제정신이 돌아온 것 같아 나는 두 팔 벌려 환영했다.
그런데 한 달쯤 지났을까?
나에게 넌지시 묻는다.
"나 탁구장 딱 한 달만 다니면 안 될까? 여름휴가도 끼어 있는데 집에서 공부만 하면 무료하잖아. 스트레스도 풀고 싶고..."
나는 그가 직장문제 등으로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을 알기에 흔쾌히 그러라 했다.
그 순간 그에게 느껴진 그 환희로운 표정이란.... 남편의 순애보적인 사랑이 여실히 느껴졌다.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회사가 어려움을 겪고 남편은 나름 퇴직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을 거듭했다. 전에는 한숨을 쉬며 "우리 막내만 생각하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세 녀석을 앞으로도 뒷바라지해야 하는데.. 내가 일할 시기는 한정되어 있고..."
나는 그때 아직 어린 세 아들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남편의 짙은 고뇌가 느껴져 마음이 짠했다.
그래서 호기롭게
"걱정하지 마. 나도 당신이 그렇게 힘들게 조직생활 오래 하는 거 원치 않아. 자격증 따면 퇴직 후에 살살하는 일을 해. 애들 얼추 키워 놓으면 우리 둘이 못 먹고살겠어? 또 나도 벌면 되잖아."
그 말에 남편은 한 시름 놓았다는 듯이 표정이 한결 환해졌다.
재수생, 고2, 중2, 세 아들들은 아직 한창 학원비 등이 들어가서 부모의 뒷바라지가 많이 필요하다.
가끔 아이들이 각자의 꿈을 얘기할 때, 나는 부모로서 함께 수긍하고 기뻐해야 함에도, 머릿속으로는 그 뒷바라지를 할 비용부터 계산을 한다.
그러면서 혼자 생각하길 '역시, 오랫동안 일해야겠군.'
그런데 남편에게는 호기롭게 회사 그만 두면 더 이상 조직생활 하지 말고, 살살 일하라니... 과연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그러나 남편의 홀가분한 표정을 본 뒤로는 이미 한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음을 감지했다.
그의 어깨에 지워진 무거운 짐을 말로라도 덜어주고 싶은 게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솔직히 앞으로 수년간 한창 돈이 더 들겠지만, 그 이후 아이들이 자기 앞가림을 하면 수고가 덜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 수년 후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나이 들까, 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러다가 문득 든 생각.
'아, 아이들 장가는 어떻게 보내지?'
잊고 있었다. 단순히 아들들이 사회생활을 해서 독립하는 것이 끝이 아니라 장가도 가야 한다는 것을...
요즘 같이 집값, 찻값, 생활비 다 비싼 세상에서
세 아들이 결혼하려면 부모의 도움이 필요할 텐데.
그러면 남편이나 나나, 계속 어느 정도는 벌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기분이 급 우울해지고, 스르르 어깨가 쳐진다.
나는 머리를 도리질하며 스스로에게 되뇐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자. 닥치지도 않은 일들 미리 걱정하지 말자."
그 좋아하던 탁구를 그만두면서 노후를 위한 자격증을 준비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린 한 편 고맙기도 하다. 그도 퇴직하면 편안히 쉬고 싶으련만,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니 섣불리 일을 놓을 수 없겠지.
어쩌면 그렇기에 나도 계속 일할 궁리를 하며 나름 준비하는지 모르겠다.
아이들을 키우느라 우리의 노후까지 일하고 뒷바라지하겠지만, 그래도 자녀로 인해 주어진 기쁨과 희열도 크니 이런 희생은 할만하다. 나 역시 부모님의 그 희생을 업고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또 이 아이들이 있기에 우리가 부모로서의 삶을 충실히 살고자 인생의 매 순간을 열심히 달려왔다.
언젠가 장성해 자기 몫의 삶을 충실히 사는 아이들을 보며 뿌듯해 할 날이 오리라 기대하며,남편에게 한 마디 건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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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요약: 여보, 힘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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