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슬프다고 쓰면 안 되나요

당신의 언어는 당신의 나라다

by 그대로 동행

석이는 교육열이 높은 엄마의 외아들, 초등학교 6학년 남학생이다.


아이는 독서능력 테스트에서 제법 점수가 높게 나왔다. 책도 많이 읽고, 문해력도 우수했다.

석이 엄마에게 전화해서 테스트 결과를 알려주면서 조심스레 물었다.

"어머님, 이렇게 독서능력이 높은 아이를 왜 그렇게 염려하셨어요? 수업에 큰 무리가 없을 것 같은데요."


나의 말에 쭈뼛거리며 석이 엄마가 대답했다.

"실은 우리 석이가 글을 많이 못써요. 지난번에 다른 곳에서 수업을 받아봤는데.. 아이 글이 형편없는 거예요."

아이의 글이 형편없다는 말에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초등학교 6학년에 불과한 아이가 글을 쓰면 얼마나 잘 쓸까?


엄마의 기대가 너무 큰 게 아닐까 우려되어 다시 이유를 물으니 석이 엄마는 대답하길

"표현이 한정돼 있더라고요. 예를 들어 슬프다, 감동적이다 이런 말만 쓰는 거예요. 뭐 다른 말들 있잖아요. 그런 다양한 표현들을 하면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늘 쓰는 말들만 쓰니 제가 답답한 거예요.

우리 석이 고칠 수 있을까요?"


머릿속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석이 엄마의 고민이 무언지 익히 알 거 같았다.

이런 질문을 이전에도 어머님들로부터 익히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어머님. 지금 그런 표현으로 글을 쓰는 건 자연스러운 과정이에요. 그런 기본적인 표현들을 써야 나중에 더 진화된 표현도 구사할 수 있어요. 읽고 쓰는 훈련이 충분히 쌓이고, 지도를 받으면 아이의 표현력도 점차 나아질 겁니다."라고 말해줬다.


석이 엄마는 나의 말에 한결 안심이 됐는지 이후 흔쾌히 수업을 하기로 했다.

수업 시간에 친구들과 함께 수업하는 석이는 집중도 잘하고 수업을 즐거워하는 게 눈에 띄었다. 글쓰기를 시켜보니 아이는 자기만의 생각을 담백하게 담아낼 줄 아는 나름의 표현력을 갖고 있었다. 엄마가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는 아이였다.

석이와 엄마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


왜 슬픔을 슬프다고 쓰면 안 되나? 기쁘니까 기쁘다고 쓰는데 무엇이 문제일까?


물론 슬픔이나 기쁨을 좀 더 멋진 표현으로 미화하고, 자기만의 언어로 확장한다면 그것만큼 훌륭한 글쓰기가 어디 있겠나.

그러나 어른의 입장에서도 그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자신의 각종 느낌을 자신만의 표현으로 제대로 구사할 수 있다는 건 단시간의 승부가 아니다. 많이 읽고, 체화하고, 쓰는 지루한 훈련을 반복한 결과이다.


나는 글쓰기만큼 타고난 재능을 노력이 이길 수 있는 분야도 없다고 본다. 악기나, 스포츠 등의 영역과 달리 글쓰기는 타고난 재능이 아니어도 꾸준한 노력으로 이길 수 있는 분야이다.


글에는 또한 한 사람의 인격과 삶이 온전히 녹아 나온다. 단 한 번의 만남 없이도 우리는 그 사람이 쓴 글을 통해서 쓴 사람의 삶을 유추하고 내면의 향을 맡는 경우가 많다.


그러기에 모든 글쓰기는 삶의 연륜과 더불어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세월이 준 연륜과 자기만의 서사를 가진 사람은 글을 쓸 수 있는 충분한 자기만의 토양을 갖춘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전인격적인 수양으로 볼 수도 있다.


석이는 지금 자기만의 토양을 만드는 수양 과정 중에 있다.

이 세상에는 읽고 쓰기의 지루한 훈련을 감당하며 자기만의 토양을 만드는 많은 석이가 있다.


나의 일은 그 아이들이 기름진 토양을 만들어 멋진 싹을 틔우고 마침내 각자의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여기서 어른들의 가장 중요한 일은 가르치고 기다려 주는 일이다.


아이의 글이 한참 미숙하고, 단순하고, 하챦고, 결점 투성이어도 묵묵히 기다리고 격려해 줄 때 아이들은 다시금 백지를 대할 용기를 얻을 것이다.

당신의 언어는 당신의 나라다. 우리의 진정한 나라는 지리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적이다.

-제임스 설터 '소설을 쓰고 싶다면' 중-


아이들이 쓴 모든 글은 소중하다.

그것은 아이들이 자기 내면의 맹렬한 분투를 통해 수호한 각자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 나라는 언어로 이뤄져 있다.

그 언어는 결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