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전 내가 소설 속 주인공의 나이인 20대였을 때 TV에서 방영되던 배용준, 김혜수 주연의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란 드라마가 있었다.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젊은 대학생과 강사의 이어질 수 없는 사랑 얘기를 다뤘던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자전적 소설인 상실의 시대를 읽으며 나는 줄곧 저 드라마 제목을 떠올렸다.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상실의 시대는 친구 기즈키, 그의 연인이었던 나오코를 연이어 자살로 잃고 방황하는 이제 막 20대에 접어든 젊은 대학생 와타나베의 이야기이다. 상실과 아픔으로 점철된 청춘의 일상과 내면을 하루키 특유의 문체로 표현한 작품이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라고 인정함에도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은 우주의 종말과도 같은 거대한 상처를 남긴다.
하루키의 말대로 누구나 그 싸움에서 살아남는 건 아니기에 우리는 주인공이 살아남았는지 미처 알 수 없으나 마지막 장면에서 '이야기할 게 너무 많다, 이야기해야만 할 게 산처럼 쌓여 있다, 온 세계에서 너 말고 내가 원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라고 자신이 사랑하는 미도리에게 고백하는 모습을 통해 막연히 추측할 따름이다.
지금까지 나는 수많은 하루키 애독자들을 만나왔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소설을 궁금해하거나 찾아 읽은 적이 없음을 고백한다. 그와 관련된 일화는 많이 읽었으나 그의 책을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 초기 소설을 읽은 건 워낙 많은 작가와 독자들이 그의 소설에 대해 논하기에 나도 그 말들을 이해하고 싶은 욕구가 일었기 때문이다.
작품은 하루키가 대학을 다녔던 1960년대 말 일본 도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제 중년이 된 주인공이 비행기 안내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노르웨이 숲 노래를 들으며 과거를 회상함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와타나베의 유일한 절친 기즈키는 함께 어울리던 여자친구 나오코를 남기고 자살했다.
남겨진 나오코와 와타나베는 그 상실의 아픔을 나누면서 어느덧 친구 이상의 관계로 발전하는데
첫 관계 이후 나오코는 홀연히 그를 떠나 정신요양원으로 들어간다.
와타나베는 그런 나오코를 그리워하면서 때때로 나가사와 선배와 밤거리를 쏘다니며 처음 만난 여자들과 원나잇을 하고 캠퍼스에서 만난 발랄한 여자 미도리와 교제를 한다.
그러면서 요양원으로 찾아가 수일간 머물면서 알게 된 나오코의 룸메이트 중년의 레이코를 알게 되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후 집으로 돌아온 뒤 미도리와 연인 단계로 넘어가는 와중에 나오코의 죽음 소식을 듣는다.
와타나베는 나름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1달여간의 감상여행을 떠나고 돌아온 뒤 그녀를 추모하듯 레이코와 밤새 관계를 맺어 자기들만의 추모식을 치른다. 그리고 레이코는 '나와 나오코의 몫까지 행복해야 된다'는 당부를 남기며 떠나고 그는 드디어 미도리에게 자신의 사랑을 전화로 고백하며 소설은 끝난다.
상실의 시대의 문체는 건조하고 감각적이어서 읽는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레 책 속 상황에 동화되면서 자신만의 감정선을 자극하게 한다.
이 작품은 와타나베를 통해 사랑하는 사람을 연이어 잃은 고통스러운 상실 속 청춘의 모습을 투영한 듯 하지만 정작 불완전한 사람들이 완전한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을 그린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실과 사랑이 교차하는 이야기의 전개를 통해서
이 둘이 결국 백지장의 양면처럼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나는 기즈키와 나오코를 잃고, 미도리는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고 이 둘은 결국 상실의고통을 딛고 사랑을 찾아낸다.
책을 읽는 동안 줄곧 나는 비틀스의 노래 등을 즐겨 듣고, 나름 세련된 취향의 술과 장소를 즐기는 그의 여정을 따라다니면서 나의 20대를 기억에서 소환했다.
거대한 상실을 제외한 평범한 대학생, 아르바이트 생활 등이 많이 오버랩되었다. 누군가 한때는 와타나베같이 절체절명의 혼돈스러운 고독에 자신을 가두는 시기가 있지 않나. 그의 여정을 따라가며 나도 덩달아 20대의 달뜨고 서툴며 삶에 대해 무한 결핍을 느끼는 허기진 청춘이 되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 이제 갓 20대가 된 그의 모습 속에서 그와 같이 이제 20대에 접어든 내 아들의 모습도 그려졌다. 아직 이 세상 부조리의 파도에 채 몸을 맡길 준비가 되지 않은 내 아이도 언젠가는 청춘의 무게에 짓눌려 파도를 향해 나아갈 날이 오겠지. 그래서인지 와타나베가 상실로 흐느끼고 몸부림치는 모습 등이 나의 눈에 아들을 보듯 더 강한 연민이 느껴졌다.
죽은 친구의 연인인 나오코를 어떻게든 세상 속으로 나오게 하려 와타나베는 함께 살자 설득했지만 결국 나오코는 죽음을 선택한다.
나는 와타나베가 진심으로 나오코를 사랑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사랑으로 착각할만한 일말의 책임감, 그녀를 향한 연민 아니었을까.
그걸 감지한 나오코는 결국 죽음으로 그의 청을 거절한 셈이다. 반면 그의 곁에서 살아 숨 쉬고 늘 명랑한 미도리는 그에게 늘 자신의 사랑을 적극 어필한다.
작품의 끝에서야 그는 미도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확인하는데 자신이 당한 거대한 슬픔의 무게에 압도되어서인지 그 사랑은 청춘들이 할법한 서툴지만 순수한 사랑의 모습을 띄고 있다.
나오코의 자살을 겪은 뒤 홀로 여행을 떠난 주인공은 고백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동시에 죽음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만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나오코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어떠한 진리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치유할 수 없는 그 슬픔 끝에서야 주인공은 자신의 진짜 사랑을 발견하고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며 소설은 끝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들은 지독한 슬픔과 상실, 또는 결핍과 고통의 독주를 마신 뒤에야 깨닫는 경우가 많다.
그 지독한 독주의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다는 것, 그거야말로 세상의 모든 청춘이 지닌 특권일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그 특권을 감당하지 못해 작중 나오코처럼 스스로 무너지기도 한다.
그러나 와타나베는 살아남는 길을 선택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작중 주인공들을 향한 질문이 입가에 맴돌았다.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내 앞에 서있는 상대를, 내 앞에 선 삶을, 내 앞에 선 그 고통마저 온전히 사랑했다면 우리가 노르웨이의 숲 노래처럼 거대한 숲 사이에 버려진 한 그루 나무가 될지언정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 와타나베처럼 '나는 지금 어디인가'라고 묻는 나에게 충분히 잘 살아낼 거라고 하루키가 내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