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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대로 동행 Jun 20. 2024

정확하게 말하기

아들에게

폐 외 결핵 항생제를 복용하느라 몸이 허약한 우리 집 고3 둘째가 학업 스트레스 등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못한다.  오후 늦게야 부스스한 표정을 일어난 아이는 뭐 먹을 거 없나 하는 표정으로 부엌을 배회한다.


가급적 단백질을 많이 먹이느라 아침식사로 고기를 구워 풍성하게 차려 놨지만 아이 표정은 영 심드렁하다. 수저를 놓으며 한 마디 하는 말이 "엄마, 저 아무래도 수액 좀 맞아야겠어요. 몸이 허약해서 너무 힘드네요."

안 그래도 이 말이 나올 때 됐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몸이 허약한 아이는 거의 매월 수액을 맞으며 버티고 있다. 항생제 때문에 한약도 홍삼도 먹을 수 없는 아이를 위한 궁여지책이다. 다행히 수액을 맞고 오면 시들시들했던 아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반짝 정신과 생기를 차리곤 한다.


문제는 그 뒤이다. 약발을 의존한 나머지 아이가 과도하게 무리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좀 좋아지는가 싶었던 몸이 폭삭 사그라들어 다시 시들시들해지곤 한다.


어디 그뿐인가.

한 번에 10만 원을 상회하는 주사 값은 어떻고.... 아이들 앞으로 들어가는 학원비, 등록금, 식비의 어마무시한 지출에 비하면 상당히 약소한 비용이나 이것도 매월 정기적으로 수 차례 맞다 보니 비용부담이 꽤 된다.


의사 선생님은 우리 아이가 단골이라 늘 친절한 표정으로 보험 서류를 떼주시지만 실비 보험료를 청구해 봤자 비타민, 뭐뭐는 안된다고 빼서 그나마 받는 돈은 쥐꼬리만 하니 요즘은 청구를 하나마나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아이가 저토록 태연한 표정으로 수액 타령을 할 때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한다.

정작 남편과 나는 세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무지막지한 지출을 감당하느라 우리 앞으로는 구두쇠 자린고비로 살건만 아이는 돈 드는 요구들을 별반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던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봐도 고기를 먹은 뒤 아이표정이 수액을 맞을 정도는 안돼 보이고, 앞으로 있을 기말고사 전에 어차피 수액을 맞출 계획이기에 나는 조용히 아이를 설득했다.

"수액 맞으려면 돈 10만 원 훌쩍 넘어가는데 그 돈으로 차라리 먹고 싶은 걸 실컷 사 먹는 게 좋을 것 같다.

네 몸이 필요로 하는 걸로 맛난 걸 사 먹어라."

순간 아이의 얼굴에 번지는 저 찬연한 화색.


마음속으로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때는 늦었다.

그날 저녁 날아온 카드 결제 문자에는 동네 일식집에서 긁은 고가의 초밥 가격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뿐인가.

엄마의 말을 충실히 이행하고자 아이는 본인 먹고 싶은 편의점 간식에 커피숍 음료들까지 차분히 결제하고 있었다.


순간 반찬 값 아끼느라 좋아하는 간식들도 들었나 놨다 수백 번 고심했던 내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보다 더 싼값에 옷을 사기 위해 홈쇼핑 옷을 구입하던 남편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래도 오죽 먹고 싶으면 그랬을까. 허약한 아이를 위해 양보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다음 날도 어김없이 날아온 문자에는 또다시 초밥 가격이 적혀 있었다. 이번에는 사이드메뉴까지 시켜서 배 터지게 먹은 모양새다. 물론 그 뒤로 이어지는 간식과 음료 값은 기본이다.

역시 고3 아이를 위한 배려로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문제는 그다음 날 3일째에 터졌다.

아이가 저녁때 전화를 걸어 호기롭게 말한다.

"엄마, 저 고깃집 000에 와있어요."

 우리  동네에서 외식할 때만 간다는 비싼 고깃집에 와있다는 아이의 말에 화들짝 놀라  "네가 거길 갔냐? "라고 물었다.


"밥 먹으러요. 엄마가 먹고 싶은 거 실컷 먹으라길래 왔어요. "

"그래. 찌개 시켜 먹으면 되겠네. 거기 된장찌개 맛있더라."

그러자 아이가 비장한 목소리로 말한다. "엄마, 저 고기 먹으러 왔어요. 오늘 고기 좀 먹을게요."


순간 쩌렁쩌렁해진 내 목소리.

"야, 고기는 집에서만 구워 먹는 거 모르니? 고깃집에서 먹는 건 비싸. 그 돈으로 집에서 구워 먹으면 더 좋은 고기를 더 많이 먹을 텐데 뭐 하러 거기서 먹어."

"엄마, 엄마가 먹고 싶은 거 실컷 먹으라고 하셨잖아요. 오늘 하루만 봐주세요. 다음부터는 집에서 먹을게요."

"알았어. 먹고 와. 대신 내일은 집에서 고기 먹어. 알았지?"

"네~~~."


명랑한 하이톤 목소리로 전화를 끊은 아이를 뒤로 한 채 카드 내역을 계산해 보니 벌써 밥값이 상당금액을 넘어섰다. 매일 출퇴근하는 아빠도 런치 플레이션이라는 살인적 음식값에 식비를 아끼느라 전전긍긍하는데 정작 아들놈은 이렇게 저 먹고 싶은 것을 펑펑 먹고 다니다니... 이게 과연 적정한 일인지 머리를 굴리며 고심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어쩌랴. 결국 내가 한 말이 부메랑이 돼서 돌아온 것을.


전날 고기 파티를 하고 돌아온 아들의 얼굴을  아침에야 마주했다. 정성껏 구워준 꽃등심을 아들 앞에 내밀며 비장하게 얘기했다.

"이제 충분히 먹은 것 같은데... 카드 값 좀 아끼시지."

"네 ᆢ"

이번에는 목소리가 기어 들어간다.


 남편에게 슬쩍 이  얘기를 하자 나에게 비법을 전수해 준다.

"그럴 땐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네가 먹고 싶은 거 실컷 먹어라...... 네 돈으로....라고 해야지 ."


어제 아들은 결국 수액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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