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1일
그저께 윗 침대의 코트니와 저녁 약속을 잡아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Y가 혼자 저녁을 먹어야 할 상황에 놓인 것을 알게 되었고, 약속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아쉬운 마음으로 코트니에게 문자를 보냈지만, 그녀는 괜찮다며 전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답장을 보내왔다.
세비야에 있는 4일 내내 밝은 웃음으로 일정을 묻던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호스텔 카페에서 그녀를 위한 작은 초코머핀을 샀다.
마침 방으로 들어가니 코트니는 샤워를 마친 후였다. 나는 그녀에게 약속을 취소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담아 머핀을 건넸고, 그녀는 고마워하며 자기도 뭐라도 줘야겠다며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버스 시간에 맞추어 터미널로 이동해야 했던 내가 급히 가야겠다고 하자, 그녀는 알아보기 힘든 영어 필기체가 담긴 우편엽서를 나에게 건넸다. 그녀가 그저께 갔었던 소도시, 코르도바의 일러스트가 담겨있는 예쁜 엽서였다. 어느새 정이 들어 버린 나는 코트니와 뜨거운 작별의 포옹을 나누며 4일간의 세비야 일정을 갈무리하였다.
세비야 plaza de armas 버스 터미널에서 미리 끊어놓은 그라나다행 버스 티켓은 ALSABUS(알사 버스)였다. 스페인 지역 내에서는 FLIXBUS보다는 ALSABUS가 이용되는데 가격은 FLIXBUS보다 조금 비싼 편이다.(ALSABUS 역시 국제학생증 할인 가능)
볼트를 타고 빠르게 역에 도착해서 Y를 만났다. 세비야의 국립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은 그녀는 다행히 한결 나아진 모습을 보였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오전 11시, 우리는 다소 여유를 부리며 그라나다행 버스에 탑승했다.
하나 비극은 예상치 못할 때 발생하는 법. 미처 화장실을 가지 않은 나는 버스가 1시간 정도 달렸을 무렵 소변이 마려웠다. 우리 좌석 앞에 간이 화장실이 있었지만, 어찌 된 영문이지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FLIXBUS에서는 버스 내 화장실 이용이 가능했던 터라 화장실 문제를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휴게소도 들르지 않는 애매한 거리라 기사님에게 화장실을 열어달라 요청할 수도 없었다. 결국 그때부터 나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창 밖에 스페인의 맑은 날씨와 멋진 풍경이 비쳤지만, 고통받는 나에게는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 인간의 의지는 야단난 방광을 누르는 데 성공했다. 오후 1시쯤 도착한 그라나다 버스 정류장에서 Y에게 짐을 맡기고 얼른 화장실로 향했다. 유럽에서 화장실 이용하는 것은 정말이지 고역. 기회가 날 때마다 미리미리 방문해야 한다!
그라나다에서 머물게 된 숙소는 'Smart Suites Albaicin'. 알바이신 지구에 위치해있어 버스 정류장에서 우버로 이동해야 했다. (알바이신 지구 자체가 지대가 높고, 모든 길이 돌바닥이라 절대 올라갈 수 없다.) 캐리어가 부서질 정도로 끌고 간 숙소는 넓고 깨끗했고, 없는 게 없었다. 부엌, 세탁기, 다리미... 지금까지 호스텔만 머물렀던 탓인지 모든 어메니티가 감사하게 느껴졌다.
숙소는 단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높은 지대에 위치해있는 탓에 그라나다 시내와 알함브라 궁전이 한눈에 보일 정도로 좋은 전망을 자랑했다. 이 정도 퀄리티의 숙소인데 1박에 1인당 30달러 수준의 가격이다. 시골 도시의 후한 숙소 가격은 남은 그라나다의 모습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알바이신 지구는 옛날 이슬람교도인들이 지배했을 때 머물렀던 곳이다. 그래서 그라나다는 스페인의 다른 도시보다 이슬람교의 색채가 진하게 묻어 나온다. 지리적으로 인접해있는 모로코의 전통옷, 향, 스카프 등 다양한 기념품들이 판매되고 있고, 아랍풍의 음식점도 많다. 세비야와는 전혀 다른 이국적인 거리를 거닐었더니 여기가 스페인이 맞는지 착각할 정도.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우리는 급하게 늦은 오후를 먹기로 했다. 그라나다는 작은 시골 도시답게 특이한 음식문화가 존재한다. 음료수를 하나시키면 타파스 하나를 공짜로 준다. 음식에 대한 시골인심은 생각보다 더 따스하다. 우리는 음료 두 개를 시키고 크로케타(스페인 전통음식으로 고로케와 비슷한 튀김요리)와 미니 햄버거를 무료로 받았다. 다 합쳐서 5유로 정도 선이니 여간 혜자가 아닐 수 없다. 타파스 투어를 하러 그라나다에 간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나 보다.
알바이신 지구를 내려오다 보면 드디어 시내의 한 복판 누에바 광장에 도착한다. 그라나다 대성당을 가보고 싶었던 나는 Y와 산 니콜라스 전망대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잠시 헤어졌다.
가을 오후의 햇살을 받은 대성당 외관 앞은 관광객으로 가득했다. 웬만하면 그 도시의 대성당은 들어가 보자라는 일념이 있었기에 빠르게 입장! (국제학생증 제시 시 할인 가능)
성당 내부는 기대보다 훨씬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특히 제단 쪽에 그려진 하늘색 바탕의 황금색 별들과 다양한 그림들이 걸린 하얀색, 황금색의 기둥은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이제까지 보았던 성당과는 다른 깨끗하고 세련된 내부의 모습. 무교임에도 불구하고 회개당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다른 성당과 달리 그라나다 성당은 종교의 흔적이 새겨진 거대한 그림들이 정말 많았으며, 건축물 자체에도 디테일이 화려하게 들어가 있어 형용할 수 없는 아우라를 발산하였다. 성당 자체 어플에는 무료 한국어 가이드도 있었는데 아쉽게도 데이터를 다 소진해버려 들으면서 구경하지는 못했다.
제단 바로 옆에는 성모 마리아 상이 위치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이 몰리며 성모 마리아 상 밑으로 들어가 그녀를 들어 올렸다. 이내 그녀가 움직이면서 성당을 나가기 시작했다!
성당 밖에서는 수많은 그라나다 시민들이 성모 마리아 상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듯 보였다. 때마침 뉴스 기자로 추정되는 한 사람이 마이크를 잡고, 행사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 거대한 이벤트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11월 1일 : 모든 성인들의 날. 가톨릭교를 믿는 스페인에서는 종교가 꽤 큰 의미를 지니는 만큼 이를 맞아 성대한 축제가 열린 것이었다.
바깥 구경하러 나가는 성모 마리아 상과 그 뒤를 따르는 제례복을 입은 사람들, 성당 밖에서 퍼레이드 연주를 하는 악대까지. 이 조그마한 시골 도시는 모처럼의 큰 축제를 맞아 활력을 띠고 있었다.
계속해서 축제를 감상하고 싶었으나 Y와 한 약속이 있어 서둘러 산 니콜라스 전망대로 향했다. 이곳은 그라나다에 있는 전망대 중에서 제일 유명할 정도로 인기 있는 명소이다. 일몰시간에 맞춰 가서인지 역시 수많은 관광객들로 전망대가 북적였다.
저물어가는 해 반대로 궁전을 향해 떠오르는 달을 보고 있자니 문득 알라딘이 떠올랐다. 디즈니가 알라딘을 만들었을 때 이런 풍경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아닐까. 도시의 위에서 이국적이면서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알함브라 궁전 내부가 더 궁금해졌다.
좋은 기회로 전망대에 걸터앉아 Y와 열심히 사진을 찍었건만, 사람이 너무 많아 어떻게 찍든 옆의 사람이 한 프레임에 담겼다. 비록 이쁜 사진은 못 건졌을지라도 다른 세계에 온듯한 이국적인 궁전과 매혹적인 음악 연주는 아쉬운 나의 마음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저녁을 먹기 위해 알바이신 지구로 걸어갔다. 타파스 무료의 도시답게 많은 타파스 집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맛집들은 대기줄이 길었는데 기다릴 여력이 없었던 우리는 한적한 패밀리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그리곤 정말 먹어보고 싶었던 하몽 & 멜론과 스파게티를 주문했다. 결과는 대성공!! 하몽은 스페인 전통음식으로 돼지 뒷다리를 잘라 소금에 절인 생햄이다. 빵과 곁들여서 먹기도 하고, 그냥 먹기도 하지만 그중에서 제일은 멜론과 함께 먹는 것. 하몽의 품질이 좋아서인지 전혀 비리지 않고 적당히 짭짤했다. 같이 먹은 멜론도 많이 익어서 달달했다. 단짠단짠의 맛과 상그리아의 조합은 스페인에 다시금 오고 싶게 만드는 최고의 맛이었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에 마트에 들러서 내일 아침 먹을 시리얼, 맥주, 티라미수 등을 샀다. 확실히 마트 물가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수준이거나 더 싼 편인 것 같다. 새삼 우리가 외식에 들이는 돈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깨달을 만큼.
숙소에 돌아와 축구경기를 보며 Y와 티라미수를 먹었다. 한국의 마트에도 파는 평범한 티라미수였지만, 힘든 여정 후에 먹어서인지 훨씬 맛있게 느껴졌다. 가격이 싼 것도 한몫하지만! (2개에 2유로 정도)
샤워를 하고, 밤 산책을 할 겸 Y와 문을 나섰다. 그런데... 그만 숙소에 키를 놔두고 나와버렸다. 문을 닫으면 자동으로 잠기는 구조인지 몰랐던 우리는 순간 당황했다. 다행히 Y가 미리 찍어둔 리셉션 번호가 있어서 급히 전화를 해보았다.
Y : Hi. Sorry, we left a key in the room.
(안녕하세요. 죄송한데 저희가 키를 방 안에 놔뒀어요.)
직원 : Oh, so you left a key inside?
(키를 안에 놔뒀다고요?)
Y : Yes... We can't enter the room.
(네... 방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직원 : OK. I'll be there after 15 minutes.
(네 알겠어요. 15분쯤 걸릴 거 같아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 밤 12시가 넘은 야심한 시각. 집을 잃어버린 채 강제로 그라나다의 야경을 구경하게 된 우리는 왠지 모를 웃음을 터트렸다. Y가 번호마저 안 찍어두었으면 밤새 못 들어갔을 것을 생각을 하니 소름 끼쳤지만, 그래도 다행히 들어갈 수 있다는 게 어딘가. 한국의 도어록 시스템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유럽의 뻑뻑한 키 문화는 참으로 버거웠다. 모든 요소가 아날로그적인 이 자그마한 시골 도시의 첫날은 조금은 늦게 도착한 직원의 도움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 lo sien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