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2일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그동안 다양한 연유로 8시에는 일어나야 했는데 (예를 들면 조식을 먹어야 한다던가, 이른 버스 시간을 맞춰야 한다던가.) 오늘은 그럴 연유가 없었다. 덕분에 10시까지 시간의 사치를 부려보았다. 사부작 침대에서 벗어나 어제 샀던 오레오 시리얼과 숙소에 구비된 캡슐커피를 타서 먹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라나다 2일 차의 가을 하늘도 어김없이 청명함 그 자체. 알함브라 궁전을 보러 가기에 더할 나위 없는 날씨였다.
하루 종일 알함브라 궁전만 구경할 계획이었던 터라 그곳에서 먹을 간단한 간식거리를 사 가기로 했다. 그라나다의 추로스도 먹어보자라는 마음에 찾아간 탑티어 가게, Gran cafe at bib rambla. 추러스 하나와 초콜라떼 두 잔을 시켜 테이크 아웃해서 나왔다.
알함브라 궁전으로 가는 두 가지 방법은 걸어서 30분 정도 올라가거나 시내버스를 타는 것이었다. 워낙 고지대에 있기 때문에 시내버스를 타기로 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그런데 버스 기사가 손으로 마스크를 가리키며 탑승을 거부했다. 다행히 나는 마스크가 있었지만, Y가 마스크 챙기는 것을 잊어버린 터라 내려야만 했다. 우리나라처럼 아직까지도 스페인의 대중교통 내에서는 마스크가 의무다. 검사를 안 하는 기사도 많긴 하지만, 스페인에 왔으면 스페인 법을 따라야 하는 법. Y는 부리나케 마스크를 사러 근처 마켓으로 갔고, 나는 혼자서 이사벨 라 카톨리나 광장 옆 벤치에서 추로스와 초콜라떼를 먹으며 그녀를 기다렸다.
그라나다 추로스는 세비야의 추로스와 확실히 달랐다. 바삭한 식감보다 쫀쫀한 식감이 마치 꽈배기와 비슷한 맛이 났다. 꽈배기에 설탕이 없지만, 기름은 많은 빵 같은 느낌. 초콜라떼는 세비야와 비슷했는데 조금 더 단맛이 나고, 점성이 높았다. 개인적으로 세비야 추로스가 더 내 취향이긴 했지만, 그라나다의 맛도 경험해볼 만했다.
무사히 마스크를 산 Y와 시내버스를 탔다. 생각한 것보다 시내버스는 작았다. 세련된 시골버스 느낌이랄까. 구글 지도에 표시된 대로 내렸건만 아뿔싸! 알함브라 궁전 매표소 입구가 아닌 후문 쪽이었다.
현장학습을 온 스페인 학생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들에게 알함브라는 우리 내의 경복궁이겠지라는 재밌는 생각을 하며 남은 추로스를 먹고 체력을 챙겼다. 후문을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이슬람 건축물과 따가운 햇살이 우리를 반겼다.
알함브라 궁전은 국내 여행객들에게는 현빈과 박신혜가 나온 드라마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나스르 궁, 헤네랄리페 정원, 알카사바 등 다양한 이슬람 건축물들이 궁전에 모여있어 모든 곳을 구경하기에는 하루가 부족할 정도이다. 특히 하루 입장에 제한 인원을 둘 만큼 인기가 많으니 1~2개월 전 예약은 필수!
옛날 무어인이 그라나다를 정복했을 때 지은 성이기에 이슬람교를 반영한 독특한 건축양식이 눈에 띈다. 지금은 가톨릭교가 80% 이상인 도시에서 이슬람교의 융화는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공식 홈페이지에서 예약한 티켓은 통합권이었는데 나스르 궁에 입장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입장 시간인 2시가 다가와 Y와 나스르 궁 입구를 찾아 헤매고 있던 찰나. 궁전의 출구에서 나오는 한 한국인이 길을 잃은 우리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녀는 친절히 입구를 알려줬는데 계속 보다 보니 어디서 본듯한 얼굴. 포르투에서 같은 방을 쓰고, 리스본의 호스텔에서 조식을 먹다 마주친 한국인 여자분이었다. 여행하다가 3번 마주치면 운명이라고 했는데, 한 도시도 아닌 3개의 도시에서 만나다니! 신기한 인연에 얼른 SNS 아이디를 교환하며 다음 여행지인 바르셀로나에서 기회가 되면 밥 한 끼 먹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사건이 발생했다. 실컷 나스르 궁 입구에서 줄을 기다렸는데 Y가 여권을 숙소에 놔두고 온 것이다. 나스르 궁은 다른 명소와 달리 문화유산 훼손을 대비해 여권 검사를 철저히 한다. 여권 안에 있는 바코드를 찍는 구조인데 여권이 없으면 절대 들어갈 수 없다.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이 Y는 숙소에 여권을 찾으러 가고 나는 홀로 궁에 입장해야만 했다.
나스르 궁은 나스르 왕조가 사용했던 궁으로 왕의 집무실이자 개인 공간이었다. 화려한 아라베스크 무늬와 조각들, 간간히 벽에 도배된 아줄레주, 독특한 나스르 왕조의 문양은 건물의 주를 이루었다.
세밀하게 조각된 벽은 훼손 상의 이유로 만질 수가 없다. 벽의 곳곳에는 이곳이 나스르 왕조의 소유임을 드러내는 문양이 표시되어 있는데 가까이서 보아야 보일 정도로 정교하고 섬세하다.
내부에 조금 더 들어가면 왕들이 사용했던 아름다운 아라야네스 정원이 등장한다. 호수에 비친 건물의 모습이 한 폭의 예술작품 같았다.
왕이 사신이나 외국의 손님을 받았던 곳. 이슬람교답게 알라신을 숭배하는 문화가 건축 곳곳에 드러난다.
정원에서 더 들어가면 나스리 궁의 하이라이트 '사자의 정원'이 등장한다.
정원 한가운데 위치한 사자 분수는 지금도 물을 흘려보낼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다.
때마침 웨딩 사진을 찍는 커플이 많은 관광객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아름다운 궁전에서 미래를 약속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사람들은 일제히 미소를 띤 채 축하를 건넸다.
나스르 궁하면 또 유명한 것은 바로 이 종유석 천장이다. 사진에 담긴 것보다 실제로 보면 훨씬 더 높아서 머리를 꺾어야 할 정도이다. 마치 천연 동굴에 온 듯한 별 모양의 정교한 종유석 조각은 넋을 놓게 만들었다. 기술이 부족했을 그 옛날 어떻게 이런 건축물을 만들 수 있지. 세상 믿지도 않는 이슬람교의 경건함과 웅장함에 나도 모르게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나스르 궁에서 제일 좋았던 사진 스폿. 사자의 분수 밖에서 보이는 무수한 아라베스크의 돌기둥은 한 폭의 프레임이 되어 따사로운 햇살과 궁전을 담아냈다. 이곳을 거닐면서 알라딘 ost 'Speechless'들으면 자스민 공주 몰입 가능!
지금은 운영하지 않지만, 옛날 왕족들이 목욕을 했던 터는 남아있다. 그라나다에는 이슬람식 목욕탕도 꽤 유명해서 실제로 운영되는 민간 목욕탕이 존재한다.
기다란 나무와 다양한 식물들을 보며 벤치에서 앉아 힐링을 하니 새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왜 나스르 왕조가 왕위를 포기하면서도 이 아름다운 궁전을 포기하지 못했는지 알 듯했다.
궁전 안에서 바라보는 알바이신 지구는 평화로웠다. 저기 어딘가에 우리 숙소도 있을 텐데 빼곡한 황토색 집들 사이로 찾는 게 쉽지 않았다.
나스르 궁 바로 앞에 위치한 정원은 타임머신을 타고 몇 세기를 건너왔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새로웠다. 마치 내가 다른 우주에 와있는 듯한 느낌. 계속해서 감탄을 자아내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나 이 멋진 풍경의 사진을 찍어줄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에 이내 서글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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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여권을 찾은 Y와 다시 한번 들려서 추억을 남길 수 있었다. 입장시간 초과로 나스르 궁을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궁전 끝 예쁜 정원을 보고 기뻐하는 Y를 보니 나 또한 기분이 좋아졌다. 누군가와 함께 같은 장소에서 공유할 추억을 만든다는 것은 이렇게나 소중하다.
정원에는 꽃 몇 송이가 피어있었는데 봄에 오면 더 많이 만개해서 예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네랄리페 정원으로 향했다. 이곳은 왕의 여름 별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조경이 화려하다.
우리가 찾은 포토존. 한 번 찍기 시작하니 여러 외국 관광객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화려한 조경이 아니라 조경에 좋아하는 청춘이 예뻐 보이는 것일지도.
처음 유럽 여행을 계획할 때 봄이나 가을에 가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덥지도 않고, 적당히 선선하면서 여행하기 딱 좋은 날씨. 그렇게 와본 스페인의 가을 하늘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쾌청하고 따스했다. 만약 내가 왕이었으면 여름이 아닌 봄과 가을에 이 정원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
이곳 궁의 내부 역시 아름다웠다. 아라베스크식 창 너머로 보이는 알함브라 궁전의 모습과 그 옆으로 조성된 분수와 정원의 식물들은 연신 셔터를 누르게 만들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봄에 방문할 수 있길!
1시간 반 가량 열심히 사진을 남긴 우리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그다음 장소인 카를로스 5세 궁전을 방문했다.
카를로스 5세 궁전은 알카사바 바로 옆에 위치해있는 궁전이다. 이 궁전은 좀 특이하다. 카를로스 5세 부부는 아름다운 알함브라 궁전에 영향을 받고, 새로운 궁전을 짓기로 했다. 그들은 레콩키스타(스페인 국권회복 운동)로 인해 이슬람교 건축양식 대신 르네상스 양식의 궁전을 건설했는데 결과는 대실패였다. 외관은 조금 화려할지 몰라도 내부는 별 감흥이 없을 정도로 별로였다. 우리는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엥? 이게 끝이야?'를 연신 외치며 10분 만에 나왔다. 미안한 소리이지만 카를로스.. 당신이 졌다.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알카사바. 알함브라 궁전 내에 있는 요새로 제일 오래된 건물이다. 군인 숙사, 창고, 목욕탕 등으로 쓰였지만, 현재는 그 자취만 남아있다. 숲 속에 묻힌 고성과 수많은 새들의 날갯짓과 일몰 무렵 성벽 너머로 보이는 해까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알카사바의 풍경은 감동스러울 정도로 멋졌다.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자연의 아름다움은 사진으로도 되살리기 쉽지 않다. 단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순간의 추억과 감정을 가슴에 꾹꾹 눌러 담는 일. 일몰 무렵 알카사바를 가기로 선택한 것은 정말이지 최고의 선택이었다.
아쉽게도 알카사바는 6시에 문을 닫았다. 하마터면 들어가지도 못할 뻔한 걸 생각하니 아찔했다. 6시 이후에는 알카사바 야경 투어가 진행되는 모양이었다. 하나둘씩 성벽을 밝히는 불빛을 바라보며 야경 투어가 꽤 멋들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작스럽게 몸이 안 좋아진 나를 배려해 Y와 나는 숙소에서 간단히 밥을 먹기로 했다. Y는 하몽과 피자를, 나는 유명한 치즈케이크를 사서 집으로 향했다.
개인 숙소의 장점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축구를 하는 스페인 현지 TV를 틀고, 먹고 싶은 음식을 먹으며 마음껏 떠드는 자유. 그날 우리는 오랜만에 소파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조그만 시골 도시의 궁전에서 만든 황홀한 추억들은 오래오래 잊히지 않으리라. 비로소 나는 그라나다를 내 최애 도시로 인정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