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3일
어제 사다 놓은 치즈케이크와 라떼 한잔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고새 정들어버린 복층의 방을 이틀 만에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쉽기 그지없었다. 이 자그마한 시골 도시, 모든 게 갖추어진 숙소에 하루만 더 있을 수 있다면...
힘차게 돌아가는 건식 세탁기를 바라보며 그라나다에 있었던 추억들을 남겨 놓은 채, 새로운 도시를 맞이할 마음 한 구석을 챙겨 넣었다.
오전 9시 조금 넘어서 Y와 나는 체크아웃을 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숙소 어메니티가 담긴 트레이 몇 개가 놓여있었다. 거기서 발견한 우유 여러 곽. 물이 아닌 우유가 디폴트 값인 친절하다 못해 과한 이 숙소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듯하다.
그라나다에서 바르셀로나까지 가는 방법은 2가지이다. 7시간 버스를 타거나 저가항공기를 타고 1시간 만에 가거나. 돈을 조금 더 쓰더라도 시간을 아끼자라는 생각에 후자의 방법을 택했다.
Y와 나는 고민 끝에 그라나다 공항으로 향하는 alsa 공항버스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비록 알바이신 지구의 거친 돌바닥에 캐리어와 팔이 희생당했지만 무사히 정류장에 도착! 원래 예정된 시간인 10시 3분보다 훨씬 오버된 10시 20분쯤 도착한 탓에 생각보다 많은 탑승객이 몰렸다. 못 타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애간장을 탔지만, 다행히 탑승 성공!
이후 30분쯤 걸려 도착한 그라나다 공항은 정말 작았다. 버스 정류장이라 보는 게 나을 정도. 자그마한 시골 도시다운 공항에서 왜인지 모를 아늑함과 포근함이 느껴졌다.
우리가 선택한 항공사는 스페인 저가항공사 'Vueling(부엘링)'이었는데 단지 가격이 저렴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며칠 전 바르셀로나에서 축구경기 관람을 동행하기로 한 분에게서 부엘링이 11월 1일부터 파업을 한다는 문자를 받게 되었다. 당황한 나와 Y는 메일함을 뒤적거렸지만, 다행히 비행기 지연, 취소 관련 메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긴장했던 것은 부엘링이 수화물 관련해서 워낙 악명 높았기 때문이었다. 수화물 무게 초과 시 배이상의 높은 벌금 부과, 수화물 분실, 셀프 수화물 부치기 등 유럽여행 카페에서 심심찮게 보이는 썰은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셀프로 수화물을 부치지 않아도 됐고, 무게가 초과되지도 않았다. 친절한 직원은 내가 무심코 뜯지 못한 수화물 스티커를 버려주었다. 다른 이의 카더라는 나한테 해당되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는 착륙 후 일어났다. 바르셀로나 공항은 꽤 넓었고, 수화물 찾으러 가는 데만 해도 한참이 걸렸다. 20분을 넘게 기다려 받은 캐리어는 어떤 험난한 여정을 겪었는지 흠집이 난 상태. 분실되지 않은 것만으로 감사히 생각하며 우리는 볼트를 타고 숙소에 도착했다.
바르셀로나에서 묵기로 한 숙소는 한인 민박집이었다. 짧은 머리의 민박집 사장님은 막 택시에서 내린 우리를 반겨주셨다. 얼마만의 따스한 한국의 정인가! 민박집 사용방법과 조식 등에 대한 설명을 듣고, 짐을 풀었다.
사실 세비야 마지막 날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생리가 터진 것이다. 처음 여행을 시작하는 날이 하필 생리가 터질 것이라 예상되는 날짜였다. 생리통이 심한 나는 도저히 여행하면서 아픈 몸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여행 일주일 전부터 피임약을 먹기 시작했다. 피임약을 먹은 지 20여 일쯤 지났을 때 내 몸은 거부의사를 내비쳤다. 피임약이 소용없었다. 결국 해외에서 생리대를 사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외국 생리대가 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사장님께 조언을 구했다. 사장님은 숙소 근처 한약방에 생리대를 추천해주셨고, 그곳에서 질 좋은 생리대를 구매할 수 있었다.
한인 민박집의 장점은 이런 것이다. 대화가 통하는 한국인에게 맛집, 기념품, 명소 등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점. 다른 나라가 비빌 수 없는 한국의 정은 해외에서 더 빛을 발한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좁디좁은 엘리베이터에 그만 나 홀로 갇혀버렸다. 처음에는 너무 무서워서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벨과 전화 버튼을 마구 눌렀건만 아무도 구하러 와주지 않았다. 10분여쯤 지나니 다른 탑승객이 와서 불쌍한 나를 구원해줬다. 후에 알고 보니 버튼을 누르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해서 오작동이 난 것이었다. 이 이상한 시스템의 엘리베이터는 여행이 끝날 때까지 적응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만큼이나 유럽의 층수 세는 방식은 독특하다. 그들에게 1층은 우리에게 2층이다. 특히 내가 묵었던 집은 1층이 더 숨어있어서 결국 숙소 층수인 2층은 4층이 되는 꼴이었다. '에밀리, 파리에 가다.'에서 에밀리가 층수를 잘못 세는 장면은 절대 비약이 아니다.
Y와 나는 오늘의 최종 일정인 피카소 미술관에 가기 전에 저녁을 먹기로 했다. Y가 알아본 곳은 'Wolk to walk'라는 아시아 음식점. 잘 보기 힘든 브랜드라는 사실에 잔뜩 기대하고 간 그곳에서 Korean BBQ를 시켰다. 누가 Korean BBQ라고 메뉴를 정했는지 모르겠지만, Korean BBQ가 절대 아니었다. 소스는 짜기만 했고, 일본식 적초생강과 베트남의 고수는 음식의 정체성을 흐렸다. 현지화가 잘 된 탓에 짠맛에 폭격당한 혀를 비싼 물 대신 콜라로 달래주어야 했다.
급하게 배를 해결하고, 곧장 피카소 미술관으로 향했다. 목요일 5시 30분 이후부터 무료입장(사전예약 필수)이 가능한 피카소 미술관은 Y가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가고 싶어 하던 장소였다. 그녀는 미술에 조예가 깊고,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미술에 문외한인 나는 가이드 대신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파블로 피카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이하 Y의 가이드
피카소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의 요소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특히 새를 좋아해서 수많은 새 작품을 남겼다. (처음 봤을 때는 7세 아이 작품인 줄 알았다.)
피카소는 화가였던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15세 무렵 모든 화풍의 그림을 섭렵했다. 위의 작품은 피카소가 누군가의 임종을 지켜보고 그린 작품으로 맥을 짚고 있는 의사의 결연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왕립 미술학교를 다닐 당시 유행했던 화풍을 이어가길 바랬다. 그러나 그는 고흐, 라파엘로 등 유명한 화가의 화풍을 완벽히 재현한 후 아버지에게 더 이상 자신이 배울 것은 없다고 선언했다. 그때부터 피카소와 아버지의 관계는 틀어져 죽을 때까지 화해하지 못했다.
피카소는 자신만의 화풍을 구현해내고 싶었다. 그때 이후로 그는 입체주의에 빠져 하나의 초상화를 다각도로 그리며 연습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전에도 입체주의는 있었지만, 그가 입체주의의 대가라 불리는 데는 그만큼 입체주의를 잘 이해하고 살리는 화가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천재에게도 슬럼프는 있기 마련.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활동무대를 옮긴 피카소는 그곳에서 여러 화가들을 만난다. 그러다가 절친한 친구 한 명이 자살함으로써 큰 슬픔에 잠기게 되는데. 이때 피카소의 작품은 푸른색 위주의 색감과 가난, 고난 등의 주제가 주를 이루었다. 이 시기를 '청색의 시대'라 부른다. (항간에는 피카소가 슬픔에 빠진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추측한다. 그는 죽은 친구의 아내와 불륜 관계였는데 그녀가 남편을 따라 죽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피카소는 소문난 바람둥이였다.)
피카소는 이후의 삶에서 입체주의에 더 몰입하게 된다. 그림은 2D이지만, 실제 세상은 3D이었기에 그는 그림 세계에서 입체 요소를 부여하고자 하였다. 처음에는 그저 해괴망측한 어린아이의 그림 같아 보였던 작품이 조금씩 천재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피카소는 또한 다작의 달인이기도 하였다. 그는 한 번 꽂히면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었는데 평생 동안 꽂힌 한 작품이 있었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이 작품은 미술에 문외한이 나도 알고 있을 정도로 꽤 유명한 명화였다. 그런데 이 작품을 피카소가 모작했다는 것은 처음 안 사실이었다.
피카소 미술관의 하이라이트는 60여 개가 넘는 다양한 화풍의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다. 특히 시녀들 하나하나를 따로 그릴 정도로 그는 이 작품을 광적으로 좋아했다. 아니 좋아하다 못해 본 작품보다 더 잘 그리고 싶어 했다. 자신이 벨라스케스보다 더 낫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내려고 했던 그의 자신감이 괴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재는 본래 괴짜라는 말을 달고 사는 법이니까.
미술관에서 Y의 설명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피카소는 천재가 아닌 괴짜였다. 미디어나 책에서 다루는 피카소의 작품은 입체주의 몇 점이 다였으니까.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죽는 나날까지 그가 남긴 작품을 생애와 함께 들여다보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천재가 맞았다. 아마 Y의 조예 깊은 가이드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까지도 피카소의 작품성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즐거웠던 미술관 투어를 마치고, 근처 유명 빵집, 호프만 베이커리에서 마스카포네 크루아상 하나를 샀다. 관광객에게 투어 장소로 소개해 줄 정도면 얼마나 맛있다는 걸까.
숙소로 가는 길에 삼성 Z Flip4 광고가 걸려있는 바르셀로나 대성당을 발견했다. 먼 타지에 삼성 광고라니. 그것도 종교의 숭고함이 유지되어야 할 대성당에 상업적인 이유가 다분한 광고가 웬 말인지.
숙소에 돌아와서 사장님이 추천해주신 꿀차를 타서 크루아상과 함께 먹었다. 지쳤던 몸의 피로가 달콤함으로 스르르 풀리는 순간이었다.
다음날 일찍부터 있을 가우디 투어를 고려해 우리는 재빨리 포근한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런데 10시부터 테이블에서 열린 투숙객들의 담화가 새벽 1시까지 이어져 우리의 잠을 달아나게 하였다. 한인민박의 단점이란 이런 것이다. 대화가 너무 통하는 나머지 대화를 너무 많이 나누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