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ar ming Dec 07. 2022

스페인의 맛

2022년 10월 31일


마지막 날은 흐리고 쌀쌀했다. 세비야는 비를 맞는 것이 오히려 재수가 좋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1년 내내 맑은 날씨를 유지한다. 그래서 흐린 날의 세비야를 보는 것도 나름 기대가 되었다.


Y와 아침 9시에 알카사르 앞에서 만나기로 했던 터라 일찍 일어나야 했는데 알람을 듣지 못하고 8시에 눈을 떴다. Y한테서 몸이 안 좋아서 못 나갈 것 같다는 카톡을 받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부랴부랴 아침을 먹고, 혼자서 알카사르로 향했다.


알카사르 매표소 입구


알카사르는 세비야 대성당 바로 옆에 위치해있다. 기다리는 관광객들이 정말 많기 때문에 한 눈에도 알아보기 쉽다. 티켓은 인터넷으로 구매하는 것보다 현장에서 발권하는 게 1유로 더 싸다. 예매수수료가 붙어서인데 시간으로 돈을 사자는 생각에 매표소 입구에서 줄을 기다렸다. (매표소 줄과 입장 줄은 따로이다.) 그런데 20분쯤 지나자 매표소 직원이 티켓이 다 팔렸다며 가라는 손짓을 하였다. 앞서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발걸음을 돌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인터넷으로 예약할 걸. 1유로 아끼자고 기다린 시간과 결과적으로 못 들어가게 된 상황이 안타까웠다. 더욱이 알카사르의 경우 월요일 5시 이후부터 무료입장 가능(사전예약 필수)이라 티켓 수량이 더 없었던 것 같다.



세비야 대학 내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어제 들어가지 못 간 세비야 대학교로 갔다. 세비야 대학은 다소 작은 규모이지만, 옛날부터 깊은 역사를 자랑한다. 18세기에 담배공장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오페라 '카르멘'의 배경지이기도 하다. 건물 외관처럼 내부도 고급스러웠다.


건물 안


이곳은 부분적으로 오픈되어있지만, 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은 입장이 금지되어 있다. 다양한 조각품들이 시선을 끌어서 들어간 곳은 미술학부로 보이는 듯했는데 웬만한 박물관 수준으로 세련되게 전시되어 있었다. 스페인어로 쓰인 탓에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구경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월요일이라 그런지 더 힘이 없어 보이는 학생들을 벤치에 앉아 바라보며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이렇게 멋진 풍경을 가진 대학교 정도면 다닐 맛 나겠다 라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이내 그것도 한두 번이겠지라며 혼자 피식 웃었다.


 중심 분수


흥미로웠던 대학 탐방을 마치고, 구글 지도에 담아두었던 추로스 맛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Bar El Comercia


추로스는 스페인에서 만들어진 음식으로 지역마다 맛도 각양각색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술 먹은 다음날 추로스로 해장을 할 정도로 추로스를 사랑한다. 세비야의 Bar el comercia는 1904년부터 시작된 엄청난 전통을 자랑하는 가게로 국내 여행객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아니나 다를까 현지인뿐만이 아니라 많은 한국인이 줄을 서 있었다. 가게 내부 안 쪽에 테이블이 있지만, 자리가 잘 나지 않기 때문에 바 쪽의 자리를 노리는 게 이득이다.


초콜라떼와 추로스


혼자 온 나는 재빨리 바 쪽에 자리를 잡고, 직원에게 una 초콜라떼 y una 추로스를 외쳤다. 직원은 금세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초콜라떼 한 잔과 갓 만들어 열기가 모락모락 나는 추로스 5조각을 내놓았다. 한국에서 우리가 흔히 맛보는 추로스는 십자가 모양의 바삭한 빵에 설탕가루가 듬뿍 발린 형태였는데 세비야의 추로스는 확실히 달랐다. 한 입 베어 물면 가루가 떨어질 정도로 바삭함 식감에 기름이 많은 것치곤 맛이 담백했다. 인위적인 초코 맛이 아닌 진한 초콜라떼는 그냥 먹어도 되지만, 추로스에 찍어먹으니 단맛이 중화되어 훨씬 맛있었다. 가격도 5유로 정도 선이니 부담도 덜하다. 세비야에 가면 무조건 먹어봐야 할 음식!


세비야 zara


가게 근처에는 쇼핑거리가 있었다. 마침 배도 부르겠다, 스페인의 대표 옷 브랜드 zara에 들어가 아이쇼핑을 하였다. fw 시즌을 맞아 다양한 옷들이 있었으나 30도가 다다르는 세비야의 무더위에는 맞지 않는 듯했다. 그래도 한국의 zara에는 없는 상품들도 많아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황금의 탑 외부와 탑에서 본 세비야 전망


황금의 탑은 과달키비르 강 옆에 위치한 탑으로 지나가다 한 번씩 보이는 관광명소이다. 매주 월요일마다 무료여서 들렸는데 탑 내부에서는 기부금 명목으로 3유로를 뜯어내고 있었다. 직원한테 오늘은 월요일이니 무료로 들어갈 수 있지 않냐고 물었더니 그제야 직원이 살짝 볼멘소리로 올라가라고 재촉했다. 찜찜한 기분을 가지고 올라간 전망은 그저 그랬다. 날씨가 흐린 탓도 있겠지만, 탑의 높이가 그렇게 높지는 않아서 감탄할 정도의 뷰가 펼쳐지지는 않았다. 3유로를 내고 올라왔다면 아마 화가 났을 듯싶다. 황금의 탑 내부에는 스페인 해군에 대한 역사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내려오면서 눈으로 스윽 훑기 좋다.


세비야 투우장


트리플(여행 앱)에서 월요일에 3시 30분 이후 무료로 마에스트란자 투우장을 방문할 수 있다고 해서 찾아갔건만, 무료입장 요일이 수요일로 바뀐 지 오래였다. 그래도 이왕 온 김에 구경하자는 생각으로 티켓을 끊었다. (국제학생증 제시 시 할인 가능)


투우장 내부 전시와 투우장 입장 전 기도하는 곳


스페인은 투우 경기로도 유명한 나라. 빨간 망토를 쥔 차려입은 투우사가 까만 소를 유인하는 모습은 흔히 상상하는 투우 경기의 모습일 것이다. 투우장 내부에는 투우와 관련된 다양한 회화 그림과 투우사의 투우복, 경기 사진을 관람할 수 있는 박물관이 마련되어 있다. 전사한 투우사의 투우복에 묻은 피를 보니 안 그래도 추운 내부가 더 오싹하게 느껴졌다.


투우장 입구 전 한 구석에 마련된 제단은 투우사들이 본인의 안전과 안녕을 위하여 기도하는 곳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쾌락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목숨들의 무게가 무겁게 다가왔다.


투우장


현대에 들어와 동물의 생명에 대한 존엄성 문제, 학대 논란이 불거지며 투우 경기는 점차 축소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마드리드와 세비야의 투우 경기는 4월~9월에 열린다고 한다. 투우 경기에 희생당하는 소들을 전혀 보고 싶지 않았는데 다행히도 10월에는 경기가 열리지 않았다. 부디 내 입장료가 소들의 건강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길!


투우장


노란 모래가 깔린 텅 빈 경기장을 직접 밟아보고, 좌석에 앉아서 투우장을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볼 때는 몰랐는데 멀리서 보니 투우장의 색깔이 꼭 스페인의 국기 색깔과 맞닿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간색, 노란색, 황토색의 조화. 열정 가득한 열기를 상징하는 빨간색과 세비야의 뜨거운 해를 연상케 하는 노란색 까지. '세비야가 곧 스페인이다.'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닐 정도로 남부의 도시는 스페인의 정체성을 가득 담고 있었다.

 

El Librero


zara에서 Y를 만나 저녁을 먹기 위해 맛집을 찾아다녔다. 계획성 없는 우리는 시내를 돌아다녔지만 결국 Y가 구글 리뷰를 보고 찾은 평점 괜찮은 음식점으로 향했다. El Librero라는 가게는 스페인의 전통 가정식을 판매하는 느낌이라 이전의 가게들보다 아늑하고, 포근한 분위기를 자랑했다.


가스파초와 해물빠에야


가정식답게 스페인 사람들이 집에서 자주 먹는 음식을 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가스파초(gazpacho), 해물 빠에야(paella), 띤또 데 베라노(tinto de verano)를 시켰다.


띤또 데 베라노는 스페인의 안달루시아(남부 지방)에서 즐겨 마시는 술로 직역하면 '여름의 레드와인'이라는 뜻이다. 무더운 여름을 잊는 상쾌하고 가벼운 과일 맛이 인상적인데 개인적으로 스페인에서 먹은 술 중에서 제일 맛있었다. 특히 알코올의 독한 맛을 싫어하는 여성들이 딱 좋아할 맛이었다. 이어서 나온 가스파초는 실패였다... 새로운 맛을 탐구하고자 시켰던 메뉴였지만, 예상했던 따뜻한 수프가 아닌 차가운 오이냉국 맛이었다. 토마토, 오이, 식초, 피망 등을 갈아서 먹는 야채수프 이건만 진한 오이의 향이 오히려 토마토의 맛을 잡아먹은 느낌이었다. (빵이랑 찍어먹으면 그나마 낫다.) 마지막으로 조금 늦게 나온 해물 빠에야는 정말 맛있었다. 빠에야는 스페인의 전통 쌀 요리인데 어떤 재료가 들어갔냐에 따라 다양한 빠에야가 탄생한다. 다행히 주문할 때 직원에게 신 쌀(sin sal 스페인어로 '소금 빼고')을 요청해서 많이 짜지 않았다. 짠맛을 좋아하고 잘 먹는 나이지만, 스페인의 짠맛은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뭐든 적당히가 없는 이 나라는 음식에서도 짠맛, 단맛, 신맛이 최대치에 달한다. 스페인의 진짜 가정식을 먹어봄으로써 음식에 있어서도 열정적인 그들의 맛과 문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핼러윈 퍼레이드


세비야의 마지막 날인 10월 31일 밤은 핼러윈 퍼레이드가 한창이었다. 가톨릭이 국교인 만큼 핼러윈이 성행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관광객이 많은 도시여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코스튬을 하고 파티를 즐겼다. 숙소에 들어와서도 핼러윈의 열기는 가시지 않았다. 옆방에 파티가 열렸는지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말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나아가 내 방앞까지 문을 두드렸는데(사탕 달라는 건가.) 마침 혼자 방에 있었던 나는 무서워서 인기척을 죽여야만 했다. 이후에 잠잠해진 틈을 타 숙소 리셉션 야외 테이블에서 다이어리를 쓰려고 했건만, 테이블 밑 소파에서도 핼러윈 파티가 열려 결국 호스텔 안에 들어가서 써야 했다. 한 때 스페인 드라마 '엘리트들'을 즐겨 봤는데, 실제로 본 스페인 청춘들 역시 파티에 진심이다. 그들은 지칠 줄 몰랐고, 나는 밤새 잠을 도둑맞아야만 했다.

이전 10화 세비야의 일요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