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29일
아침은 호스텔에서 운영하는 카페에서 해결했다.
빵과 커피 가격이 싼 유럽답게 메뉴 하나당 1~2유로 가격 선이라 상당히 저렴하다.
스페인에 왔으면 대표 음식, 하몽은 꼭 먹어야지라는 생각에 과감히 하몽 보까디요(스페인어로 '샌드위치')와 카페 솔로(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짠맛을 좋아하는 나에겐 단연 성공적. 빵의 담백한 맛과 하몽의 짠맛의 궁합이 좋았다. (보까디요를 그대로 먹을 시 빵의 거친 단면 때문에 입천장이 까질 위험이 있다. 반대로 뒤집어 먹는 것이 좋음!)
오전에는 Y와 산타 크루즈 광장에서 만났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녀의 컨디션이 회복되지 못한 상태였다. 생각보다 자그마한 산타 크루즈 광장의 철기둥을 구경하고, 결국 어김없이 혼자 자유 여행을 시작했다.
'세비야가 곧 스페인이다'라고 말이 있을 정도로 세비야의 거리는 스페인 남부 느낌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은 철이 아닌 오렌지 나무들과 하얀 건물과 대비되는 화창한 날씨에 마음이 설레었다.
트리아나 지구를 가기 위해 '이사벨 2세 다리'를 건넜다. 과달키비르 강을 낀 다리의 왼쪽에는 'Cajasol tower'라 불리는 현대식 타워가 세워져 있었다. 사실 이 타워가 세워졌을 당시 세비야의 많은 시민들이 반대했고, 지금도 부정적인 시선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세비야의 전통적인 건물과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에서였는데 직접 세비야를 걸어보니 왜 그러한 목소리가 나오는지 이해가 되었다.
다리를 건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세비야 지구의 야자수들이 그림처럼 걸려있었다. 넋이 나가는 풍경에 다리 위에서 연신 셀카를 찍었는데 지나가는 남자분이 찍어주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외국분이라 혹시나 걱정되는 마음이 있었지만,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잘 찍어줘서 놀랐다. 그에게 편견을 가진 내가 새삼 부끄러워졌다.
트리아나 시장은 트리아나 지구 바로 입구에 위치한 재래시장이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신선한 식재료들이 판매되고 있는데 흥정하는 상인들과 손님들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보는 재미가 있었다.
시장에서 나와 트리아나 거리를 걸었다. 주말 아침의 따사로운 햇살과 한결 여유로운 표정의 사람들. 세빌 지구와는 사뭇 다른 트리아나의 분위기에 만족하다 보니 어느새 길의 끝에 다다랐다.
어딘지도 모르게 가본 길의 끝에는 세비야 스포츠 문화시설이 넓게 자리하고 있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운동을 하기 위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었는데 나는 어린아이들이 축구를 하는 축구장 밖 벤치에 앉았다. '프리메라리가'라는 빅리그를 가진 나라답게 축구 유망주들의 경기 또한 치열했는데, 아이들보다 더 열정적으로 지도하는 부모님을 보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넓은 인프라와 많은 경기시설, 축구에 진심인 국민들로 매번 훌륭한 선수가 나오는 거겠지!
1시간여를 벤치에서 쉬면서 세비야의 자전거, 세비시(Sevici)를 타는 법을 찾았다. 어플을 깔고 1 day 용으로 결제하면 대여가 가능하다. 처음 30분은 무료이지만, 일정 시간 지나면 분당 추가 요금이 붙는다. 그런데 웬걸. 세비시의 안장과 핸들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다리가 긴 편인 나로서도 다소 힘들게 운전해야 될 정도였다. 동양인의 키는 안중에도 없는 이 자전거가 한편으로 야속했다.
그럼에도 자전거를 타며 따사로운 오전 햇살과 바람을 누리는 것은 큰 행복이었다. 세비야는 생각 외로 작은 도시이기 때문에 기회가 된다면 자전거를 타보는 것도 값진 추억이 될 듯하다.
자전거를 타고 Bolas라는 젤라또 가게를 찾아왔다. 맛이 다양해서 어느 맛을 고를지 계속 고민하자 직원이 여러 개 추천해줬지만, 더운 날씨에 지쳐 상큼한 망고와 레몬을 골랐다. 맛과 양 적당하고 가격도 합리적이었지만, 개인적으로 llaollao가 더 맛있었던 것 같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사진으로만 보던 네모 반듯한 나무를 발견했다. 어떻게 깎았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깔끔한 마무리. 세비야의 시내를 한층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었다.
세비야는 남부답게 정말 더웠다. 오후 2시, 3시쯤에는 거의 30도에 다다를 정도였는데 다행히도 우리나라처럼 습한 더위는 아니고, 자외선은 강하지만 건조한 더위였다. 지친 나는 오늘도 시에스타를 하러 숙소에 들어가 2시간 정도 쉬었다. 시에스타는 오후 2시쯤 낮잠을 자는 스페인 특유의 문화이다. 처음에는 낮잠을 잔다는 사실이 마냥 부러웠는데 직접 겪어보니 생존을 위해서 시에스타가 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세비야의 더위는 무서웠다. (10월 말임에도 이 정도면 여름은...)
Y와 5시 반쯤 스페인 광장에서 만나기로 해서 부랴부랴 나왔다.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건물이 너무 예뻐서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산 텔모 궁전'이었다. 지금은 정부 청사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세비야 여행의 핵심 '스페인 광장'. 세비야에서 제일 가보고 싶었던 스페인 광장은 그야말로 감탄의 연속이었다. 맑은 날씨 덕분에 해가 비친 광장의 모습은 어딜 찍어도 예뻤다. 광장을 따라 흐르는 호수와 그 호수 위를 유영하는 보토들. 내가 꿈꾸던 스페인이었다.
Y와 만나서 광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로 향하는 다리 위에서 환상적인 뷰를 보고 연신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익숙한 얼굴을 마주쳤다. 어제 메트로폴 파라솔에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한 여자분이었다. 서로를 알아보고, 잠시 스몰 톡을 나눴는데 여자는 필리핀에서 온 조아나로 혼자 스페인을 여행 중이었다. 조아나는 한국을 꽤 잘 알고 있었다. 한국 여행을 했던 경험, 런닝맨을 즐겨보고 송지효를 제일 좋아한다는 것까지. 친절하고, 밝은 웃음을 가진 그녀와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워 함께 사진을 찍었다. 연락처도 인스타 아이디도 모르지만 그녀에게서 에어드롭으로 추억을 공유받으며 사진을 간직할 수 있었다.
건물 중심부에서는 그 유명한 플라멩코 무료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스페인 광장을 배경으로 한 무용수의 몸짓은 열정이 가득했다. 플라멩코는 스페인 남부 지방(안달루시아)의 전통적인 춤으로 노래, 박수, 춤 3요소가 함께 어우러진다. 아찔한 굽을 신고 선보이는 탭댄스가 박자와 기타 연주에 딱 맞을 때의 쾌감은 짜릿하다.
2층 내부를 거닐던 중 광장의 가장자리에서 큰 규모의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K-팝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내 귀를 의심하였다. 스페인 광장에 K-팝이라니! 앳된 학생들이 나와 K-팝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이 너무 신기해서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옆에 계신 한국분이 어리둥절한 우리에게 K-팝 콘테스트가 열렸다고 부연 설명해주셨다. 엑소, 레드벨벳, 그 외에도 많은 우리나라 가수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학생들과 그에 뜨겁게 호응하는 관중들이 마냥 신기했다. (사실 플라멩코보다 더 인기가 많았다...!) 비주류에서 어느덧 세계인들이 좋아하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K-팝이 자랑스러웠다.
스페인 광장은 야경으로도 굉장히 유명한 곳이다. 예쁜 야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일찍부터 2층에서 뷰를 구경했다. 시간이 지나고 가로등에 하나 둘 불이 들어오고, 호수에 비친 윤슬을 바라볼 때 한층 더 로맨틱해진 스페인 광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살면서 본 광장 중 가장 아름다웠던 스페인 광장. 다시 올 수 있는 그날을 기약하며 adios!
하루 종일 구경하느라 제대로 먹지 못한 우리는 급한 대로 구글 평이 좋은 Castizo라는 가게로 향했다. 목의 염증이 낫지 않은 Y는 주스를 나는 상그리아 한 잔을 시켰다. 상그리아는 스페인의 대표 주종으로 레드와인에 과일, 소다수를 넣어 만든 차가운 와인이다. 나에겐 첫 상그리아였는데 먹자마자 맛있다는 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더운 햇빛에 힘들게 걸어 다녀서인지 상그리아의 시원함은 하루의 마무리로 완벽했다.
이후에 나온 오늘의 빠에야, 아티초크, 치즈케이크 모두 성공적이었다. 특히 아티초크(Artichoke)는 생애 처음 들어보는 음식이었는데 스페인의 장수 비결이라 불릴 정도로 건강한 식물의 일종이었다. 우려와 달리 만두피 같은 식감이 제법 맛있었다.
타오르는 해와 그에 못지않은 열정적인 사람들. 휴학 후 한동안 나태함에 빠진 나에게 이 도시는 진정한 열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