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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r ming Dec 06. 2022

세비야의 일요일

2022년 10월 30일


호스텔에서 윗 침대의 친구와 친해졌다. 미국에서 온 친구의 이름은 코트니. 그녀는 로스쿨에서 공부하는 법대생이라 오늘은 나가서 공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좀 더 친해지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저녁을 제안했는데 코트니도 좋다며 나중에 연락하기로 약속하고, 오늘의 일정을 기분 좋게 시작했다.


세비야 대성당


어김없이 커피와 빵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Y와 세비야 대성당에서 만났다. Y가 머무는 에어비엔비의 주인은 Y가 많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함께 근처 병원을 가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Y는 오전에 병원에 가서 치료받기로 하고 나와 헤어졌다. 또다시 혼자가 된 나는 세비야 대성당 앞에서 어디로 갈지 한참 고민했다. 마침내 5시 55분 세비야 대성당 + 히랄다 탑 + 살바도르 성당 통합권 티켓을 인터넷으로 예약하고, 근처에 있는 세비야 대학으로 향했다.


세비야 대학 입구


세비야 대학은 일요일이라서 열지 않았다. 아쉽게도 대학교 안에는 들어가지 못한 채 주변 외관만 한 바퀴 돌았는데 규모가 작지만, 화려했다.


학교 지킴이 고양이씨


어제 끊어놓은 세비시가 아직 만료되지 않아 자전거를 타고 스페인 광장 바로 옆에 위치한 마리아 루이사 공원으로 가려고 했다. 소문난 길치답게 차라리 걸어가는 게 더 빨랐을 듯했지만, 일요일의 세비야 곳곳을 자전거로 누비는 내 모습이 여행객이 아닌 현지인 같다는 생각에 꽤 재미있었다.


공원 근처 정류소에 자전거를 대고, 주위의 슈퍼마켓에서 물을 사려고 했다. 공원에 몇 시간이나 있을 예정인데 도저히 물 없이는 이 더위를 견딜 수 없었다. 구글 지도에서 제일 가까운 곳으로 갔는데 매장이 문을 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두 번째로 가까운 곳으로 향했지만, 슈퍼마켓이라 보기엔 무리가 있는 소규모의 구멍가게였다. 들어가자마자 Una agua!(스페인어로 '물 한잔')를 외쳤다. 가게의 두 사람은 갑자기 들이닥친 이방인이 신기하다는 눈치였다. 뿌듯했던 것은 물을 계산하는 과정에서 스페인어로만 대화했다는 것. 짧디 짧은 스페인어 지식이지만, 공부한 보람을 느낄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공원 안 플리마켓


공원 안에서는 플리마켓이 열렸다. 일요일인 만큼 가족단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는데 특히 유모차를 끄는 아버지와 아기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마리아 루이사 공원


마리아 루이사 공원을 본격적으로 걸으면서 느낀 점은 야자수가 정말 많다는 것이었다. 여기가 스페인인지 LA인 지 구분이 안 갈 정도 많은 야자수와 다양한 식물들이 눈을 사로잡았다. 공원 중앙에 위치한 낮은 전망대에 올라가 한참을 멍 때리며 휴식을 취했다. 마침 세비야의 더위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나에게 좋은 장소가 되어주었다.


이외에도 오리와 호수, 분수 그 밖에 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로 분위기를 더하는 공연은 마치 쇠라의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그림을 연상케 했다.



한 편으로는 이 공원을 혼자 구경하는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인끼리, 친구끼리, 가족끼리 예쁜 공원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을 보니 말이다. 인생은 혼자라고 하지만, 여전히 인간은 다른 인간의 온기를 필요로 하는 존재인가 보다.


공원에서의 여유를 실컷 즐기고, 시에스타 시간을 가지기 위해 숙소로 돌아왔다. 체력이 좋은 편인 나였지만, 세비야의 더위는 금세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내가 묵는 호스텔의 방에는 2명의 독일인이 있었다. 그중 1명은 이지라는 이름을 지닌 쾰른에 사는 친구였는데 방에 들어가니 그녀가 문득 이태원 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지 : I heard the big disaster in Seoul. right? Are you ok?

(나 서울에서 일어난 큰 사고 들었어. 맞지? 너 괜찮아?)


나 : Yes. My mom is worried about me because of this. How did you know that?

(웅. 엄마도 그것 때문에 굉장히 걱정하고 계셔. 그거 어떻게 알았어?)


이지 : I saw a lot of articles about things. So, Is this the first time in your country?

(그것들에 대한 많은 기사들을 봤어. 그래서 그런 게 너의 나라에서 처음 있는 일이야?)


나 : Maybe. So creepy.

(아마도. 너무 오싹해..)




한국이 아니라서 미디어를 잘 접하지 못한 탓에 이태원 사고의 심각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외국인 친구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니 사태의 심각성이 피부로 와닿기 시작했다. 다행히 주변 지인 중에서는 다친 사람이 없었지만, 남은 여행에서 정말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한국의 사고를 걱정해주며 위로를 건네주는 이지와 휴고, 외국인 친구들이 사뭇 고마웠다. 국적을 떠나 그 이전에 우리는 모두 지구촌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가슴 한편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타코벨


이후 1시간 정도 낮잠을 자고, 숙소 바로 옆에 있는 '타코벨'을 갔다. 타코벨은 우리나라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브랜드로 미국에서 만든 타코 음식집이다. 예전부터 먹어보고 싶었던 차에 잘됐다 싶어 시즌 메뉴를 시켰다. 또띠야 사이에 께소(스페인어로 '치즈')가 잔뜩 들어있었는데, 느끼하기만 하고 그저 그랬다. 오히려 2층에서 보이는 세비야의 풍경이 부족한 음식의 맛을 채워주는 듯했다.



세비야 대성당


5시 55분 예약한 시간에 맞추어 대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학생요금으로 구매했지만, 국제학생증을 따로 요구하지는 않았다.


세비야 대성당 가이드 지도


대성당 입구에 친절히 국가별로 가이드 지도가 안내되어 있었다. 그런데 주요 10개 국가에 한국이 들어있었다. 그만큼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방문한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니라.


히랄다 탑


성당 내부에 입장해서 제일 먼저 히랄다 탑으로 올라갔다. 좁디좁은 탑은 꽤 층수가 많아서 올라가는데 20분은 족히 걸렸다. 사진처럼 층수를 표시해주는데 나름 세면서 올라가는 재미가 있다. 정상에 도착하면 여러 개의 종과 함께 세비야 시내의 아름다운 전망이 보인다.


탑에서 본 세비야 풍경


때마침 일몰이 지고 있어 장관이 펼쳐졌다. 위에서 보는 대성당과 오렌지 정원, 저 멀리 보이는 투우장과 타워까지. 세비야에서 제일 높은 전망대답게 명소들의 위치가 한눈에 파악되었다.


전망을 다 본 후 내려가려는데 갑작스럽게 터진 종소리는 다시 한번 나를 붙잡아 이곳의 고상한 멋을 느끼게 해 주었다.



탑을 내려가면서 창으로 보는 풍경도 예술이니 한 번쯤 들여다볼 것!



탑에서 내려와 제대로 마주한 대성당은 정말 컸다. 세계에서 3번째로 큰 대성당 다운 웅장한 규모를 자랑했는데 무교인 나에게 내부의 디테일들은 크게 와닿지 않았다.


콜럼버스의 묘


하지만 여행을 계획하면서부터 이곳을 와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순전히 '콜럼버스의 묘' 때문이었다. 이사벨 여왕의 도움을 받아 신대륙에 도달하여 항로를 개척한 이탈리아의 항해가. 그가 신대륙에 도착한 이후로 스페인은 각종 자원 교역으로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죽어도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는 그의 유언으로 시신은 4명의 황제에게 들려진 채 이곳 대성당에 보존되게 되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은 앞쪽 부분의 두 왕은 콜럼버스의 항해에 도움을 주었던 왕들이라 고개를 들고 있지만, 뒤쪽의 두 왕은 항해를 반대했던 탓에 고개를 숙이고 있다는 사실.


현대에 들어서 그는 철저히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어찌 됐든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침략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역사책에 콜럼버스를 침략자라 소개할 정도이니... 하지만 유럽 사람, 특히나 스페인 사람들에게 콜럼버스는 황제 이상의 존재였던 것 같다. 종교가 곧 법이었던 중세시대에 한 개인을 4명의 황제가 짊어진 채 대성당에 위치시켰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다. 그 점을 깨달으니 한낱 무덤에 불과한 관에서 뭔지 모를 경외심이 느껴졌다.


오렌지 정원


대성당 바깥은 오렌지 정원으로 이어진다. 지금은 철이 아닌지라 주황빛의 오렌지를 볼 순 없어서 다소 아쉬웠다.


오렌지 정원에서 본 히랄다 탑과 성당
살바도르 성당


내가 끊은 티켓은 통합권이라 세비야 대성당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살바도르 성당도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찾아갔건만, 가톨릭을 믿는 나라답게 일요일은 일찍 문을 닫았다. 코트니한테 앞전에 살바도르 성당 내부가 별로 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하나 핑크색의 성당 외관은 특이해서 한 번쯤 구경해봐도 좋을 듯하다.


La Brunilda


어제도 갔었지만, 꽉 찬 테이블에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던 유명한 맛집, La Brunilda. 오픈 시간인 8시 30분 전부터 기다려서 다행스럽게 예약 손님 뒤로 자리를 안내받을 수 있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스페인의 늦은 저녁시간은 신기하다.) 많은 사람들이 일찍부터 와서 줄을 기다리고 있으니 예약을 미리 해두거나 30분 정도 일찍 오는 것을 추천한다.


베르무트


어제의 만족스러운 상그리아에 이어서 이번에는 '베르무트'를 주문했다. 베르무트는 포도주에 브랜디나 당분을 섞고, 향료로 향미를 더한 술이다. 상그리아 보다는 양이 적고, 알코올 맛이 더 강하게 난다. 특유의 향이 나서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지만, 보드카와 같은 독한 주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썩 괜찮은 맛이다.


데리야끼 우동, 뽈뽀, 송아지스테이크


이 가게에서 꼭 먹어보고 싶었던 메뉴는 뽈뽀(스페인어로 '문어')와 송아지 스테이크였다. 10대 때만 해도 오징어, 문어, 새우 등 해산물은 쳐다도 보지 않았었는데, 20대가 되니 입맛이 크게 변해버려 지금은 해산물을 좋아한다. 아마도 술을 접하면서부터 안주거리를 찾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비싼 가격만큼 문어가 탱글하고 풍미가 좋았고, 송아지 스테이크도 기대만큼 맛있었다.


가게에는 술 한잔을 기울이며 일요일의 마지막 여유를 즐기는 커플, 가족들이 많았다. 쾌청한 날씨, 아름다운 명소들의 풍경 덕분에 모처럼 세비야의 Domingo(스페인어로 '일요일')을 이곳 사람들에 동화되어 함께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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