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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r ming Dec 01. 2022

EU 학생이 아닙니다만,

2022년 10월 28일


7일간의 포르투갈 일정을 마치고, 스페인으로 넘어가는 날이었다. 리스본에서 세비야로 가는 버스는 아침 7시에 출발이라 새벽부터 서둘러야만 했다.


리스본의 Oriente 역으로 향하는 볼트의 기사와 우연찮게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인도 사람이었는데 놀랍게도 우리와 동갑이었다. 2019년, 20살에 리스본에 와서 3년 넘게 이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 왜 리스본에 왔냐는 질문에 그는 인도에서의 생활이 한없이 지루했다고 했다. 먼 타지에, 그것도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나라에 와서 어릴 적부터 일한다는 건 웬만한 멘탈이 아니고서야 버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며 그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알아듣기 힘든 인도식 영어 발음을 들으며, 최선을 다해 답하다 보니 어느새 oriente역에 도착하였다.


박살난 캐리어 바퀴


유럽의 돌바닥은 거친 걸로 악명 높다. 여행 절반도 오지 않았는데 벌써 한쪽 바퀴를 나가버리다니...

유럽 여행 시 캐리어는 버린다고 생각하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정도.




Oriente 역의 Flixbus 정류장은 다소 혼잡하다. 어디가 버스 타는 곳이 모를 정도로 중구난방이라 버스에 부착된 안내문을 잘 확인해야 한다. 우리가 예약한 티켓은 분명 Flixbus 7시 15분 버스였는데 정작 버스는 Flixbus가 아닌 Monbus 였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쉥겐 국가라 여권 검사를 따로 하지 않는다.)


장장 7시간의 고된 버스 여정이 시작되었다. 차에서 쉽게 잠이 들지 못하는 나는 점차적으로 여명이 밝아오는 버스 밖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2시간쯤 달렸을까? 버스가 정차하며 휴게소에 들렀다.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알고 싶은 나는 기사님께 물어볼 심산으로 운전석 쪽으로 갔지만, 벌써 나가버리신 후였다. 그때 마침 중간 좌석에 앉아 있던 여자분과 눈이 마주쳤고, 인사를 나누며 비밀번호를 아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자신도 알고 싶은데 모르겠다며 나중에 기사님 오면 다시 물어보는 게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포르투갈 친구가 준 땅콩샌드 맛 과자


그녀는 포르투갈 출신의 학생이었는데 생애 처음으로 다른 나라를 가본다며 설레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갑자기 줄 것이 있다며 가방을 열어 나에게 과자를 건네주었다. 자기 입맛에 맞지 않다고, 맛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나는 과자의 맛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저 그녀가 나에게 친절을 베풀었다는 사실이 감동스러웠다. 안타깝게도 와이파이 비밀번호는 끝내 얻지 못했지만,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우리의 배를 채워줄 소중한 양식을 얻었다.


어느새 만석이 된 버스는 달리고 달려 오후 3시 즈음 스페인 세빌에 도착하였다. 내리자마자 훅 들어오는 더위는 진정 내가 스페인에 왔구나를 실감하게 만들었다. 30도를 웃도는 더위 덕분에 숙소까지 가는데 땀을 한 바가지 흘려야만 했다.


TOC 호스텔


세비야에서 내가 묵을 숙소는 TOC호스텔. Y는 따로 에어비앤비를 예약했었던 터라 여행 중 처음으로 다른 숙소에 머물게 되었다. 이번 호스텔은 지금까지 머문 호스텔 중에서 제일 좋았다. 역시 비싼 데는 이유가 있다.


보데가 산타 크루즈


장시간 이동하느라 하루 종일 굶은 탓에 움직이려면 어떤 것이든 먹어야 했다. 숙소 근처에 맛집으로 유명한 타파스 집이 있어 그곳에서 Y를 만났다.


시금치 치즈 타파스와 치킨 타파스


점심 먹을 시간도 아닌데 밖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아쉽게도 되는 메뉴가 한정적이었지만,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타파스는 스페인에서 자주 먹는 음식으로 다양한 한입거리 요리에 빵 등이 Tapa(스페인어로 '덮개')된 것에서 유래되었다. 우리는 쎄르베사(스페인어로 '맥주'), 오렌지 주스, 2종류의 고기 타파스, 시금치 치즈 타파스를 시켰는데 개인적으로 시금치 치즈 타파스가 정말 맛있었다. 즐겨보는 여행 브이로거가 추천해준 메뉴였는데 예상보다 더 치즈와의 조화가 잘 어울려져 맥주 안주로 완벽했다.


한낮의 세비야 거리


우리가 도착한 날은 정말이지 너무 더웠다. 10월 말인데 여름 날씨라니...


llaollao


더위도 시킬 겸 숙소 근처 요거트 아이스크림 집을 찾아갔다. llaollao(야오야오)는 스페인에서 만들어진 아이스크림 브랜드로 이번 여행에서 꼭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던 디저트였다. 지금은 해외 각지에 체인을 두고 있을 정도로 위상이 높다. (우리나라로 치면 배스킨라빈스 정도다.) 기본적으로 요거트 아이스크림에 사이즈에 따라 지정된 개수의 토핑을 선택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배스킨라빈스보다 맛있었다!! 빠른 시일 내에 한국에서도 야오야오를 맛볼 수 있는 날이 오길.


메트로폴 파라솔


더위도 식혔겠다 곧바로 세비야의 랜드마크 '메트로폴 파라솔'로 향했다. 이 건물은 세계 최대의 목조 건축물로 세비야의 버섯들이라는 귀여운 별명을 가지고 있다. 규모가 큰 만큼 세비야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가 유명했는데 Y와 나는 일몰시간에 맞추어 전망대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그런데 알고 있던 가격보다 티켓의 가격이 너무 비쌌다. 물가가 여기까지 적용되었는지 성인의 경우 13유로를 받았다. 원래 가격이 5유로인 줄 알았던 우리는 크게 당황했고, Y는 올라가지 않겠다고 해서 결국 나 혼자라도 올라갈 심산으로 잠시 헤어졌다.


티켓 매표소의 안내판을 보고 인터넷으로 구매하면 1유로 더 싸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줄을 기다리며 인터넷으로 표를 구매하기 시작했는데 estudiante(스페인어로 '학생') 일 경우 1유로 더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 가능했다. 이전까지 국제학생증 혜택을 받았던 터라 아무 의심 없이 11유로 티켓을 구매하고 티켓 창구로 갔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직원 : You're a student?

(너 학생이야?)


나 : Yes! (국제학생증을 건네며)

(웅!)


직원 : So, you are from korea? But only EU student can go.

(그래서 너 한국에서 왔니? 근데 EU 학생만 들어갈 수 있어.)




순간 너무 당황해서 영어가 나오질 않았다. 얼굴이 점점 빨개지고 머리는 새하얘졌다.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원래 티켓이 12유로이니 1유로만 내면 안 되냐고 물어봤지만, 올라가고 싶으면 티켓을 다시 끊어야 한다는 대답뿐. 화가 났지만, 결국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한국이었으면 애초에 인증된 학생만 결제가 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마련했을 텐데, 설령 잘못 끊었더라도 1유로 더 내고 올라갈 수 있도록 융통성을 발휘했을 텐데.


마침 줄을 기다리는 한국인 모녀가 얼핏 대화하는 것을 듣고, 내 사정을 설명했다. 어머니는 자기 딸도 학생 티켓을 끊었다며 기다려보자고 말했다. 이후 그분들도 창구로 갔지만, 딸이 EU 학생이 아니라며 거절을 당했다. 결국 딸은 새로 티켓을 끊어야 했다.


눈 뜨고 11유로(한화 약 15000원)를 뜯긴 나는 다시 인터넷에 들어가 티켓의 정보를 확인해보았다. 자세히 보니 EU 학생이라고 적혀있었다. 성급한 마음에 'estudiante'하나만 보고 티켓을 끊었던 것이었다.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나의 불찰에 대한 화, 많은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었을 예약시스템에 대한 억울함이 합쳐져 우울한 기분으로 파라솔 밑에 앉았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망대에는 하나둘씩 조명이 들어오고 있었다.


메트로폴 파라솔 밑에서 열린 바


나의 사정을 들은 Y가 달려와 위로해줬다. 아파서 고생한 Y에 비하면 이깟 해프닝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니라.

마침 불금을 맞아 파라솔 밑에서는 바가 열렸다. 맥주 한잔과 콜라를 들고 DJ의 공연을 들으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Hermandad de el valle(골짜기 형제들)


비록 전망대에서 세비야의 일몰을 보지 못했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잊지 못할 듯싶다. 골짜기 형제들의 신나는 음악 선곡에 몸을 맡기는 사람들, 술 한잔 기울이며 나누는 대화 소리, 음악에 맞춘 듯 발산하는 파라솔의 형형색색 불빛들.


세비야 대성당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우울했던 기분이 어느새 세비야의 이국적인 풍경과 함께 잊히니 말이다.


이후 숙소로 돌아와서 같은 방의 미국인 친구와 세면대에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나는 화장을 지우고 있었고, 그녀는 화장을 하며 이제 막 나갈 채비를 하였다. 오늘이 세비야 마지막 날이었던 그녀에게 나는 어디로 놀러 가는지 물었고, 그녀는 아직 모르겠다고 말하였다.




나 : There is a bar under the Metropol parasol. And there are some beers and cokes!

(메트로폴 파라솔 아래에 바가 열렸어. 맥주랑 콜라도 있더라!)


미국인 친구 :  Coke????? (코를 흡입하는 시늉을 내며)

(코카인이 있다고???)


나 : No!!! I mean coke, coca-cola. (마시는 시늉을 내며)

(아니!!! 내 말은 코카콜라 말이야.)




coke는 코카콜라를 뜻하는 비격식 표현이지만, 코카인을 일컫는 단어이기도 하다. 서로의 의사소통 오류를 깨닫고 우리는 같이 웃음을 터트리며 해프닝을 마무리했다. 그나저나 Coke를 코카인으로 받아들이는 미국의 스케일은 정말 놀라움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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