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26일
여행 중 첫 고난이 닥쳤다. 포르투에서 먹은 바칼라우가 문제였다. 대구의 긴 가시가 Y의 목에 걸렸고, 그걸 모른 채 계속 여행을 하다 리스본 1일 차 밤에야 확인했다. 다행히 가시가 긴 탓에 손으로 제거했지만, 이미 염증이 심해진 후였다. Y는 밤새 잠을 못 자 컨디션 난조를 겪었고, 부득이하게 오늘도 나 혼자 자유여행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오전에는 Y가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오후에 다시 시내 쪽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리스본은 포르투보다 관광명소가 적은 도시였다. 아무래도 수도이다 보니 현대화된 건물도 많고, 다인종의 사람들이 도시의 편리함을 기반으로 살아간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렇기에 나는 시내에서 조금 벗어나 관광명소가 밀집되어 있는 '벨렘 지구'를 가기로 결정했다.
벨렘 지구로 한 번에 가기 위해서는 15E 버스를 타야 했다. 15E 버스정류장은 피게이라 광장 쪽에 위치해있는데 한눈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찾기 쉽다.
리스본은 다른 도시에 비해 대중교통 티켓이 비교적 다양하게 판매되고 있다. 전철이나 터미널에서 사면 1유로 정도 싼 리스본 교통 패스권이 있었는데 미리 알아보고 가지 않아서 버스에서 바로 티켓을 끊었다. (가격은 편도 3유로)
버스를 20분 정도 타고 가면 종점에 도착한다. 어느 순간 버스의 모든 사람들이 내리는데 그곳이 바로 벨렘 지구이다. 사실 종점 앞에는 제로니무스 수도원이 있는데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제로니무스 수도원을 먼저 들렸다가 벨렘 탑을 간다. 이러한 연유로 반대로 이동하는 게 시간상 훨씬 효율적이다. 역시나 수도원의 긴 줄을 보고 재빨리 벨렘 탑으로 향했다.
맑은 날씨를 만끽하며 15분 정도 걸었더니 푸른 공원과 함께 저 멀리 벨렘 탑이 보였다. 빠른 걸음으로 벨렘 탑 근처에 가니 제법 길게 관광객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나도 열심히 줄을 기다렸는데... 맙소사 티켓을 사는 줄이 아니었다! 실컷 기다리고 입장하기 직전에 앞사람이 표를 꺼내는 것을 보고 무언가 잘못됐음을 인지했다. 재빨리 줄에서 나와 찾아보니 티켓 판매소는 공원 한가운데 위치한 보라색 건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했다. 무려 1시간이나 기다렸는데... 한순간 바보가 된 것 같았다. 혼자서도 잘 해내고 있다는 자신감이 안일함으로 변질되고 있었나 보다. (국제학생증 제시하면 반값에 구매 가능)
그래도 볼 수 있다는 게 어디냐라며 긍정적인 마인드로 다시 한번 줄을 기다렸다. 다행히 30분 정도 지나고 탑의 입구로 들어갔다. 뇌피셜이지만, 벨렘 탑은 일몰이 예뻐서 늦은 오후에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는 것 같다. 줄을 기다리는 게 싫으면 오전이나 점심때 오는 것을 추천한다.
내부로 들어오면 태주 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벨렘 탑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마누엘 1세가 세운 요새이자 감시탑이다. 마누엘 1세는 항해가 바스쿠 다 가마를 위해 이 탑을 지었는데 화려한 장식이 특징인 이러한 포르투갈 건축양식을 그의 이름을 딴 마누엘 양식이라 부른다. 2층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각 구간마다 입장 제한을 둬서 3층으로 가기 위해 또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먼 옛날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포르투갈을 지켰겠지.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굉장히 가파르다. 3층 내부도 역시 감시하기 쉽게 창을 만들어 놓은 모습.
3층 전망대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벨렘 탑의 진가가 드러나는 듯했다. 2층의 탑들과 테주 강이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사진 속의 두 여자분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하셔서 찍어드리고, 나도 사진을 요청했다. 사실 혼자 여행하는 것의 최대 단점은 마음대로 찍을 수 없는 '사진'이다. 한국 관광객이 옆에 있었다면 쉬이 부탁하겠지만, 외국인에게 사진을 맡기는 것은 여러 이유로 부담스럽다. 혹여나 내 폰을 가져가 버리면 어떡하지, 서양철학 관점으로 사진을 찍어주면 어쩌지. (서양철학 - 배경은 무시한 채 인물 중심으로 찍어주기). 제일 최선의 방법은 역시 give and take. 먼저 사진 요청이 들어오면 나도 요청을 드리는 방법으로 전신사진을 찍어야 했다.
그럼에도 혼자 여행하는 것이 즐거운 이유는 3인칭 시점이 되어 뷰와 사람을 구경할 수 있고, 그림 같은 풍경을 멍 때리며 감상하면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벨렘 탑을 다 보고 향한 곳은 도보로 15분 거리의 제로니모스 수도원이다. 제로니모스 수도원 역시 벨렘 탑과 마찬가지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며 이곳 수녀에 의해 나타(에그타르트)가 탄생되었을 만큼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번에는 아까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미리 티켓을 파는 곳을 알아보고 매표소로 갔다. 매표소는 수도원 입장 대기줄로 가는 건물 중앙 안에 위치해있는데 자칫 헷갈리기 쉬운 구조였다. (국제학생증 제시 시 반값 구매 가능)
수도원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그림은 유럽 유명 미술관 입구를 연상하게 만든다.
마치 왕족이 살 것 같은 궁전 같은 회랑의 분위기는 살면서 본 수도원 중에서 제일 웅장하고 멋졌다. 제로니모스 수도원 역시 벨렘 탑과 마찬가지로 마누엘 양식으로 지어져서 자세히 보면 뾰족한 꼬깔콘 모양이 벨렘 탑의 감시탑과 비슷하다!!
내부를 거니면서 수도원 사람들은 어떻게 금욕적인 생활을 견뎠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하지만 제로니모스 수도원같이 거대하고, 예쁜 곳이라면 필히 버틸만할 수도. 특히 건물 안의 기둥이 프레임이 되어 수도원 중심을 보는 풍경이 예술이었는데 이 풍경을 함께 누릴 Y가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잔디 안쪽으로는 출입을 금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분수와 잔디가 깔끔하게 관리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수도원을 다 둘러보고 나오니 우측 건물에도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입장하고 있었다. 바로 항해자 바스쿠 다 가마의 묘가 있는 성당이었다. 무료입장 가능하기에 시간적 여유가 난다면 구경해 볼 만하다. 여느 성당과 마찬가지로 스테인글라스, 제단 등이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이 성당이 특별한 이유는 항해자들의 묘가 있다는 것. 그중에서도 희망봉을 돌아 인도를 발견한 포르투갈 항해자, 바스쿠 다 가마의 묘는 꼭 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책에서만 보다가 직접 마주하니 소름이 돋았다. 바스쿠 다 가마가 포르투갈에서 인정받는 이유는 유럽인 최초로 유럽-인도 항로를 탐험해 포르투갈의 식민지 개척을 가속화시켜 나라를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식민지 국가 입장에서는 그저 침략자일 뿐이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지만, 끊임없는 도전정신만큼은 높이 사는 바이다.
Pasteis de Belem. 벨렘 지구에 있는 유명한 나타 집. 리스본에서도 나타는 꼭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미리 봐 두었던 가게였다. 아침에 호스텔 조식을 먹으며 잠깐 대화한 줄리도 추천해줬었던 터라 더 기대가 되었다. 사람이 정말 많았는데 가게 안에 직원이 많아서 금방 주문 가능하다.
아픈 몸으로 고생하고 있는 Y와 같이 먹을 심산으로 따뜻한 나타 2개를 포장해 나왔다. 마침 숙소 쪽으로 가는 15E 버스가 가게 반대편에 있어 Y가 있는 리스본 시내로 잘 도착했다. 오전에 약을 먹어서 조금은 괜찮아진 Y와 나타를 나눠먹었는데 포르투에서 먹었던 나타보다 덜 달아서 훨씬 맛있었다. 커피랑 같이 먹었으면 더 좋았을 성싶다.
현재도 일부 트램이 리스본에서 운영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28번 트램은 관광객들이 제일 많이 선택하는 트램이다. 리스본 시내 곳곳을 누비며 대표 관광명소들을 지나치기에 Y와 나는 28번 트램 타는 곳에서 긴 줄을 기다렸다. 약 1시간 정도를 기다리니 운이 좋게도 창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덜컹거리는 트램 길을 따라 리스본 시내를 구경하는데 생각보다 별 게 없어서 실망했다. 포르투에서 1번 트램을 탔던 탓일까? 리스본을 대표하는 관광명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그나마 조금 보이는 리스본 대성당은 완전한 외관을 보여주지 못했다.
트램은 계속해서 달리더니 갑자기 멈춰 섰다. 분명 종점이 아닌데 기사님은 내려야 한다고 승객들에게 지시했다. 어리둥절한 승객들은 다 함께 내렸고, 시내 한 중앙에 남겨졌다. 당황한 한 외국 노부부 커플이 우리에게 여기가 종점이 아니지 않냐고 물었고,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는 우리도 잘 모르겠다며 당황스러운 내색을 내비쳤다. Y는 트램 기사가 길을 잘못 든 것 같다는 예상을 했지만, 끝끝내 이유도 모른 채 종점까지 가지 못했다. (한국이었으면 사과의 말과 함께 보상도 해줬을 텐데...)
그나마 다행인 점은 리스본 번화가에 내려줬다는 것. 우리는 바이샤 지구의 산타 주스타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는데 비싼 입장료에 결국 전망대 올라가는 것을 포기했다. (엘리베이터 이용비와 전망대 입장비가 별개다.) 전에 휴고가 전망대로 향하는 무료입장 비밀 경로가 있다고 알려줬지만, 찾지 못했다. 결국 아래에서 보는 엘리베이터 외관으로나마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엘리베이터 전망을 못 본 대신 다른 멋진 전망을 볼 수 있는 상 조르제 성으로 갔다. 어제 그라사 전망대에서 어렴풋이 보이던 바로 그곳! 생각했던 것보다 전망대 입구가 높지 않아 금방 도착했다. 다른 전망 명소와 달리 상 조르제 성은 입장료가 있다. (국제학생증 제시 시 5유로에 입장 가능)
상 조르제 성은 이슬람교도 '무어인'들이 완성한 1000년 역사의 고성이다. 리스본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리스본 시내와 저 멀리 테주강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이곳이 왜 리스본 전망대 중에서 제일 인기가 많은지, 왜 입장료를 받는지 한 번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멋졌다. 개인적으로 그라사 전망대보다 훨씬 좋았기에 기회가 된다면 방문하면 좋을 듯하다.
상 조르제 성 전망대가 더 매력적인 이유는 이슬람교 색채가 묻어나는 이국적인 성이 있기 때문이다. 어스름한 저녁이 되어 성 안에 불빛이 들어오면 내가 과거로 왔다는 착각이 든다. 성 안에서 리스본 시가지를 바라보며 무어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성 위쪽에는 지금의 포르투갈 국기가 펄럭이고 있으며 성벽 틈새에서 보는 야경은 더욱 장관이었다. 둘이서 잠시 성벽 근처 계단에 걸쳐 앉아 리스본의 가을내음을 느꼈다.
그런데 내려오는 과정에서 성안의 직원들이 빨리 내려오라고 별안간 소리쳤다. 왜인지 이유는 몰랐다. 운영시간이 끝나기엔 시간도 이르고, 우리 말고도 성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많았는데...
Y와 전망대를 내려오면서 'ugly korean' 용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 Y가 알려주기 전에는 이 용어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해외여행을 하면서 매너 없는 행동을 하는 한국인을 한국인들이 일컫는 말이었는데 처음에 들었을 때는 인종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상짓을 하는 사람은 어느 국가에나 다 있는데 한국인이라는 특정 인종에 대해 비하한다는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다시금 든 생각은 ugly korean이란 단어가 한국인이 ugly 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오히려 방지한다는 것이다. 역설적이다. 실제로 이 용어를 외국인보다 한국인들이 더 많이 사용한다. 그만큼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거니와, 한국인들이 스스로의 행동을 돌아보고 비판적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어쨌든 중요한 건 ugly korean이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며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뼛속까지 한국인인 우리는 밥을 찾아 낮에 봐 두었던 알파마 지구의 아시안 음식집에 갔다. 그곳에서 규동을 시켰는데 제법 맛있었다. 오늘 하루 종일 먹은 거라고 나타 하나뿐이라 뭐든 먹든 맛있었을 테지만. 고명으로 고수가 올라왔는데 생애 처음으로 먹어 본 고수도 나름 괜찮았다!
A Ginjinha. 포르투갈의 전통주는 체리주이다. '진자'라고 불리는데 숙소 근처에 진자를 파는 유명한 가게가 있었다. 한 잔에 1.4유로로 경험에 보기에 합리적인 가격이다. 많은 손님들이 길에서 서서 한 잔 마시는 모습은 가히 로컬의 분위기 그 자체이다. 한 잔 털어 넣는 순간 식도를 감싸는 독한 알코올의 맛. 그와 함께 체리의 향과 초콜릿 맛도 느껴졌는데 마지막에 먹는 체리 두 알의 단맛이 술의 쓴 맛을 달래주었다.
포르투갈의 대항해 시절 벨렘 지구의 명소들과 무어인들의 침략에 의해 탄생한 상 조르제 성까지. 과거의 영광은 잘 보존되어 21세기인 현재로 이어지고 있었다. 진자 한 잔과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