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전학한 학교에서 독특한 친구들을 만났다. 난생처음 본 그 특이한 녀석들은 이른바 ’소수자’였다. 한 녀석은 성소수자. 다른 한 녀석은 화장남. 그리고 그 무리에 낀 요주의 인물. 그 요주의 인물은 전입하자마자 교내에서 인기 많은 녀석을 두들겨 패, 폭풍의 전학생으로 등극했다. 물론 그 요주의 인물은 나다. 나쁜 이미지 탓에 나는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했지만 그 소수자 녀석들은 나를 품어주었다.
하루 일과 패턴은 늘 이런 식이 었다. 교실에서 이른바 ‘혐오 발언’이 쇄도하면, 우리는 교실을 빠져나와 생쥐굴 같은, 음침한 화장실로 가서 험담을 나눴다. 그 생쥐굴에서, 나는 서구의 진보 담론을 체화한 녀석들 덕에 신세계를 접했다. 듣자 하니, 서구에서는 마리화나와 동성혼이 합법이라는 게 아닌가. 그 친구들을 통해서, 나는 마약 합법화나 차별금지법, 페미니즘, 계급 정치, 마르크스주의 등을 접할 수 있었다.
녀석들은 그런 이념이나, 담론이 자신들을 구원해 줄 거라 믿는 듯했다. 자신들이 차별받는 현실에서 이념과 담론을 바탕으로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해 자신들을 구원해 줄 거라 믿는 듯했다.
그런데, 우연히 혐오 발언을 자주 하는 다른 친구들과 대화해 보니, 소수자 녀석들은 크게 괴롭힘 당하지는 않은 듯했다. 녀석들이 동성애자이고 화장 남인 걸 다 알고 있었지만, 급우들은 소수자 녀석들과 같은 반에서 지낼 수 없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동성애나 화장이 꺼려져도, 사람 자체가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만약 그 소수자 녀석들이 그 한둘을 문제 삼아 같은 반 아이들 전체를 ‘혐오주의자’로 싸잡는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 아마 서로를 적대하며 괴롭혔을 거다. 오늘날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해답도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 반 소수자 녀석들은 다수자인 급우들을 ‘혐오주의자’로 내몰지 않았다. 그래서 학급이라는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 소수자들은 다수 평범한 시민들을 거리낌 없이 혐오주의자라고 부른다. 심지어 소수자끼리 정치세력을 이루어 시민들의 일상을 지적질하고 시민들과 대립한다.
문제는 그 정치세력이 바로 우리나라의 진보정당이라는 점이다. 진보정당은 소수자를 구원하겠다며 나서지만, 민주국가에서는 다수 대중의 동의 없이는 소수자를 도울 수 없다. 과거 노회찬 의원은 삼성과 비리를 저지른 검사 명단을 폭로해서 대중의 지지를 얻고, 그 힘으로 소수자 권리를 옹호했다. 노회찬 의원은 진보정당이 따라야 할 좋은 선례를 보여준 셈이다.
결국, 우리 반 소수자 녀석들을 구원한 것은 정치적 올바름 같은 소수자를 위한 이념이 아니었다. 노회찬 의원이 비리 검사 명단을 폭로하며 바로 세우려 했던 공동체, 바로 그 공동체가 소수자와 다수자를 아울렀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던 나를 품어준 소수자 녀석들, 그리고 그 소수자 녀석들을 급우로 인정하고 함께한 다수 급우가 있었기에, 한 학급이라는 공동체 속에서 모두가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이다.
소수자 문제를 ‘혐오’라는 관점에서만 접근하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모두가 동료 시민이라는 의식이 되살아나고, 공동체가 되살아날 때, 소수자를 둘러싼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