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청년정치인의 좌파사상사 독후감
헌병통치로 공포를 심고, 회사령으로 경제를 장악하고, 토지조사로 땅을 빼앗고, 교육령으로 언어와 사고를 통제하고, 마지막으로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으로 정신을 개조하려던 식민지배아래 식민지지식인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데라우치가 설계한 5단계통치의 최종목표는 "순응하는 신민"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먼저 시험대에 오른 사람들이 바로 지식인이다.
당대 지식인 중에서 내로라하는 지식인을 꼽으라면 당연 소설가 이광수다.189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이광수는 동학농민운동과정 속에서 부모를 잃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고아가 된 소년은 천도교로 이름을 바꾼 동학의 지원으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그 유학길에서 메이지시대 일본사회와 부강한 국가를 목격했다.
1917년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 재학 중이던 그는 당시 금지된 서적을 읽었다.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 톨스토이의 무저항주의, 그리고 마르크스의 자본론까지 모두 섭렵했던 모양이다. 당시 일본대학가는 다이쇼데모크라시의 열기로 들끓고 있었고, 조선인유학생들 역시 그 영향을 받았다.
1년 뒤 이광수는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직접 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다. "조선민족은 정당한 자유권을 요구하는 바이며, 이는 천부(하늘이 부여한)의 것(권리)이요, 시대의 흐름이다." 선언은 3·1 운동의 촉발에 기여한다. 이에 이광수는 일제경찰의 추적을 피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편집장을 맡으며 그는 독립운동일선에서도 활동한다. 도산 안창호가 그를 아들처럼 아꼈고, 그는 안창호를 아버지처럼 따랐다.
그러나 3.1운동의 열기가 식어가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임시정부 내부는 재정난과 노선갈등으로 분열됐다. 이동휘의 사회주의계열과 안창호의 민족주의계열이 대립했고, 이승만은 임시정부가 어렵사리 모은 지원금을 낭비하며 미국에 틀어박혀 외교독립론을 고집했다. 청년 이광수에게는 "정말로 독립이 가능할까?"하는 회의가 생긴다.
그는 2년간의 임시정부활동에서 이탈해 조선으로 돌아왔다. 명목은 연인 허영숙과의 결혼이었으나, 실제로는 독립운동에서의 좌절과 병약한 신체가 그의 활동의지를 끊었다. 이를 예의주시하던 총독부는 그를 투옥시키지 않았다. 대신 가만히 지켜보다가 회유했다. 데라우치 이후의 총독부는 이미 공권력을 동원한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지배이념을 전환한 상태였다. 유명하고 똑똑한 조선인을 감옥에 가두기보다, 자신들 체제안으로 끌어들이는 편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광수는 강직한 인물이 아니었다. 일제의 회유에 솔깃하다가도 일정정도 거리를 뒀다. 그러다가 1년 뒤 돌연 '민족개조론'을 발표한다. 민족개조론은 당시 조선지식인사회에 큰논란을 일으켰다. 그의 논리는 세 단계로 축약된다.
첫째, 조선인의 결함을 진단하는 부분이다. "조선인은 체면과 형식에 얽메이고, 나태하며, 이기적이다. 공동체 의식이 없고, 책임감이 부족하다. 이것이 망국의 근원이다."
둘째, 그러한 조선인을 개조할 방법론을 제시했다. "우리는 일본의 문명을배워 스스로를 개조해야 한다. 서구 근대문명을 가장 빠르게 수용한 일본이 우리의 스승으로 적합하다."
셋째, 그러한 실력양성을 바탕으로 일제가 약속한 자치 혹은 독립의 시기를 논했다. "독립은 실력을 갖춘 뒤의 일이다. 지금 당장 독립을 요구하는 건 시기상조다."
[민족개조론]은 데라우치가 설계한 통치시스템 중 4단계, 즉 '교육을 통한 의식재편'의 그것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총독부가 바라던대로 조선인 이광수는 스스로가 "우리는 미개하다"고 인정하고, "일본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기를 바랬고 이광수는 그 떡밥을 맛있게 물었다.
당시 많은 지식인이 비슷한 자기비판을 하는척하며 전향의 여지를 남겼다. 문제는 '조선인을 개조'하는 주체가 누구인가였다. 안창호 역시 '실력양성론'을 주장하긴 했지만 안창호의 주장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는 근본부터 달랐다. 그는 대성학교를 세우고 흥사단을 조직하며 '독립을 주도할, 민족의식이 투철한 다음세대'를 키웠다. 교육의 목적이 명확했다. 조선인 스스로가 실력을 키우고 그 실력을 바탕으로 독립의 기반을 탄탄히 다지겠다는 것이었다.
반면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일본인이 일찍히 근대화(자본주의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인이 인종적으로나 사회문화면에서나 월등히 우월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따라서 인종적으로 열등한 조선인이 근대화와 실력함양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일제치하에서 순응하며 일본에 동화되는 것이었다. 똑같이 "실력"을 말했지만, 한사람은 조선인 스스로의 자립을 말했고, 다른 한 사람은 식민지배(현실)를 받아들이고 일본에 동화되어야한다, 말한다.
이게 조금 복잡한 게, 이광수 스스로는 1930년대 말까지도 자신이 조선민족을 위해서 행동한다고 믿었다. 1939년 그는 이렇게 쓴다. "조선인이 황국신민으로 거듭날 때, 비로소 일본제국의 일원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다".민족의 DNA를 보전해야된다는 논리아래, 그는 계급의식은 고사하고 민족으로서의 정체성마저 포기했다.
수양동우회사건이 터졌다. 안창호가 주도한 수양동우회가 비밀결사로 지목되어 간부들이 대거 검거됐다. 이광수도 체포됐다. 고문과 협박이 이어졌고, 그는 그 자리에서 전향한다.
이후로 창씨개명도 흔쾌히 받아들인다. 창씨개명으로 얻은 일본식이름은 '가야마 미쓰로'였다. 같은해 여름, 그는 [매일신보]에 '나의 고백'이라는 칼럼을 기고한다. "나는 과거를 참회한다. 조선민족의 진로는 내선일체에 있다. 우리는 천황폐하의 적자로서 대동아공영권 건설에 헌신해야한다."는게 칼럼의 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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