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코스를 택하든 정동길 걷기의 중심이자 시작은 늘 덕수궁 대한문입니다. 이제 대한문 앞에서 출발해 느긋하게 돌담길을 따라 걷습니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아기자기하고 정겨운 돌담입니다. 정동길을 걸을 땐 이 땅에 근대화가 시작된 150여 년 전으로 타임 슬립해 그 당시 사람들의 눈으로 바라보길 제안합니다. 그때의 사람들은 수천 년 역사에서 본 적 없는 낯설고도 이국적인 건물들이 하나 둘 들어서는 정동길을 걸으며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입니다. 그들의 눈으로 건축물들을 바라본다면 정동은 새로운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정동로터리에 이르러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 사이, 서편 높은 언덕 위 우아한 르네상스식 건축물인 서울시립미술관의 안내 표지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원래는 일제강점기인 1928년 지어진 경성재판소의 건물로 대한민국의 대법원 청사로 사용되다가 1995년 대법원이 서초동으로 이전하면서부터 서울시립미술관으로 탈바꿈하였습니다. 미술관 측은 보수공사를 통해 파사드(facade, 건축물의 정면부)는 옛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건물의 약화된 부분을 새로 지어 잇는 방식을 택했는데, 유럽 대부분의 오래된 건축물들이 이 방법을 통해 옛 모습을 지키고 있습니다.
일제가 지은 경성재판소(1928년)는 대법원을 거쳐 현재의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재탄생했습니다. 권위의 이미지를 벗고 내노라하는 화가들의 전시가 이뤄지는 예술의 공간으로 탈바꿈했지요
정동로터리에서 소의문(서소문)터 방향으로 나지막한 언덕배기의 배재공원과 지금의 러시아 대사관 자리는 1885년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이 있던 곳입니다. 배재학당의 후신인 배재중·고등학교가 1984년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사 갈 때 똑같이 생긴 두 동의 건물 중 서관을 옮겨갔고, 동관은 이곳에 그대로 남아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916년 붉은 벽돌로 지은 아담하고 고풍스러운 건물로 안으로 들어가면 학교의 설립자인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의 초상화와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는 교훈이 눈에 들어옵니다. 설립 당시 반상의 제도가 남아있어 하인을 대동하고 등교했던 양반 자제들에게 그와 같은 교훈은 꽤나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이 완전히 새로운 배움의 터전에서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배출됩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1875~1965), 한글학자 주시경(1876~1914), 시인 김소월(1902~1934), 소설가 나도향(1902~1926) 등 많은 분야의 선구자들이 이 학교의 졸업생이었지요.
배재학당의 동관은 그 자리에 남아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동화 속에 나올 법한 아기자기한 붉은 벽돌집이지요.
유서 깊은 건물을 뒤로하고 다시 정동로터리로 돌아옵니다. 정동의 터줏대감인 듯 정동 한복판에 당당하게 자리한 정동 제일교회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로 이 역시 아펜젤러 목사가 세웠습니다. 그의 흉상이 교회 마당 한쪽에 세워져 있습니다. 웅장함이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소박하고 아늑한, 무척이나 교회다운 건물이란 생각이 듭니다.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평화로움이 느껴집니다. 더운 여름날 이 교회의 신도분들이 시원한 음료를 행인들에게 대접해 주시더군요. 감사하게 얻어 마시고 갈증을 풀었지요.^^
120여 년간 보존된 고딕 양식 예배당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되었지만 6.25 전쟁으로 파괴되어 2003년 복원되었습니다.
정동극장을 지나자마자 작은 골목으로 들어서면 을사늑약이 맺어졌던 중명전(重明殿)이 골목 끝에서 얼굴을 쏙 내밉니다. 중명전은 현재 덕수궁 영역 밖으로 나와 있을 뿐만 아니라 좁은 골목 안쪽 깊이 위치해 지나치기 십상이지요.
중명전은 1901년 지어진 황실도서관으로 원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었습니다. 1904년 덕수궁 대화재 후 고종의 집무실인 편전이면서 외국사절을 알현하는 곳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1905년 일본에 의해 외교권을 강탈당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었고, 이에 고종이 헤이그에 비밀특사를 파견하는 등 긴박했던 근대사의 장면들이 펼쳐진 곳이기도 합니다. 일제강점기에는 덕수궁을 축소하면서 궁궐 경내에서 제외되었고 서울구락부(외교관클럽)에 임대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은 덕수궁역 밖으로 나와있는 중명전 내부의 밀랍인형으로 재현한 을사늑약 체결 현장입니다. 대한제국이 국권을 잃고 36년간 일제의 식민지가 된 출발점이지요.
중명전을 나와 이제 이화여자고등학교 방향으로 계속 올라갑니다. 정동길을 따라 줄지어 선 은행나무의 노오란 물결이 자꾸만 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정동길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지요. 중명전에서 어두워졌던 마음이 순식간에 위로받습니다.
아름다운 가을날의 정동길입니다.
지금의 이화여자고등학교는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턴 부인(Mary Fletcher Scranton, 1832~1909)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여성의 교육과 사회 진출에 부정적이었던 당시 분위기 탓에 1886년 기와집 교사(校舍)에서 단 한 명의 학생으로 역사적인 첫 수업이 시작됩니다. 그 학생은 ‘복순’이라고만 알려져 있는데 이화여자대학교는 이를 기리기 위해 지금도 학교의 영문 이름을 단수인 WOMAN도 아니고 복수인 WOMEN도 아닌 ‘EWHA WOMANS UNIVERSITY‘라고 쓰고 있습니다.
남녀가 유별한 데 좁은 공간에서 마주 보는 것은 불가하였기에 이화학당의 선생은 모두 여자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한문선생만은 구하지를 못해 어쩔 수 없이 남자 선생을 초빙한 후 내내 등을 돌리고 수업을 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이 땅의 여성들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한 역사가 150년도 채 안된 일이라니 상상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이화학당의 수학과 체조 수업 모습입니다. 여성이 다리를 벌리고 뜀질을 하는 모습은 당시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가문을 망쳤다며 종친회의가 열리기도 했다는군요 맙.소.사.ㅡ.ㅡ
교내로 들어서면 왼편에 이화여자고등학교 심슨기념관이 보입니다. 이 건물은 1915년에 미국인 홀브룩의 기부금으로 준공되었는데 그의 동생 사라 심슨(Sarah J. Simpson)이 세상을 떠날 때 위탁한 것이어서 심슨기념관으로 명명했습니다. 심슨기념관은 옛 이화학당의 교사(校舍)로 사용되었는데, 6·25 전쟁 때 일부 불타 1961년에 증축한 것입니다. 현재는 이화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화학당 하면 많은 사람들은 3·1 운동 당시 이화학당 학생이었던 유관순 열사를 떠올릴 것입니다. 교정의 유관순 열사 동상과 유관순 열사가 빨래하던 우물도 천천히 둘러봅니다.
심슨기념관 앞마당에서 이화학당의 댕기머리 소녀들이 조회를 하고 있군요.(1920년대). 현재는 당시 교실 등을 재현해놓은 이화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지요.
심슨기념관 건너편 현 이화여고 백주년기념관 자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인 손탁호텔(Sontag Hotel)이 있던 자리입니다. 지금은 백주년기념관 앞에 ‘손탁호텔 터’라는 표지석으로만 남아있습니다. 손탁(Antoinette Sontag, 1854~1922)은 독일 국적의 여인으로 러시아에서 살다가 1885년 제부인 러시아 공사 베베르(Waeber, K.I, 1841~1910)를 따라 조선으로 왔습니다. 아관파천 당시 고종을 도운 공로로 고종으로부터 양관 한 채를 하사 받아 서구식 호텔 경영을 시작합니다. 점차로 외국 귀빈의 방한이 빈번해짐에 따라 1902년 구 양관을 헐고 2층 양관을 신축해 손탁이 계속 경영하도록 합니다. 이것이 바로 ‘손탁호텔’입니다.
1900년대 손탁호텔과 손탁여사(우측 두 번째)입니다.
이 호텔에서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로 커피를 판매했다고 하는데요, 고종은 손탁의 커피를 매우 좋아했다고 합니다. 이곳은 또 정동구락부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었는데요, 각국의 공사, 선교사, 이상재, 서재필, 윤치호, 이완용 등이 속한 정동구락부는 독립협회(1896~1898)의 모체가 됩니다. 2018년 tvN에서 방영된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글로리 호텔은 외관은 닮지 않았습니다만 용도와 역할에 있어서 손탁호텔이 모델입니다. 몰아보기 한 드라마 중 하나이지요. 너무 울었던, 아프고도 아름다운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1909년 손탁 여사는 일제의 간섭이 심해지자 조선을 떠납니다. 1917년에는 이화학당이 매입해 기숙사로 사용하다가 프라이 홀 건축을 위해 1922년 철거했습니다. 안타깝게도 프라이 홀도 1975년 화재로 사라집니다.
나를 일두고택(함양)과 만휴정(안동)으로 이끈 아름다운 영상의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드라마 속 글로리호텔은 손탁호텔을 모델로 했지요. 논산 선샤인스튜디오의 글로리호텔 세트장입니다
예원학교를 끼고 언덕 위로 조금 숨 가쁘게 오르면 높은 언덕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옛 러시아공사관의 하얗게 빛나는 첨탑을 만나게 됩니다. 옛 러시아공사관은 20여 년간 우리나라에 머무르면서 무수한 근대건축물을 남긴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A. I. Seredin Sabatin, 1860~1921)에 의해 1890년에 지어진 매우 우아한 건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본관 건물은 6·25 전쟁 때 거의 파괴되고 지금은 길쭉한 첨탑 부분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습니다.
『Korea』(1904, Angus Hamilton)에 실린 러시아공사관 전경과 첨탑만 남은 옛 러시아공사관의 앙상한 모습입니다. 작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니 잠시 쉬어갑니다.
이 언덕에 서면,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시해(1895)되고, 경복궁에 유폐되다시피 한 고종이 일본의 삼엄한 감시의 눈을 피해 이듬해 정동의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던 아관파천(俄館播遷, 1896)의 다급한 순간이 그려집니다. 고종이 세자와 이곳에서 지낸 약 1년간 러시아는 많은 이익을 챙겼습니다. 나무를 베어다 팔고, 광산을 개발하고 고래잡이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열강들과 체결해 놓은 최혜국 대우 조항 때문에 혜택은 다른 나라들에게도 주어지게 됩니다. 미국은 경인선 철도 사업권을 가져갔고 러시아와 가깝던 프랑스는 경의선 철도 사업권을 얻어 갔습니다. 이에 백성과 신하들은 고종의 환궁을 요구했습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던 고종이 돌아간 곳은 경복궁이 아니라 러시아공사관에서 가까운 덕수궁(경운궁)이었지요.
2018년 ‘고종의 길’이라 명명한 그 피란길이 복원되었습니다. 그러나 생생한 역사현장을 보존·활용해 서울의 문화적 가치를 더욱 높이겠다던 당초의 취지가 무색하게 옛 지도들을 입맛대로 뒤섞어 성급하게 해석, 복원했다는 논란도 있습니다.
문화재청이 2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급히 '고종의 길'을 복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빨리 성과를 내어놓아야만 한다는 압박 때문이었을까요? 우리의 장점이자 단점인 '빨리빨리'는 문화재 복원에 있어서만큼은 지양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낭패를 수도 없이 겪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요. 전문가들의 의견을 세심히 듣고 오랜 시간 꼼꼼히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빨리 끝낸다고 하면 오히려 의심하고 느긋하게 기다려야 합니다.
복원된 아관파천 피란길인 ‘고종의 길’입니다.(조선일보 제공)
다음 편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신문물 전파지로서의 정동을 소개해 드립니다! 아직 운동화 끈 풀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