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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Oct 19. 2022

멈춘 시간, 좌절된 꿈

누구나 알지만 잘은 모르는, 정동 3


150년 전 정동은 이태원만큼 이국적이었다(https://brunch.co.kr/@storybarista/33)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당시 정동에는 러시아공사관 말고도 서양의 공사관들이 줄지어 들어섭니다. 사실상 대한제국이 선포(1897)되기 전부터 이미 정동은 서양인의 거주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습니다. 조미수호통상조약(1882)에 따라 1883년에 입국해 정동에 최초 진입한 초대 미국 공사 푸트(Lucius Harwood Foote)를 필두로 정동은 빠르게 서양 공사관, 선교사가 세운 학교, 교회, 호텔 등 서양식 건축물들이 들어서고 서양인들로 북적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이곳을 서양촌(西洋村), 혹은 양촌(洋村)이라 부르기 시작합니다.

   

푸트 일행은 정동의 민 씨 일가의 집을 사서 미국공사관으로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정동이 양촌으로 변모하는 첫 출발점이었습니다. 푸트 공사 이래로 계속 사용했던 한옥 구조의 미국공사관 건물은 부분적으로 여러 차례 개조되기는 했지만,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까지도 철거되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다 1976년 그 자리에 전통 한옥 양식의 미국대사관저가 신축되면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신축 건물이 지금까지 미국대사관저로 사용되고 있는 ‘하비브하우스(Habib House)’입니다.              

미국은 정동의 민가를 사들여 1883년 조선에 최초의 외국 공사관을 열었습니다.
1976년 공사관 자리에 현재 미국대사관저인 하비브하우스가 들어섭니다. 주한 미국대사 필립 하비브(Philip Habib)의 재임 중 대사관저로 지어져 그의 이름을 땄지요.


신축 건물이 들어서기 전 최초 미국공사관에는 1883년 푸트 이래 1905년까지 7명의 주한 미국 공사가 재임했습니다. 그중 가장 오래 재임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와 가장 깊은 인연을 맺은 공사는 호러스 뉴튼 알렌(Horace Newton Allen, 安連, 1858~1932)이었습니다.


알렌은 1884년 미국공사관 소속의 의사이자 선교사 신분으로 조선에 왔습니다. 그해에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부상당한 민영익을 치료한 것을 계기로 고종의 신임을 얻게 됩니다. 그는 갑신정변으로 역적이 된 홍영식의 집을 하사 받아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광혜원(13일 만에 제중원으로 명칭 변경)을 설립합니다. 광혜원은 1904년 미국의 사업가 세브란스의 기부금으로 새롭게 병원을 만들면서 세브란스병원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후 연희대학교와 통합되면서 연희와 세브란스의 한 글자씩을 따와 지금의 연세대학교가 됩니다.

알렌은 1890년에 미국공사관 서기관, 1897년에 승진하여 1905년까지 미국 공사로 근무하면서 우리나라의 근대사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원래 종로구 재동 홍영식의 집을 사용하였으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아 연세대학 교내에 복원해 세브란스 병원의 연원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웬 탑이???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정동에 진입한 외교공관은 영국이었습니다. 1883년 조영수호통상조약이 맺어지고 이듬해 초대 영국공사로 해리 파크스(Harry Smith Parkes)가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파크스는 중국 천진에 상주하면서 중국과 겸임으로 공사업무를 보았고, 외교에 관한 전권은 서울에 주재하는 임시 총영사 애스톤(W.G.Aston)에게 위임되었습니다. 엄밀히 말해 영국의 최초 공관은 영국 공사관이 아닌 영국 총영사관이었다고 해야겠습니다. 조던(John N Jordan, 1852~1925) 총영사가 공사로 승진한 1898년에 이르러서야 명실상부하게 영국 총영사관은 영국 공사관으로 승격됩니다.      


영국 측은 1884년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정릉이 있었던 곳이라 전해지는 당시 신헌 부자가 살던 3,144평의 집을 매입하여 공관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원래 있던 기와집을 대체한 서양식 벽돌 건물이 완성된 것은 1892년에 이르러서였습니다. 개화기 공사관 중에서 현재까지 그 자리 그대로 원래의 모습을 잃지 않고 사용되고 있는 것은 주한 영국대사관이 유일하니 그 의의와 가치가 무척 크겠지요?           

'언덕 위 눈에 확 띄는 벽돌 건물'로 종종 묘사된 영국 공사관의 모습입니다.(「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1894.8.4일 자)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덕수궁과 이웃하고 있는 현재의 영국대사관 전경입니다.


그 외에도 정동에는 1885년 러시아공사관(서양식 건물은 1890년 건립), 1896년 가장 아름다운 외관을 자랑했던 프랑스 공사관(현 정동 창덕여중 자리), 1891년 독일 영사관(현 정동 서울시립미술관 자리), 1901년 벨기에 영사관(현 정동 캐나다 대사관 자리) 등이 그 공관들을 두면서 정동은 명실 공히 공사관 거리(Legation Street)로 거듭나게 됩니다.                                                                                 

자국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공사관 신축 열풍에 프랑스도 가세하여 바로크풍의 화려한 공사관을 완공했지요. (부르다레, 「한국에서(En Coree)」, 1904)
정동에 자리 잡았던 벨기에 영사관은 1905년 회현동에 영사관을 신축했고 여러 용도로 사용되다가 1981년 관악구 남현동으로 건물을 옮겨 서울시립미술관 분관으로 변신했지요~


그렇다면 왜 최초의 서양 공관들은 정동 일대로 몰려들었을까요? 정동은 도성의 서쪽 끝에 위치해 인천(제물포)으로 이어지는 마포와 양화진 가도의 진입로라는 지리적 이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동 지역은 도성 내에 자리하였지만 상대적으로 외진 곳이라 토지와 가옥의 매입이 쉬웠고 조선 정부가 외교 공관을 한 곳에 모아 일반 백성과 격리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정동의 토지와 가옥을 알선해 준 것도 하나의 요인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1896년 아관파천 이후 덕수궁(경운궁)의 중요성이 커지자 궁궐과 가까운 곳에 자국의 공관을 두려는 의도는 더욱 강화됩니다.        


그렇다면 정동을 비롯한 서울에 얼마나 많은 외국인이 거주하고 있었을까요? 「대한매일신보」 1910년 7월 15일 자(국문판)에는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숫자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경성에 거주하는 서양인과 청국인을 근월에 조사한 즉,

영국인이 88명이오, 미국인이 131명이오, 법국인(프랑스인)이 57명이오, 덕국인(독일인)이 19명이오, 아라사 국인(러시아인)이 12명이오, 비리시 국인(벨기에인)이 1명이오, 청국인이 2,036명이라더라.     


총 2,344명 중 청국인을 제외한 서양인은 308명으로 생각보다 적은 수입니다. 그것은 조사 시점이 1910년으로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잃음으로써 상당수 본국으로 돌아간 상황이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록 청국인이나 일본인에 비해 적은 숫자라 하더라도 서양인들이 정치적으로나 이국적 문화로 이 땅의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은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특히나 당시 서양인들의 정착지였던 정동은 각국 외교의 중심지이자 선교 활동의 시작점이었고, 신학문과 신문물의 전파지였으니 변화의 물결은 더욱 거을 것입니다. 지금도 정동의 모습이 이토록 이채로운데 구한말 이 땅의 사람들에게 정동의 변화는 얼마나 신기하고도 놀라운 일이었을까요?    


그러나 정동의 이 모든 급격한 변화는 불과 20여 년 만에 막을 내립니다. 고종이 자주적인 근대국가로의 꿈을 꾸며 대한제국을 선포한 지 8년 만에 일제에 의해 외교권을 박탈당하는 을사늑약(1905)이 일어나고, 이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비밀리에 헤이그로 특사를 파견(1907)한 일은 일본의 방해로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고종 강제 퇴위의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동의 중심이었던 덕수궁은 잘려나가고 훼손당하면서 그 영역이 반으로 줄어듭니다. 경성재판소가 들어서고, 각국 공사관들이 자리를 옮겨 뿔뿔이 흩어지거나 아예 외교공관 자체를 폐쇄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습니다. 서양인들은 서서히 정동을 떠났고, 결국 1910년 대한제국은 멸망했습니다. 대한제국의 멸망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향한 이 땅의 모든 꿈과 열망은 좌절되었습니다. 시간도 멈췄습니다. 그 안타까운 꿈의 흔적들이 남은 정동이기에 이국적이고 흥미로운 곳이면서도 한편 우리에게 아프고 아련한 곳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바람 따라 무심히 은행잎 나부끼는 가을날이면 그 멈췄던 흑백의 시간에 화사한 색과 생기를 입히러 다시 정동길 산책에 나서게 됩니다.         


긴 여행으로 꽤 오랫동안 마무리하지 못한 '정동길 같이 걸어요' 연재를 이제 마칩니다. 운동화 끈 풀지 말라고 해 놓고서는..ㅎㅎㅎ 여행에서 돌아와 나를 반기는 일상이 있음에 문득 행복해지는 가을날입니다. 기다려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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