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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Nov 02. 2022

일본인의 조상은 한국인일까?

규슈에 새겨진 한국사 6

일본 북규슈(北九州) 사가현(佐賀縣) 간자키 군(神埼郡)은 일본에서도 낙후된 지역입니다. 그래서 이곳에 공업단지를 조성하기 위한 공사가 계획되는데요, 1986년 공사 도중 일본 열도와 세계 고고학계를 흥분시킨 놀라운 사건이 벌어집니다!


여러 겹으로 둘러싸인 환호(環壕, 취락을 방어하기 위한 도랑), 망루, 움집터와 같은 취락 시설, 독무덤을 시작으로 청동검, 동종, 청동거울, 유리대롱옥 등 야요이시대(B.C 3 ~ A.D 3C) 유물이 대거 쏟아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40만m²(12만 평)에 달하는 대규모 청동기 유적을 발견한 일본 학계와 언론은 전설처럼 전해지는 일본 최초의 정치체인 야마타이국의 유적을 발견했다며 한껏 들떴습니다. 아사히 신문이 1989년 2월 23일 자 1면 TOP기사로 게재할 만큼 큰 이슈가 되었지요. 이미 공단조성을 위해 수천 억원이 투입되었지만 일본 사가현은 재빠르게 공단 조성을 포기하고 요시노가리(吉野ヶ里)라 불리는 이 특별한 유적을 전면 보전, 복원하기로 결정합니다.


멀리 부드러운 능선과 너른 들판, 그 들판 옆으로는 다데가와 강이 흐르는 풍요로운 농촌 마을, 일본 규슈 사가현의 요시노가리입니다. 좋은 들판이 있는 마을이란 뜻에 잘 부합되는군요


일본인들이 흥분할 만도 한 것이 일본 고고학계는 이 야마타이국의 흔적을 찾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왔지만 눈에 띌만한 성과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국 역사서『삼국지』「위지 왜인전」에는 야마타이(邪馬臺) 국과 여왕 히미코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A.D 2~3C 경 왜(倭)에 있는 여러 나라들의 합의로 야마타이국의 히미코(卑弥呼)를 공동으로 여왕으로 옹립하여 나라들 사이의 분쟁을 수습하게 했고 야마타이국은 30여 개의 작은 나라들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라는 현대의 국가 개념보다는 성읍국가에 가까운 일종의 도시국가적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우리나라『삼국사기』「신라본기」에도 아달라 이사금 20년(173년)에 왜의 여왕 히미코가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야마타이국에 대한 기록이 정작 일본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는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아 일본 학계의 애를 태웁니다. 연구의 진전 없이 신비에 싸인 채 남아 있던 야마타이의 유적으로 생각했으니 일본 전체가 흥분할 만도 하지요!


2018년 개봉한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 <툼레이더>의 세 번째 시리즈는 여주인공 라라 크로포트가 일본에서 실종된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아버지가 히미코 여왕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으며 히미코 여왕의 무덤을 찾으러 야마타이국을 찾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물론 영화의 스토리는 허구이지만 역사적 인물인 히미코 여왕을 끌어들인 것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신비에 싸인 존재인지는 알만 하지요?


1989.2.23일 자 아사히신문 1면 탑에 요시노가리가 <야마타이국 시대의 '나라(國, 쿠니)'>라는 타이틀로 장식되어 있네요. 오른쪽은 툼레이더(2018) 영화 포스터입니다^^




아! 잠깐 이야기가 옆길로 샜습니다. 다시 요시노가리로 돌아갈게요.^^;

그런데 놀랍게도 말입니다. 요시노가리가 야마타이국의 유적이라며 떠들썩하던 분위기는 슬그머니 자취를 감춥니다. 왜일까요? 발굴 조사가 진행되면 될수록 일본의 열렬한 염원과는 달리 야마타이국이라는 증거는 찾지 못하고 뜻밖에도 한반도 고유의 청동기와 석기가 대거 쏟아집니다. 그 종류는 한국형 동검인 세형동검, 청동 거푸집 하며 간돌검, 버들잎 모양의 돌화살촉, 외날 돌도끼, 반달 모양 돌칼 같은 한반도계 석기류, 민무늬토기 등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무슨 일일까요? 한반도의 석기, 청동기 유물과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유물이 일본 북규슈에서 우르르 쏟아지는 것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정말 2000년도 훨씬 전에 한국인이 177km의 대한해협을 건너가 북규슈에 정착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정말 한국인이 일본인의 조상인 것일까요?


요시노가리 유적으로 들어가는 입구 도리이에 앉은 나무로 만든 새는 우리나라의 솟대를 연상시킵니다(왼쪽) 흙으로 구워 만든 대형 항아리에 시신을 매장한 독무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일본인의 조상은 한국인일까?'라는 질문에 한국인들은 대체로 긍정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손사래를 친다고 합니다. 일본의 사학자, 고고학자조차도 그렇게 해석하기를 꺼립니다. 상반된 의견을 가지고 있는 한국과 일본, 이 두 나라 사람이 아닌 제삼자의 입장에서 일본인의 조상이 한국인임을 주장한 저명한 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생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UCLA 교수로 재직 중인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1997)의 저자, 재러드 다이아몬드(Jared M. Diamond)입니다. 그는 인류 역사와 문명 분석에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한 공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하며 세계적 권위와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는데요. 다이아몬드 교수는 2005년 개정증보판을 내면서 「일본인은 어디에서 왔는가(영어 원제 Who are the Japanese?)」라는 Chapter를 추가했습니다.



재러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개정 보증판(문학사상, 2005)에 일본인의 뿌리를 밝히는 글을 추가로 게재했습니다.


이 글에서 그는 고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이 현대 일본인의 조상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지금의 일본어가 고구려어, 백제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한 주장은 한국어판 뿐만 아니라 영문판, 그리고 일본어판에도 그대로 수록, 출판되었는데요, 일본의 가장 중요한 고고학 유적인 158개의 거대한 고분군(300~686)이 일본 왕가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것을 발굴하는 것을 신성모독이라 여겨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일본 고고학계가 냉철한 논쟁을 하기 힘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일본인이 아닌 다른 민족의 기원에 관해 의문이 발생했다면 냉정한 논의가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질문이 일본인에게 향할 때는 그렇지 않다. 유럽 외 지역의 여러 나라와 달리 일본은 개화를 시작해 19세기 후반 산업화를 일굴 때, 정치적 독립과 문화를 보존했다. 이는 놀라운 성과라 할 수 있다. 이제 일본인은 서구 문화의 강력한 영향력과 마주해 자신들의 전통을 유지하는 일에 골몰하고 있다. 일본인은 일본어와 일본 문화가 너무도 독특해 세계의 어떤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복잡한 발전 과정을 밟아왔다고 자부한다. 일본어가 다른 언어와 관련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곧 문화적 정체성이 무너지는 거라고 여기는 것이다.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2005년 개정증보판, p.615)


일본인의 뿌리가 한국인이라 주장은 사실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처음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연구되어 온 ‘일본인의 뿌리설’은 크게 네 가지입니다.      

첫 번째, B.C 2만 년 경 빙하기에 일본으로 유입된 사람들이 점차 진화한 것이라는 설입니다. 일본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설입니다.

두 번째, 중앙아시아에서 유목하던 기마 민족이 A.D 4C경 한국을 거쳐 일본을 정복했다는 기마 정복설로 한국인이 아닌 일단의 기마 군단이 일본인의 조상이라는 설입니다.

세 번째, 많은 서양의 고고학자와 한국인에 의해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설로, B.C 400년 경 벼농사와 함께 금속기(청동기와 철기)를 전한 한반도에서 온 사람들이 야요이 문명을 일군 일본인의 조상이라는 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위 세 가지 설을 모두 섞어 일본인의 뿌리를 설명하는 설입니다.      


일본인들은 처음과 두 번째 설을 선호하지만 다른 서양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다이아몬드는 세 번째 설을 지지합니다. 그 근거로 문자 이전 시대를 유추할 때 사용하는 고고학 증거 대신 생물학, 언어학, 역사적 기록 등을 통한 문화적·유전적 유사성을 듭니다.


원래 일본에 살던 원주민 아이누족이 형성한 문화를 조몬 문화(신석기시대, 약 1만 2천 년 전 ~ B.C 3C)라고 하는데, 그것은 벼농사와 금속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야요이 문화(청동기시대, B.C 3C ~ A.D 3C)로 교체됩니다. 조몬인은 야요이 문화를 일군 야요이인과 생활 모습뿐만 아니라 생김새도 매우 다릅니다. 조몬인은 야요이인에 비해 키가 작고 풍성한 수염과 체모를 갖고 있습니다. 현대의 일본인은 조몬인보다는 야요이인에 가까운 외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야요이인은 한국인과 매우 유사한 외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한층 발전된 유전학이 이러한 이론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야요이 유적에서 출토된 인골의 DNA를 측량한 결과, 두 가지 유형이 나타나는데요, 바로 140cm 정도의 작은 신장과 사각형의 얼굴형을 가진 조몬인形과 160cm가량의 계란형 긴 얼굴형을 가지고 있는 야요이인形입니다. 이것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일본 원주민인 조몬인과 반복적인 혼혈을 거듭하면서 오늘날의 일본인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2012년 일본 국립유전학 연구소의 사이토 나루야(齊蕂成也) 교수팀이 일본 본토인, 중국인, 서구인, 아이누, 오키나와인 등의 DNA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는 이 같은 설을 더욱 뒷받침해 줍니다. 이 연구는 국제 학술지인 『Journal of Human Genetics』 인터넷 판에 소개되었습니다.             

 

2012.11.1일 자 산케이신문 과학 섹션에 게재된 '게놈 분석에 의한 일본인의 유전 계통 개념도'입니다. (번역은 시사저널 <이진아의 지구 위 인류사>)




자 그럼, 일본에 문명의 서광이 비친 야요이 시대 이야기를 좀 더 해볼까요? 일본은 세계사적으로도 매우 독특한 문명의 발전 단계를 갖고 있습니다. 1만 2천 년 전 마지막 빙하기를 끝으로 해수면이 수십 미터 상승하면서 일본 열도는 대륙으로부터 떨어져 나갑니다. 일본의 원주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이른 토기인 조몬(繩文, 새끼줄무늬) 토기를 만들면서 신석기 문명을 일구어나가지요. 조몬 토기는 그릇 바깥 면을 새끼줄로 덧붙인 것처럼 장식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런데 일본의 신석기는 야요이 시대로 들어가는 B.C 4C까지 계속됩니다. 중국 등 대륙에서 B.C 3000년경 이미 청동기가 시작된 것에 비하면 이상하리만큼 늦은 시기까지 신석기가 지속되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상하기 어렵지 않지요? 바로 섬이라는 특수성 때문입니다. 문명이 발생한 대륙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벼농사와 금속기(청동기와 철기) 도입이 늦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벼농사와 금속기는 독특하게도 B.C 4 ~ 5C 경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한반도로부터 일본에 전래됩니다. 한반도에서는 이미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 활발히 철제 무기와 농기구가 제작되고 심지어 덩이쇠의 형태로 철이 수출되는 시기이지요.     


한반도에서 건너가 일본에 문명을 전한 이들을 일컫는 말이 일본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712)와 『일본서기(日本書紀)』(720)에 등장합니다. ‘도래인(渡來人)’입니다.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란 뜻이지요. 현대의 일본인들은 도래인을 대륙에서 온 중국인이라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나 금속기가 도래되던 시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은 대부분이 대한해협 바닷길을 해치고 간 한반도인이었습니다. 그들은 경제적인 이유나 국내의 불안한 정치적 변동 상황으로 인해 새로운 터전을 찾아 떠났습니다. 다행히 해류는 일본의 북규슈(北九州) 지방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고 무사히 새로운 땅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한반도의 남쪽 지방과 비슷한 경치와 기후를 가지고 있었기에 도래인들은 그곳에 쉽게 정착하여 한반도에서 이미 널리 이루어지던 벼농사를 적용해 볼 수 있었습니다.      


벼농사를 시작한다는 것은 단순한 식량 문제 해결의 차원이 아닙니다. 이를 위해선 농업 기술력은 물론이고 저수지와 같은 관개시설, 토기, 잉여생산물을 지키기 위한 무기가 필요해지고 이를 위해 조직적인 규모의 인원 동원이 가능해야 하므로 견고한 공동체가 필요해집니다. 따라서 단순한 촌락이 아니라 조직적인 규모의 지휘체제를 갖춘 초기 형태의 국가가 등장하게 됩니다. 이처럼 벼농사를 시작으로 사회는 급격하게 변화합니다. 수렵과 채집에 의존하던 조몬인에게 한반도의 도래인이 가지고 온 벼농사 기술과 청동기 문화는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북규슈 지방에 이러한 새로운 문명이 유입되고 발전해 나간 현장이 바로 요시노가리(吉野ヶ里) 유적입니다. 한일 교류의 첫 장인 셈이지요.

 

B.C 3C ~ A.D 3C까지 야요이 시대 600년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요시노가리는 현재 취락의 최대 전성기인 3C경의 모습을 복원 정비해 역사공원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해 70만 명이 찾는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지요. 일본인의 뿌리를 찾는 일은 고대 한국인의 흔적을 찾아가는 일이기에 조금도 지체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청동기 유적지도 가서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자, 우선 요시노가리로 출발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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