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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May 03. 2022

일본 도자산업의 성공이 오로지 조선도공의 공이었을까

규슈에 새겨진 한국사 5

일본 도자의 신, 이삼평을 찾아서. (brunch.co.kr)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아리타에서 이삼평만큼이나 추앙받는 조선 도공은 또 있습니다. 바로 세계 최초의 여성 자기장, 아리타 도업의 어머니로 불리는 백파선(百婆仙, 1560~1656)입니다.

2013년 방영된 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는 그녀를 모티브로 만들어졌습니다. 조선 최고의 사기장이 되겠다던 주인공 정이 역을 맡았던 문근영의 야무진 눈빛이 인상적이었지요.


MBC 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2013)의 장면들입니다.


백파선은 임진왜란 당시 다케오의 번주인 고토 이에노부에게 끌려온 김해(金海)의 도공 김태도의 아내입니다. 이들은 다케오의 우치다(內田) 마을에서 도자기 가마를 열었는데 1618년 김태도가 세상을 떠나자 백파선은 직접 다케오 가마를 운영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리타에서 이삼평이 백토 광산을 발견해 자기 생산이 본격화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1629년 백파선은 그녀를 따르는 자그마치 960명의 도공과 식솔들을 모두 데리고 아리타로 이주해 아리타 도자산업 발전에 큰 공을 세웁니다.


백파선을 만나기 위해 묘비가 있는 아리타의 호온지(報恩寺)라는 절로 향합니다. 가득한 묘비들 가운데 ‘만료묘 태도파지탑(萬了妙 泰道婆之塔)’라 새겨져 있는 법탑을 찾아냅니다. '만료묘'는 백파선의 법명이고, '태도파'는 태도의 아내라는 뜻입니다. 이 법탑은 1937년 발견되었는데 그녀가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지 50주기인 1705년에 증손자가 세웠다고 합니다. 또 '증조모의 이름은 알 수 없다. 증조모는 얼굴이 온화하고 귀가 축 늘어졌으며 성격이 자애로웠기 때문에 후손들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백파선(백살까지 산 할머니)이라고 불렀다'라고 법탑은 전하고 있습니다.


안내판에는 백파선이 일본으로 가 가마를 열게 된 경위와 아리타 사라야마 자기 창시에 있어 도래도공의 유력한 지도자였다'라는 설명이 한글로 적혀있습니다. 당시 여성으로서 그 많은 도공을 이끌었던 그녀는 분명 탁월한 리더쉽과 친화력을 갖춘 뛰어난 지도자였을 것입니다.  


호온지에 있는 조선 여성 도공 백파선과 후손들의 묘비입니다. 한글로도 설명되어 있어 배려에 감사하게 됩니다.(가장 왼쪽이 백파선 묘비)  


백파선을 만나기 위한 두번째 답사지는 백파선 갤러리입니다. 세계 최초 여성 도공인 백파선을 기리고, 한일 양국의 도자문화 발전과 우호증진을 위해 그녀의 후손들에 의해 2016년 아리타에서 문을 열었습니다. 2018년 4월에는 백파선 기념상 제막식이 있었는데요, 기념상은 한국의 안석영 작가의 작품으로 백자로 제작되었습니다. 흰 치마저고리에 쪽진 머리를 하고 있는 단아하고도 당찬 조선 여인의 모습입니다.

매년 4월 하순부터 5월초 사이 100만 이상의 군중이 몰린다는 아리타 도자기 축제 때에는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이곳 백파선 갤러리를 통해 선보이기도 합니다. 400년 시간의 끈으로 이어진 한일 양국의 도예가들이 진심어린 교류와 우정을 쌓아나가길 기원해봅니다.     

 

백파선 갤러리의 백파선 기념 좌상입니다.  
백파선을 떠올리게 하는 단아한 자기들로 가득 찬  갤러리 내부입니다.

     



그런데 드레스덴의 츠빙거 궁 도자기 박물관을 가득 채우고 있던 고(古)이마리야키를 아리타에서도 만날 수 있을까요? 메이지유신 이전 수출의 90%를 차지했으며 일본을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하게 한 일등공신인 이마리야키(아리타야끼)를 정작 아리타에서는 만나보기가 어렵습니다. 이마리야키는 수출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수출할 땐 그냥 그릇이었지만 지금은 고미술품이기에 일본이 다시 사들이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귀한 몸이 된 고(古)이마리야키를 보기 위해서는 ‘사가현립(佐賀縣立) 규슈 도자 문화관(九州陶瓷文化館)’으로 가야 하고, 오늘날 아리타야키의 발전을 보기 위해서는 ‘아리타 도자기 판매장’에 들러야 합니다.      


규슈 도자문화관 외벽에는 자매도시 독일 마이센 시에서 기증한 25개 도자기 종이 걸려있는데, 1시간마다 청명하게 울려퍼지는 명물입니다.  
갤러리 카페에 전시된 다양하고 화려한 현대의 아리타야키 찻잔들입니다.


일본이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전쟁 중인데도 유독 조선의 도공을 잡아가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이유는 다이묘들의 다도 취미 때문이었지요. 차를 마시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차를 담는 다기를 감상하고 이를 갖기 위해 어떤 비용이라도 감수할 만큼 자기를 사랑한 것에서부터 촉발됩니다. 다도와 다기를 고아한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것입니다.


예술은 참으로 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 예술품을 만들어 내는 장인을 우리는 왜 귀하게 대접하지 않았을까요? 조선에서 지방 가마의 도공들은 천민의 신분으로 도자기를 만드는 일 외에도 농사를 짓고 각종 노역에도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 와서 그들은 도자기의 기술자, 즉 장인으로 대접받습니다. 도자기 ‘선생’ 소리를 듣기도 하고 녹봉을 받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사무라이와 같은 신분이 제공되기도 합니다. 조선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대접에 조선 도공들은 조선으로 돌아가길 포기하고 일본 땅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갑니다.


그러한 창작 여건 속에서 발휘된 조선 도공의 솜씨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기만 해야 하니 속이 상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일본 도자산업의 성공이 오로지 조선 도공의 공이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예술은 예술가를 대접하는 사회 풍토와 그것을 소비하는 문화가 성숙했을 때 활짝 꽃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피카소와 샤갈을 세계적 화가로 만든 것은 그들의 조국인 스페인과 러시아가 아니라 바로 프랑스 파리였던 것처럼 말이지요. 지금도 생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일본인들의 유별난 도자 사랑을 눈여겨볼 일입니다.


조식(早食)이 담긴 료칸(旅館)의 생활 자기들이 음식과 어울려 무척이나 아기자기하고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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