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슈에 새겨진 한국사 3
무령왕과 오징어회 (brunch.co.kr)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독일 작센 주의 주도인 드레스덴(Dresden)은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과 예술품 덕분에 ‘독일의 피렌체’라는 별명이 붙은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드레스덴을 예술의 도시로 만든 데는 18세기 작센 공국의 선제후이자 폴란드의 왕이었던 강건왕 아우구스트 2세(AugustⅡ, 재위 1694~1733)의 공이 지대합니다. 그의 이름은 유럽 도자사(陶瓷史)에서도 매우 빛나는 이름인데요, 그때까지만 해도 자기를 만들 수 없었던 유럽에 최초의 자기를 성공시킨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유럽 3대 도자기로 손꼽히는 독일의 명품 브랜드 '마이센(Meissen) 자기'의 탄생은 자기를 ‘하얀 금’이라 불렀던 아우구스트 2세의 도자기 사랑과 집념에서부터 비롯되었지요.
지금은 도자기 이름으로 더 유명하지만 마이센은 원래 드레스덴에서 차로 40여분 떨어진 서북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의 이름입니다. 1710년 아우구스트 2세가 도자기 제작을 위해 비밀리에 드레스덴 근교인 마이센의 견고한 성에 공장을 차리고 연금술사 요한 뵈트거(Johann Friedrich Böttger)를 압박해 드디어 그 첫 제작에 성공했기에 마이센은 유럽에서 자기를 일컫는 고유명사로도 사용됩니다.
아름다운 드레스덴을 더욱 개성 있게 만드는 것이 이 마이센 자기입니다. 드레스덴 최고의 볼거리는 12세기부터 작센 공국의 왕들이 살던 레지덴츠궁(residenzschloss Dresden)과 18세기 초 건립된 바로크 양식의 츠빙거궁(Zwinger)인데요,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레지덴츠궁 왕실 마구간 외벽의 ‘군주들의 행렬’(1876)이라는 101m짜리 마이센 자기 벽화입니다. 무려 25,000개의 마이센 타일이 사용된 걸작이지요. 또한 츠빙거궁의 도자기 박물관(Porzellansammlung)은 아우구스트 2세가 수집한 당대 최고의 중국과 일본산 도자기, 그리고 초기 마이센 자기 컬렉션들로 가득합니다. 엄청난 양과 화려함에 눈이 어지러울 지경입니다.
도자기 종주국인 중국 도자기가 유럽 왕실에서 매우 귀하게 취급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만, 일본의 도자기는 어땠을까요? 17세기 초반에야 자기 제작이 가능해졌으니 중국산에 비해 수준이 떨어져도 한참 떨어졌을까요? 그러나 츠빙거궁의 아우구스트 2세가 사들인 17~18세기 일본 자기 컬렉션의 수준은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놀라움 그 자체입니다.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중국의 경덕진(景德鎭)에서 수입한 도자기를 유럽으로 가져가 곧장 경매에 부쳐 유럽 왕실에 매우 비싼 값으로 공급해왔습니다. 그러다 17세기 중반 명·청 교체기의 전란으로 중국 도자기 수입이 원활하지 않자 네덜란드 상인들은 막심한 손실을 입게 됩니다. 이에 나가사키를 오가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인들은 대체품으로 일본 아리타야키(有田燒)를 판매해보기로 합니다. 일본의 아리타야키가 세상에 선을 보이는 순간이었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때 선보인 아리타야키는 유럽에서 대히트를 치게 됩니다. 1659년 5만여 점을 시작으로, 첫 수출 뒤 70년 동안 약 700만 개의 아리타야키가 이마리 항구를 통해 유럽 각지로 팔려 나갔습니다. 그래서 아리타야키는 이마리야키로도 불립니다. 드레스덴의 츠빙거궁에 전시된 일본 도자기는 대부분 이마리야키이며, 중국 자기와 이마리야키를 모방하며 발전해 나간 것이 바로 마이센(Meissen) 자기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16세기까지만 해도 목기(木器)와 질그릇 사용이 일반적이었던 일본에 세계적 도자기 강국으로서의 명성을 쥐어줬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일본의 근대화를 위한 비용을 마련해 준 이마리야키(아리타야키)는 대체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그 답은 바로 임진왜란(1592)에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리따야키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궁금증을 해결하려면 일본 자기의 고향인 규슈(九州) 사가현(佐賀縣)의 작은 시골 마을, 아리타(有田)로 가보아야 합니다.
일본 규슈의 도자기마을, 아리타로의 답사가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