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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Feb 22. 2023

행촌동의 귀신나오는 집

누구나 알지만 잘은 모르는, 한양도성 4

https://brunch.co.kr/@storybarista/41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그림처럼 예쁜 홍난파 가옥   


깨끗하게 정비된 공원을 걸어 이제 고갯마루에 위치한 2층의 빨간 벽돌집에 시선이 머뭅니다. <헨델과 그레텔> 동화 속에 나오는 집처럼 아담하고 예쁜 이 집은 홍파동의 홍난파(1898~1941) 가옥입니다. 1900년대 초에 독일영사관이 있어서 이 동네에는 독일선교사들의 집이 많았는데, 홍난파 가옥도 1930년에 독일인 선교사가 지은 집입니다. 홍난파는 숨을 거두기 전 6년간(1935~41) 이 집에서 살았습니다. 지금은 아래층을 자료실과 시청각실로, 위층은 음향시설을 설치해 소공연장으로 사용하고 있지요.


 한국 근대 음악의 선구자,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 등의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홍난파는 <봉선화>, <고향의 봄>, <성불사의 밤> 등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울분과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곡들을 작곡합니다. 그러나 그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72일간의 옥고를 치른 뒤 친일 작곡가로 전향하였습니다. '수양동우회 사건'은 일제가 수양 동우회와 관련된 180여 명의 조선 지식인들을 검거한 사건으로 41명이 기소되었다가 무죄로 석방되는 과정에서 지식인 대다수가 친일로 돌아서게 되는 사건이지요.

 

43세에 늑막염으로 숨을 거둔 그의 짧은 인생은 마지막 4년간의 행적으로 얼룩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친일 가요를 작곡한 시기의 이 가옥을 당장 헐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역사는 모두 지워져야 할까요? 아프니 무조건 지워버리자고 할 것이 아니라 가슴 쓰린 역사를 되돌아보며 오답노트를 작성하듯 착실히 되짚어나가야겠지요. 그래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테니까요.


여름이면 담쟁이덩굴이 이 집을 한층 생기 있게 만들겠지요. 벽난로와 굴뚝이 있는 100년 된 아담한 서양식 건물입니다.   


행촌동의 귀신 나오는 집             


홍난파 가옥에서 10여 분 거리의 행촌동(은행나무골) 마을에는 ‘귀신 나오는 집’으로 알려진 기괴한 건축물이 있었습니다. 십여 가구가 옹기종기 한 건물 안에 모여 살고 있었지만 안전의 문제가 제기될 정도로 건물의 상태가 나쁘고 음산한 느낌마저 드는 곳이었지요. 그러나 누가 지었는지, 누가 살던 집인지에 대해서는 깜깜했습니다. 어느 날 어지러운 장독대를 치우자 이 건물의 초석에 ‘DILKUSHA 1923’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래도 이 집의 내력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지요.      


복원 공사가 시작된 귀신 나오는 집, 딜쿠샤의 어수선한 모습과  '딜쿠샤 1923'이 적힌 정초석입니다.


그러던 2006년 어느 날 브루스 테일러(Bruce T. Taylor, 1919~2015)라는 미국에서 온 한 노인이 이 '귀신 나오는 집'을 찾아옵니다.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자신이 자란 집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에 의해 베일에 쌓여있던 이 '귀신 나오는 집'의 미스터리 하나둘씩 풀려나가게 됩니다.             

                                                                     

이 집을 지어 살았던 사람은 브루스 테일러의 부모님인 앨버트 테일러(Albert W. Taylor, 1875~1948)와 메리 테일러(Mary L. Taylor, 1889~1982) 부부였습니다. 앨버트 테일러는 미국인으로 광산기술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1897년 조선에 왔습니다. 그는 순회공연 중이던 영국의 연극배우 메리를 일본 요코하마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1917년 결혼, 조선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합니다.


어느 날 한양도성 인왕산 성곽길을 따라 걷던 테일러 부부는 멋진 은행나무가 있는 땅을 발견합니다. 은행나무골로 불리던 이곳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을 이끈 권율 장군(1537~1599)의 집터가 있던 곳이기도 했지요. 권율이 심었다는 인왕산 자락의 늠름한 은행나무에 마음을 뺏긴 부부는 그 땅을 매입해 1923년 새 집을 짓기 시작합니다. 집의 이름은 기쁜 마음이란 뜻의 산스크리트어인 ‘딜쿠샤(DILKUSHA)’로 정했지요.  


권율장군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에 반한 테일러 부부는 그곳에 집을 짓고 딜쿠샤라 불렀습니다. (출처: KBS1 다큐공감)


무역과 광산업에 종사하던 앨버트 테일러는 UP(현 UPI) 및 AP통신사의 임시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고종의 국장(國葬), 3·1 운동, 제암리 학살사건( 3·1 운동 당시 일제가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서 주민들을 집단 살해한 사건) 등 일제의 만행을 취재해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테일러 부부의 아들 브루스가 1919년 3·1 운동 하루 전날 세브란스 병원에서 태어났는데, 앨버트는 메리의 침상에 병원 간호사들이 숨긴 기미독립선언서를 동생 빌에게 몰래 전달해 구두 뒤축에 숨겨 해외에 알리도록 했습니다.    

 

메리는 한국 사람과 한국 풍경을 그린 그림을 많이 남겼습니다. 메리가 한국인과 한국 풍경을 그린 이유는 한국인들에게 정과 고마움을 느꼈기 때문이었지요. 일제에 의한 가택연금으로 식량조차 구하기 힘들었던 때에 딜쿠샤 문간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음식들이 놓여있곤 했는데 메리는 가난한 한국 사람들이 자신을 도와준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1941년 미국과 일본 사이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앨버트는 한국 독립운동을 도왔다는 혐의로 6개월간 수감되었고, 메리는 딜쿠샤에 가택연금되었습니다. 결국 테일러 부부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1942년 미국으로 강제 추방되었습니다. 앨버트는 1948년 심장마비로 숨졌으나 평소 죽어서라도 한국에 가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메리는 남편의 유해를 가지고 서울로 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안치하고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앨버트 테일러(Albert W. Taylor)의 모습과 그가 3·1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해 취재한 내용을 실은 뉴욕타임즈 기사입니다. (출처: 딜쿠샤)
한국에서 지낸 25년간 메리는 많은 한국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을 그렸습니다. 한국의 풍경도 많이 남겼는데 그중 '금강산'(마지막)은 압권이군요. 가보고 싶네요..(출처: 딜쿠샤)


그럼 딜쿠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부부가 추방된 후로 딜쿠샤는 소유권이 분명치 않은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1963년 이후로는 결국 국가 소유가 됩니다. 그 후로도 집 없는 사람들이 무단 거주하기 시작해 딜쿠샤는 오랜 기간의 방치로 옛 모습을 잃었고, 2006년에 이르러서야 브루스 테일러의 노력으로 딜쿠샤의 진짜 주인이 밝혀지게 된 것이지요.


1919년 3·1 운동 하루 전 날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딜쿠샤에서 보낸 브루스 테일러가 흰머리 성성한 노인이 되어 돌아왔으니 그의 감회는 남달랐을 것입니다. 1940년에 미군 입대를 위해  조선을 떠나 무려 66년 만의 귀향이었으니까요. 2015년 브루스 테일러마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딸은 테일러 가문의 모든 자료를 한국에 기증했습니다. 그녀가 가져온 빛바랜 흑백 사진들이 딜쿠샤를 복원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또한 메리 테일러가 미국으로 돌아간 뒤 조선에서의 생활을 회고하면서 집필한 『Chain of Amber(호박목걸이)』(1992)는 조선에서의 생활과 일제의 잔악상, 항일투쟁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있어 당시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메리는 이 회고록에서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그리고 영화보다 더 선명하게 조선에서의 생활을 그려나갑니다. 그녀의 글은 섬세한 묘사와 생기넘치는 표현으로 순식간에 100년 전 조선을 여행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합니다.    


메리 L.테일러의『Chain of Amber(호박목걸이)』표지입니다. 아들 브루스 T.테일러가 어머니의 유고를 정리해 1992년 출판하였고, 한국어판은 2014년에 출간되었습니다.
회고록의 제목이기도 한 호박목걸이는 앨버트가 메리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며 선물한 것이었습니다. 회고록에 호박의 원산지가 조선이라고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리투아니아산이라고 하는군요


딜쿠샤는 2년간의 복원공사를 마치고 2021년 3월 시민에 개방되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몇 안 되는 서양식 근대 건축물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3·1 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을 서방에 알린 앨버트 테일러의 가옥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도 큽니다. 그가 구한말 힘없는 조선에 들이닥친 제국주의의 광산사업가라는 이유로 딜쿠샤를 방문하기 전 불편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테일러 부부는 고단하고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던 일제강점기의 조선인들과 아무 상관없는 외국인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인을 위해 기사를 쓰고 해외로 타전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일제에 항의했던 조선과 고통을 함께한 이웃이고 친구였으니까요.


'서울시 공공서비스 예약'을 통해 사전 예약하고 딜쿠샤를 방문해 보세요!

전시/관람 | 문화체험 | 서울특별시 공공서비스예약 (seoul.go.kr)


2021년 새롭게 단장을 마친 딜쿠샤 전경입니다. 은행나무가 변함없이 딜쿠샤를 호위하듯 서 있군요. 지금까지도 이곳은 행촌동(은행나무골)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1,2층 거실은 남아있는 사진 6장을 토대로 테일러부부가 거주할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였고, 나머지 공간은 테일러 가족의 한국살이와 언론 활동 자료의 전시실로 구성했습니다.



딜쿠샤를 뒤로 하고 인왕산 성곽길을 따라 정상으로 향합니다. 구불구불 뻗어나가는 성처럼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계속해서 함께 오르시길 기대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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