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는 숭례문을 출발해서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중 가장 훼손이 심한 구간을 소개했지요? 서쪽에 있는 대문과 소문인 돈의문과 소의문은 남아있는 몇 장의 사진과 흔적으로만 기억해야 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돈의문 박물관 마을'로 변신한 돈의문 터에서부터 답사를 계속하겠습니다!^^
돈의문 터를 뒤로 하고 오르막 길을 따라가다 보면 강북삼성병원의 입구가 보이고 현대식 병원 건물에 둘러싸인 오래되었지만 단단해 보이는 건물 하나가 눈에 띕니다. 이 건물은 백범 김구 선생이 해방 후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돌아와 임정 요인들과 3년 7개월간 머물렀던 역사적인 장소, 경교장입니다.
김구 선생은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을 제치고 다수의 여론조사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존경하는 독립운동가 1위를 차지한 분입니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는 김구 선생의 어록이 최근 지구촌을 휩쓰는 K-Culture 열풍과 맞물려 우리의 마음에 울림을 주고 있지요.
경교장(京橋莊)이라는 이름은 근처에 있던 경구교(京口橋)라는 다리에서 따왔습니다. 일제강점기 민영휘, 김성수와 함께 3대 부자로 불렸던 친일파 광산기업인 최창학이 1938년 호화 별장으로 지은 집을 해방 후 선생께 빌려주어 임시정부의 청사 및 임정 요인들의 숙소로 사용했습니다.
강북삼성병원 입구의 경교장입니다. 매우 공들여 지은 단아한 2층 양관입니다. 병원 방문객으로 늘 북적대는 곳이지만 정작 이 건물을 눈여겨보는 이는 적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곳 경교장에서 1949년 6월 김구 선생이 서거하십니다. 한국독립당(1930년 상하이에서 조직된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정당)의 당원, 육군 소령, 미 방첩대(CIC) 정보원 등 여러 가지 모습으로 살아온 친일세력의 하수인, 안두희의 총탄에 맞았습니다. 그 후 경교장은 최창학에게 반환되었고 다시 타이완과 베트남대사관저, 미군 시설, 병원 등으로 사용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 2013년 고증을 거쳐 김구 선생이 서거하실 당시 모습대로 복원, 개관했습니다. 창문을 뚫고 나간 총탄 자국, 피살 당시 선생이 입고 있었던 피 묻은 옷이 전시되어 당시 처참했던 상황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합니다.
김구 선생 서거 직후의 모습(왼쪽)과 총탄의 흔적이 선명한 2층 창문을 통해 본 조문객의 모습입니다. 장례기간 동안 다녀간 조문객이 120만 명이 넘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의 2층 집무실입니다. 여러 기록물을 토대로 저격 당시 선생이 앉아계시던 의자 옆 창문으로 뚫고 나간 선명한 총탄 자국을 복원했습니다.
그런데 함께 도성 답사를 시작한 친구는 의외라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어봅니다. 왜 평생을 항일독립운동에 바친 김구 선생이 친일파의 집을 제공받았느냐고. 경교장 2층 김구 선생 숙소의 일본식 다다미방도 의아스럽게 바라봅니다. 흠.. 날카로운 질문입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김구 선생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대표되는 세력들은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다양한 항일투쟁 조직을 결성하면서 적극적으로 저항했으며 한국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한 친일파 처리 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히 소극적이었습니다. 그것은 국내에서 취약한 정치 기반을 보안하기 위해 이승만과 한국민주당(미 군정기와 대한민국의 보수적 자유주의 정치 정당 중 하나로 1945년 조선민족당, 한국국민당 등이 합당하여 조직한 정당.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조병옥, 윤보선 등 참여) 세력의 지지가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국민주당과 친일 자본가들의 자금 지원으로 국내에서의 숙소, 활동비, 정치후원금 등을 충당할 수 있었기에 빈곤한 경제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타협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친구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처럼, 이러한 행보로는 대중의 전폭적이고 지속적인 지지를 끌어내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김구 선생이 살아계셨더라도 친일파 청산은 가능하지 않았겠구나..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뭅니다.
문화재 복원의 모범, 드레스덴 성모교회
경교장을 나와 10여 분 걸어 올라가다 보면 드디어 도성의 흔적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월암근린공원까지 이어집니다. 태조 대의 거뭇거뭇 이끼 낀 거칠게 다듬은 자연석 성돌과 세종 대의 동글동글 귀여운 옥수수알 성돌, 숙종 대 방형의 잘 생긴 성돌, 그리고 가장 최근의 말끔하고 뽀얀 성돌까지 모두 한데 섞여있어서 시간의 흐름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그런데 새로 쌓아 올린 성돌과 옛 성돌의 극명한 차이가 감상을 방해합니다. 성돌의 색깔과 톤, 돌을 잘라낸 방식 등에 있어서 옛 것과 너무 큰 차이가 있어서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입니다. 문화재 복원 시 원래의 재료를 사용해야 함은 당연합니다. 또한 그 재료를 다루는 방식 또한 최대한 전통을 따라야겠지요.
돌의 색깔이나 톤은 시간이 만드는 것이니 옛날 것 그대로를 복원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돌을 다루는 방식은 아쉽습니다. 조선의 백성들이 쌓아 올린 성돌에는 손맛이 느껴집니다. 하나하나 손으로 깎고 다듬어 올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쌓아 올린 성돌은 하나같이 반듯하게 기계로 깎아놓아 자연스러운 맛과 멋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과거와 같은 작업 방식이 시간과 비용이 소모되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잘 압니다. 하지만 한양도성의 복원을 결정한 이상 도성 쌓기는 무너진 우리의 역사적·문화적 자부심과 자존심을 다시 쌓아 올리는 일임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는 도성의 흔적이 반갑습니다. 그러나 새로 쌓은 돌과 옛 돌의 대비가 너무나 선명해 복원이 억지스럽게 느껴집니다.
문화재 복원의 선진국인 프랑스나 이탈리아, 독일에 비하면 우리나라 문화재 복원의 역사는 짧습니다. 대중의 관심도 부족하고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한 재정도 넉넉지 않아서 전문적인 복원 인력 또한 매우 부족합니다. 여기에 각 지자체가 문화재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있어, 복원을 부추기지만 제대로 된 복원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문화재를 어떻게 복원해야 할까요? 복원의 모범사례로 꼽히는 독일 드레스덴(Dresden)의 18C 건축물, 성모교회(Die Frauenkirche)의 복원과정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복원이 역사적 장소를 그저 옛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소중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드레스덴의 자랑이었던 아름다운 성모교회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드레스덴 공습으로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독일 통일 후 이를 재건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가동되기 시작합니다. 건축물 잔해를 최대한 사용하고 철저한 문서 고증과 3D 같은 현대 기술도 복원에 동원되었습니다.
복원 과정에 있어서 비용을 마련하는 일은 복원의 성패를 가를 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드레스덴은 놀랍게도 폭격의 당사자였던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20여 개국에서 복원 기금을 지원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연합군 폭격기 조종사의 아들인 영국인 앨런 스미스(Alan Smith)가 제작한 십자가가 돔 꼭대기에 설치되고, 소년시절 드레스덴 폭격을 목격한 미국인 그룬트 블로벨(Grunter Blobel)이 노벨의학상 수상 상금을 기부합니다. 재건 비용은 1억 8천만 유로로 현재 시세로 약 2300억이 든 엄청난 공사였지만 그중 절반은 개인과 기업의 기부금이었습니다.
이 획기적인 복원 프로젝트에서 드레스덴 시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우선 전쟁 직후 시민들이 폐허 속에서 온전한 것을 골라 번호를 달아 보관해 놓은 벽돌 8,500여 개가 복원에 사용되었습니다. 또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기부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기부금뿐만 아니라 성모교회의 옛 사진, 그림, 심지어는 성당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증언까지 빠짐없이 모아 나갑니다. 특히 설계도에서 빠져있는 교회 정문을 복원할 때 난관을 겪자 공모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성당 정문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온 관광객, 그곳에서 결혼식을 올린 당시의 신혼부부가 보내온 사진 등 수백 장의 사진이 도착했습니다. 이 같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교회 정문을 완벽하게 복원해 냈습니다!
고집스럽고도 정성스러운 과정을 통해 드디어 드레스덴 성모교회는 성공적인 복원을 마치고 2005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새로 문을 열었습니다. 첫 3년간 이 감동적인 교회를 보기 위해 몰려든 관광객만 700만 명에 이릅니다. 드레스덴 성모교회는 전쟁의 상처를 씻는 화해의 상징이 되었고 복원 과정 자체로 또 하나의 역사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진정성 있는 복원이자 복원의 모범이라 칭찬받을만하지요?^^
2차 세계대전 중 폭격을 맞아 파괴된 독일 드레스덴(Dresden)의 성모교회(Frauenkirche)는 동독시절 폐허인 상태로 버려져 있었지요.
2005년 복원을 마치고 부활한 드레스덴의 성모교회 정면(왼쪽), 교회 뒷면의 제자리를 찾지 못해 남겨진 돌의 잔해(오른쪽)조차 남겨두었습니다.
다음 글에는 인왕산 오르는 길에서 만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 홍난파의 집과 행촌동 '귀신 나오는 집'을 소개할게요! 함께 가실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