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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Jan 16. 2023

끊어진 성벽의 흔적이 말해주는  도성 이야기

누구나 알지만 잘은 모르는, 한양도성 2

https://brunch.co.kr/@storybarista/39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숭례문에서 창의문까지, 한양도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간은 단연코 '인왕산 구간'입니다!^^


다시 우뚝 선, 숭례문에서 출발하기!    


화재 후 2013년에 중건된 숭례문의 모습입니다. 좌우 성벽도 일부 복원되었습니다. 옛 돌들 사이로 새로 깎아 넣은 돌들의 대비가 심해서 마치 모자이크처럼 보이는군요.
좌우 성벽이 헐려나간 1907년 전의 위풍당당한 숭례문(崇禮門) 모습입니다.(사진출처:연합뉴스, 1890년대 말 촬영 추정)


'인왕산 구간'의 출발지인 한양도성의 정문, 국보 숭례문(崇禮門) 앞에 섭니다. 숭례문을 우리나라 국보 1호로 많이들 알고 계시지요? 이제는 아닙니다. 그럼 뭐가 1호냐고요? 국보 1호가 다른 문화재로 바뀐 것이 아닙니다. 2021년 문화재를 서열화하는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문화재청이 지정번호를 없애고 내부 관리용으로만 운영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60여 년 간 대한민국 국보 1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문화재인만큼 우리나라 대표 문화유산으로서 우리에게 자부심을 심어준 귀한 문화재인 것만은 사실이지요.


1398년에 처음 완공된 숭례문은 구한말 사진 속에서도 건재합니다. 불의 산인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현판을 세로로 걸었습니다. 결국엔 불타버렸지만 말입니다. 흑~


단정하고 힘 있는 현판 글씨는 세종대왕의 큰형인 양녕대군의 글씨입니다. 성문 옆으로 나란히 성벽이 건재한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1907년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 후 일본의 요시히토(嘉仁) 황태자가 조선을 방문하며 좌우 성벽은 헐려나갑니다. 좁고 비루한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지요. 일제에 의한 굴욕과 6.25 전쟁의 화마마저 견뎌낸 장한 숭례문에 2008년 믿을 수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국가 행정에 불만을 품은 한 개인의 화풀이 방화에 희생양이 된 일이지요.


손쓸 틈도 없이 발만 동동 구르며 600년 역사가 단 5시간 만에 불타 붕괴되어 내려앉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이후 문화재 관리에 대한 반성들이 오가고 허겁지겁 대비책들이 마련되었습니다. 2013년에 문루가 복원되며 숭례문은 다시 우리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83m의 좌우 성벽과 함께 말이죠. 하지만 문루처럼 새카맣게 타버린 우리의 자존심까지 복원하지는 못했습니다.    

                                                       

소의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표지석입니다. 철거 전 소의문과 성벽의 모습이 당당하군요. (사진 출처:국립민속박물관, 1906~1907년 촬영)


이제 서소문(西小門)인 소의문(昭義門) 터로 향합니다. 소의문은 1914년 조선총독부가 도시계획을 하면서 가장 먼저 철거한 문입니다. 지금은 서소문로, 서소문동 같은 지명과 서울소의초등학교라는 학교 이름에만 남아있습니다. 호암아트홀 앞에 서면 길 건너 경남은행이 보이는데 이 큰 길이 바로 소의문 자리였습니다.


동소문(東小門)인 광희문(光熙門)처럼 도성 안에서 죽은 자들의 시신이 성 밖으로 나갈 때 사용되었다 하여 시구문(屍軀門)으로 불렸고, 서소문밖 사거리에서 천주교 신자 44명이 처형되어 순교했다 하여 ‘순교자의 문’으로도 불리었습니다. 사진 속 건재한 소의문을 지금의 서소문로 도로 위로 옮겨와 오버랩시켜 보지만 어쩐지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습니다. 너무 변해버려 상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속이 상하지만 다시 성벽의 흔적을 찾아 발걸음을 옮겨봅니다.       


끊어진 소의문 터에서 돈의문 터까지    

 

소의문 터에서 돈의문 터까지는 성벽이 끊어져서 헤매기 쉽습니다. 우선 소의문 터에서 서소문로를 건너 중구 정동으로 들어섭니다. 원래 정동(貞洞)이라는 지명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繼妃)였던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에서 유래합니다. 그러나 3대 임금인 태종은 새어머니 신덕왕후의 무덤을 파괴해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겼습니다. 19세기말 대한제국의 법궁인 경운궁(덕수궁)을 중심으로 한 정동은 서양의 공사관, 선교사가 세운 학교, 호텔 등이 들어서며 서양인들로 북적이기 시작하고 이국적인 서양식 건축물들로 넘쳐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곳을 양촌(洋村)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정동로터리로 내려가기 전 나지막한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배재공원은 1885년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가 세운 배재학당이 있던 자리입니다. 1984년 배재학당의 후신인 지금의 배재중·고등학교가 강동구로 이전한 뒤 옛 배재학당 동관(1916) 건물이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옛 배재학당 운동장 자리에는 2017년 완공된 러시아대사관 건물이 들어서 있어서 이화여자고등학교 노천극장까지는 정동길로 나와 돌아서 가야 합니다. 김소월이 사랑했던 500살 된 향나무와 가지를 쭉쭉 뻗은 커다란 회화나무가 만들어내는 고풍스러운 풍경을 뒤로하고 정동로터리로 내려옵니다.   

왼편에 아담하고 멋스러운 붉은 벽돌건물이 보입니다. 배재학당을 세운 아펜젤러에 의해 세워진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인 정동제일교회입니다. 이곳에서부터 새문안로와 만나는 정동사거리까지 이어지는 약 522m의 2차선 도로가 정동길입니다. 정동길이 정확하게 한양도성이 지나가는 길은 아니지만 도성의 흔적 따라가기를 멈출 수는 없는 일이지요.

      

창덕여중 담장 아래에 남아있는 도성의 흔적입니다. 반듯하게 참 잘 쌓았군요.


정동길을 오르다 이화여자고등학교 동문으로 들어갑니다. 학교 뒤편의 노천극장과 러시아대사관이 담장을 두고 서로 이웃하고 있습니다. 이들 뒤편으로 도성이 이어졌을 것입니다. 이화여고 서문에서 창덕여중 담장으로 나오면 ‘서대문 성벽 옛터’라는 표지석과 함께 약 50m가량 도성의 흔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도성이 창덕여중 담장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학교 담장의 밑동으로라도 남아있는 도성 성벽이 반갑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 구간에서 도성의 흔적을 찾기란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지요~


창덕여중 담장에서는 더 이상 길이 이어지지 않습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돌아 나와 정동사거리 언덕까지 걸어가 돈의문 터와 만납니다. 도성의 흔적을 따라 걷느라 지나쳐버린 정동은 걸음마다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있는 근대 박물관과도 같은 곳입니다. 덕수궁에서 시작해 덕수궁길과 정동길을 따라가는 정동 답사 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brunch.co.kr/@storybarista/32


사라진 돈의문, 생겨난 돈의문 박물관마을        


정동사거리의 ‘돈의문 터’ 라 적힌 설치물 (안규철의 공공미술 작품인『보이지 않는 문』)이 있었지만 지금은 이마저 사라졌습니다.


헉~ 돈의문 아래로 전차가 지나가고 있네요~


정동이 끝나는 사거리에 이르면 큰길 건너편에 강북삼성병원이 보이고 그 앞에  ‘돈의문 터’라고 적힌 담장 하나가 있었습니다. 사라진 돈의문(敦義門)을 애도하는 설치물 같았지요. 하지만 최근에는 이마저도 철거되었습니다.


애초에 돈의문은 지금의 독립문 근처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태종 때 더 남쪽으로 내려와 ‘서전문(西箭門)’이라 했습니다. 세종 때(1422) 도성을 재정비하면서 지금의 위치에 문을 옮기고 예전 이름인 돈의문을 붙였으나 백성들은 그 문을 새문(新門)이라 불렀고 새문의 안쪽을 지금도 새문안, 새문안길, 신문로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1899년 돈의문에서 청량리까지 최초의 전차 길이 가설되었고, 일제 강점기인 1915년에는 전철 복선화 사업을 구실로 돈의문은 철거 위기에 놓입니다. 결국 경매에 붙여지는 신세가 되는데, 당시 매일신보에는 염덕기라는 사람에게 205원에 낙찰되었다는 사실이 실리기도 했습니다. 당시 쌀 한 가마니 값이 16원이었으니 13 가마니 값에 목재 값만 받고 돈의문이 팔려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한양도성의 사대문(四大門) 중 우리가 볼 수 없는 유일한 문입니다.       

       

돈의문 역사관이 있는 돈의문 박물관마을 모습입니다. 좀 썰렁합니다.
돈의문 역사관 안에 경희궁의 담장 유적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경희궁만큼 지독하게 훼손된 궁궐도 없지요~


돈의문 터를 뒤로 하고 이제 흔적조차 없는 도성을 상상하며 언덕배기를 올려다봅니다. 오른편은 새로 조성된 돈의문 박물관마을, 왼편은 강북삼성병원입니다. 새로 조성된 돈의문 박물관마을로 향합니다. 서울시는 2017년 돈의문 터 옆 새문안마을의 1930년대~80년대에 지어진 한옥과 일본식 주택, 옛 골목길들을 보존하기 위해 철거 대신 마을 전체를 리모델링해 돈의문 박물관마을로 조성했습니다.


아.. 여긴 Agio라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있던 좁고 가파른 골목이었는데.. 이탈리안 레스토랑과 한정식 집이 돈의문 역사관으로 환골탈태한 모습이 놀랍습니다. 요즘이야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널렸지만 20여 년 전엔 그리 흔하진 않아서  Agio는 특별히 분위기 잡고 싶은 날 갔던 음식점이었지요. 은밀한(?) 소개팅 장소이기도 했고요..ㅎㅎ 정작 소개팅했던 남자들의 얼굴이나 이름은 전혀 생각나지 않고 혀 안에서 놀라운 신맛과 단맛의 하모니를 보여준 오이피클만 떠오릅니다~ 여러모로 어수룩한 시절이었습니다.^^;


전시관 안에는 조선시대 돈의문 안팎의 이야기와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의 변화한 모습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마을 조성 과정에서 발굴된 경희궁의 궁장(宮墻, 궁궐을 둘러싼 성벽) 유적도 관람 데크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박물관 마을을 둘러보고 나오는 마음이 허전합니다. 공들여 만든 공간이지만 방문자는 많지 않고, 마을 전체에 울려 퍼지는 때 지난 크리스마스 캐럴이 을씨년스러움을 더해주고 있기 때문일까요? ‘유령마을’이라는 오명이 붙은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철거가 아닌 도시 재생이라는 새로운 시도는 좋았지만 마을의 정체성과 효용성에는 의문이 듭니다. 현대의 우리에게 이러한 복원이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알기도 어렵습니다. 단지 전시를 위한 죽은 공간이 아닌 복원의 과정 자체를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만드는 진정성 있는 복원이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복원의 성공 사례라 생각되는 독일 드레스덴(Dresden) 성모교회(Die Frauenkirche)의 복원 과정을 다음 글에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도 계속 이어지니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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