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설 다음날의 생신을 맞은 내 엄마를 위해
엄마 아부지의 나이를 더하면 100살이 훌쩍 넘는 올해가 벌써 두 달이 지났다.
그 중 엄마의 생일이 있는 2월은 더 특별한 듯 하다.
늘 엄마의 생일을 음력으로 새기 때문에
설날 다음의 빨간날을 유심히 보게 된다. 우리 엄마 생일이 딱 구정 다음날이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 생일이 지나야 비로소 한 해를 시작하는 느낌이 든다.
서른 즈음이 되니 엄마는 어떻게 태어난건지 궁금하다.
외할머니는 설 차례 음식하는 집에서 만삭의 몸을 끌고 우리 엄마를 낳았으니, 뭐 한 사람의 삶이 이렇게 무거울까.
돈 없는 장남을 만나 단칸방에서 시작한 엄마는
스무살즈음엔 야간대학을 다니느라 서른엔 동생을 낳아 기르느라,
마흔엔 먹고 사느라 늘 돈이 모자랐던거 같다.
내 생일엔 읽고싶은 책과 편지를 주는 엄마에게 나는 늘 답장을 썼다.
크리스마스엔 아빠의 해서체의 카드가 머리맡에 있었고 거기에도 늘 답장을 썼다.
줄줄 쓰는 답장에는 엄마 아빠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과,
내가 가지고 싶은 선물은 이것이니 다음엔 꼭 이걸 사달라는 철없음과
이미 출근을 한 아빠와 엄마에 대한 미움과
이 모든 걸 다 담을만한 글솜씨는 없는 내가 겹겹히 쌓인 답장들이었다.
지금의 내가 보니
카드와 편지 맨 마지막에 늘 쓰여있던 엄마 아빠의
'사랑한다' 는 말 안에는
무엇을 선물로 받고 싶은지 알지만 사주지 못하는 미안함과,
배를 내놓고 자고 있는 두 자식을 놓고 새벽 출근을 해야하는 서러움과,
그럼에도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애틋함이 한번에 담겨있는 글이었다.
글은 섬과 섬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라는데,
가깝지만 멀게 느껴지는 부모와 자식을 잇는 긴 글이 너무 읽고 싶어진다.
이번 구정연휴 때 내려가서 구정 다음날 태어난 엄마의 인생을 글로 써보면 좋겠다고.
나는 그 무게가 참 궁금하다고 했을 때 내심 좋아하는 엄마를 보면서
한 사람의 인생을 끝없이 궁금해하는 것만큼 사랑을 말해주는 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야간대학을 나온 우리 여사님은 지금
우리 집 사람 통틀어 가장 고학력자인 척척석사가 되었다.
이거야말로 훌륭한 성장서사 아닌지.
라노벨을 왜 읽을까
한 사람의 새치 한가닥에 이토록 진진한 성장과
고독이 늘 멈추어 맺혀있는데.
"엄마, 나는 엄마 나이로 엄마처럼 살라고 하면 그렇게 못살거 같아. 너무 힘들어서."
"왜? 그래도 사는 게 인생이야. 맨날 불행하다가 가끔 행복한 거."
"그럼 엄마는 맨날 불행하다가 가끔 행복해?"
"맨날 행복한 사람이면 그게 또라이지. 우리가 정상이다. 우울함도 지성의 부산물이야. 뭘 알아야 우울이라도 하지."
맞다. 우리 엄마 말은 늘 옳았다.
모녀끼리 함께 간 6년전 대만여행에서 바닷가 낙조를 보며 우리가 떠들던 말이 생각난다.
맨날 불행하다가 가끔 행복한 삶.
침대 위에 다시 쓸 거같지 않은 기념품을 사고
이름도 잘 못알아 듣는 이국적인 과일을 사먹어 보는 여행이 끝나면
다시 아무일 없었단 듯 지옥철에 나를 던지는 불행.
나돌아다니기만 하는 삶에서 어떤 행복도 불행도 없는 것처럼
어디에 매여있다가 부유해야 그것이 행복이고 불행이지.
부유하다가 다시 매이는 것 그것도 행복이고 불행이고.
결국 맨날 백수인 사람과 맨날 일하는 노동자는 한 끗차이인 것이다.
어딘지 모를 삶 속에 떠돌아다니고 있다면,
당신 잘 살고 있는 것이다.
- 2022. 2월 끝자락에서, 재택근무 하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