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이 붐비는 시즌이 되었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몇 년간 텅 비어있던 공항이 설레는 여행객들로 가득한 순간. 나도 작년 여름에는 그 설렘에 함께 탑승하여 성수기 항공권을 호기롭게 결제하고, 경기도 다낭시를 다녀왔던 기억이 난다. 가족과 함께하는 여행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비행기를 탄 것은 언제였지? 곰곰히 생각해보니 2019년 가을이었다. 이제는 무려 5년여전, 2019년 10월 나는 4살배기 아이를 시어머님과 친정엄마, 그리고 남편의 공조 하에 맡겨두고 샌디에이고로 출장을 떠났다. 7말 8초 본격적인 휴가철 특집으로, 어린 아들이 눈에 밟히면서도 혼자 공항 라운지에 앉아서 설레임을 느꼈던 기억을 재생해본다.
#결제내역을 결재받기 위한 지난한 노력
당시 나는 PRSA라는 국제 PR 관련 컨퍼런스에 3일간 참석하기 위해 출장을 떠났다. 매년 다른 도시에서 개최되는 컨퍼런스였는데, 이 때는 휴양지로 그렇게 좋다는 캘리포니아의 샌디에이고 메리어트 호텔에서 열렸다. 사실 나는 출장이 탐탁치 않았다. 먼저 다녀온 미혼의 후배는 (이제 그녀도 아이 둘의 엄마. 세상에 세월이란) 이런 저런 재밌는 경험들을 나눠주며 힘을 불어넣어 줬지만, 이제 막 36개월을 지난 아들을 두고 떠나는 3박 5일간의 빠듯한 출장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외에도 여기저기 옹기종기 모여있는 업무들이 네가 나를 두고 감히 출장을 갔어? 라고 외치며, 출장 전후로 야단칠 것을 생각하니 출장 전부터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크고 작은 어려움을 떠나 가장 큰 복병은 출장 결재였다. 이제부터출장얘기보다 더 긴 결재이야기를 시작해보겠다. 당시 결재 라인은 팀장-실장(상무급)-부문장(전무급)으로 이뤄져있었다. 당시 세미나를 추천한 분은 실장님이었고, 실장님은 회사 돈을 야무지게 쓰면서(!) 출장을 다니시는 분이셨다. 미국을 혼자 가는 것은 처음인데다가, 작년 혼자 다녀온 후배의 경험상 숙소는 최대한 컨퍼런스 장소와 가까운 곳이거나 아니면 컨퍼런스가 열리는 호텔을 가는 것을 추천했다. 총기소지가 가능한 미국에서 동양인 여성이 혼자 다니는 것은 이래저래 부담이 되므로, 이동은 반드시 우버, 그리고 호텔은 비싸더라도 세미나 장소에서 가까운 곳으로. 이 두 가지가 그녀의 추천사항이었다.
그래서 컨퍼런스가 열리는 메리어트 호텔을 아무 생각없이 예약하고 결재를 올렸다. 때는 출장을 떠나기 한 달여전이었던 것 같다. 근데 실장은 결재를 거부했다. 이유는 가격이 터무니없이 높다는 것. 출장 업무를 담당하는 총무팀 역시 비슷한 의견을 내긴 했지만, 주변 물가가 비싸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하긴 했었는데. 실장은 나는 도저히 이 금액으로는 결재를 못하겠다는 의견을 전해왔다. 사실 처음 몇 년전 이 세미나를 다녀온 실장은 컨퍼런스가 열리는 메리어트 급의 호텔에서 숙박하고, 휴가 일정을 잘 조율하여 출장지 근처의 가족을 만나고 돌아왔다. 당시는 실장이 아니라 팀장이긴 했지만, 일종의 "나는 되지만 너는 안되겠어" 라는 느낌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큰 금액의 결재를 실장이 하고 부문장에게 올라가는 것이 다소 부담스러운 일인 것은 맞다. 그러나 자꾸만 마음 한 구석에서 왜 나는 안될까 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당시 같은 팀이었던 과장님은 본인이 로또 되면 스위트룸 예약해줄테니 최대한 안전한 곳을 찾아보라는 위로 아닌 위로를 해주었고, 팀장님은 심지어 호텔스컴바인에 재직하는 지인을 찾아 더 싸고 좋은 숙소를 찾기 시작했다. 출장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팀장님과 나는 구글 맵스를 켜놓고 호텔스컴바인의 10만원대 숙소를 이잡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다행히 신축이면서, 나쁘지 않은 위치의 숙소를 발견했고 그 와중에 3박하면 할인해주는 바우처까지 지인 찬스로 받아 나는 숙소 예약을 마쳤다. 업무도 회식도 아닌 출장 숙소를 위해 10시까지 야근하고 돌아가던 길, 팀장님은 내게 숙소 컨펌이 잘 되었다며 집에 잘 들어가라는 카톡을 11시쯤 보내셨다.
이렇게 숙소를 결제한 내역을 결재받고 나자, 나는 더더욱 출장이 떠나기 싫어졌다.
#그래도 떠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시간들
혼자서 해야하는 환승조차 걱정이었던 순간들을 지나 무사히 샌디에이고 숙소에 도착했다. 물론 중간에 고디바에서 산 원두커피가루가 문제여서 신발 벗고 검문 받기도 하고, 우버에서 내리면서 뒤의 차량과 부딪혀서 문이 약간 찌그러지는 바람에 우버 기사 아저씨(지금도 죄송해요)에게 여권 사본을 드리기도 했다. 어쨌든 어리버리한 나는 숙소 밖으로 나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고, 근처 세븐일레븐에서 사 온 신라면 블랙 컵라면을 먹으며 컨퍼런스 일정을 쭉 훑어봤던 기억이 난다. 나를 지켜보는 어느 누구도(여기에는 자식도 포함이다) 없는 가운데, 나는 특별히 무엇을해야할지 몰라 충실히 컨퍼런스 일정표에 맞춰 출퇴근을 했다.(아 K-직장인..)
이제 꽤 오래된 기억이긴 하지만, 컨퍼런스 내용은 전반적으로 매우 만족스러웠다. 내 부족한 영어 실력과는 별개로 지역의 오케스트라가 연주해주는 멋진 오프닝 세레모니부터 퓰리쳐상을 수상한 언론인들의 강연은 물론이고, 전통적인 올드 미디어 외의 뉴미디어, 마케팅 등 다양한 내용의 소규모 세미나를 접할 수 있었다. 사실 나에게 언론이란 내가 쓴 기사 또는 배포한 기사를 간택해주십사 읍소해야 하는 대상일 때가 많았다. 홍보팀의 메인 업무는 언론 관리였고, 언론 관리의 키 퍼포먼스 인덱스(KPI)는 주요 매체에 실린 기사의 갯수였다. 나에게도 몇 퍼센트 정도 할당된, 팀에는 높은 비중으로 할당된 그 지표를 채우기 위해 기사 갯수를 또 세고 또 세고 세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15시간을 넘게 날아온 곳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는 마케팅을 할 것인지, 이제 막 시작된 ESG 경영의 지표는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등등. 한국에서라면 이야기하지 못했을 지적이고 반짝이는 이야기가 나의 모자란 영어 듣기 실력을 비집고 들어왔다. 물론 그 와중에도 나는 아이에게 줄 무료 사탕과, 남편에게 줄 기념 티셔츠를 부지런히 챙겼지만.
그 멋진 샌디에고 사진은 폰고장과 함께 사라졌다^^;
또 한 가지는, 미국은 이 일을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매우 많다는 사실이었다. 정확하게 영화 <미세스 다웃파이어> 에 나오는 스타일의 할머니들이 브로셔를 들고 세미나 장소를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정말 여러번 목격했다. 40대 초반만 되어도 번아웃이 찾아오기도 하는 한국과 다르게 그들의 뒷모습에서는 천천히 오래도록 일할 수 있다는 믿음이 느껴졌다. 굽은 등과는 관계없이 활기차게 동료과는 대화하는 모습에서 이제 만 서른 셋을 넘어선 나는 내 나이가 부쩍 젊고 생동감있는 숫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와서 보니 더욱 그렇네.
#에필로그: 언젠가 다시 떠날 날이 올 것을 안다
글을 쓰다가 잠자리에 들려는 아들에게 자랑스럽게(?) 컨퍼런스에서 받아온 리플렛 뭉치를 보여주었다. 아니 이걸 왜 여태가지고 있었을까. 아마도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기록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숙소를 구하느라 야근하는 촌극이 벌어지는 상황에도, 샌디에이고의 쨍한 햇살을 택시에서 바라보면서도, 어두운 골목길을 빠르게 걸어 컵라면을 사오던 순간에도 나는 언젠가 반드시 이 글을 쓰겠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미국을 그런식으로 다녀오면 3일간 11시까지 야근을 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말할 정도로 촉박했던 나의 출장일정. 짧지만 강렬했던 기억들이 완전히 실체를 잃기 전에 이 글을 쓰게 되어 다행이다. 나는 불완전한 인간의 예언을 믿지 않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허술한 인간의 믿음이 그대로 이뤄지는 것을 믿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언젠가 다시 떠날 날이 올 것을 믿어야겠다. 그리고 서른 셋의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