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루 같은 인생에서 나의 보폭으로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수많은 발걸음을 품어온 길을 걷고 있었다.
마운트쿡 국립공원의 후커밸리트랙(Hooker Valley Track). 여러 트레킹 코스 중 가장 마일드한 길 중 하나다.
함께 걷지만, 결국은 각자의 보폭으로 흩어진다. 예상치 못한 풍경 앞에서 각자 멈춰 서는 지점이 다르고, 머무는 시간도 다르고, 보이는 것도 다르다. 같은 길 위에서도 각자의 시간이 흐른다.
처음에는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마다 불안했다.
이 거대한 자연 속에 나만 남겨진 것 같은 고립감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묵묵히 걷다 보니, 그 적막이 어느새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자연에 가만히 안겨있는 것 같았고 동시에 내가 그것을 점점 품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연 앞에서는 작아진다고만 여겼는데 여기서는 나의 존재가 작아지는게 아니라 더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앞으로는 마운트쿡의 설산, 뒤로는 빙설로 덮인 산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산봉우리는 조금만 더 가면 닿을 것 같았다. 그러나 가까워지는 만큼 다시 멀어졌다.
중년에 깨닫는 인생도 이와 닮았다.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아 전력질주했지만, 정작 닿고 보면 목표는 다시 저만치 가 있고 손에는 허무만이 남기도 한다.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인생 앞에서 느끼는 것은 이제 무력감이 아니다.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겸허함이다.
자연이 나를 품고, 내가 이 산을 품을 수 있던 것처럼, 이제는 인생도 붙잡으려하기보다 그 흐름을 품으며 걸으라고 말을 건네는 것 같다. 결국 누군가의 속도를 쫓는 것이 아니라 나의 보폭을 온전히 알아가는 과정이 삶임을 설산은 묵묵히 일러준다.
뮬러호수(Mueller Lake)에 닿았다.
회청빛 호수가 산을 배경으로 넓게 펼쳐져 있었다. 깎여나간 산과 빙하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어서 흐려진 색이었다. 이 물이 흘러내려가 푸카키 호수의 그 밀키블루 빛깔을 만들어낸다.¹ 근원은 이렇게 투박하다. 바로 앞까지 밀려온 빙하는 아주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속도로.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던 내 인생의 시간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돌아왔던 길을 되돌아 걸었다. 같은 길인데도 사뭇 달랐다. 길이 변한 것이 아니라, 걷고 있는 나의 시선이 조금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빛의 각도가 변했고, 푸카키 호수의 색도 깊어져갔다.
¹ 뮬러 빙하의 녹은 물은 후커강을 거쳐 푸카키 호수로 흘러든다. https://en.wikipedia.org/wiki/Mueller_Glaci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