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행복
- 방송국 PD들을 왜 SKY 출신으로 뽑는지 알아요? 만날 밤새야 되니까, 공부하면서 밤 많이 새 본 애들 뽑는 거지!
얼마 전 장항준 감독의 우스갯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래, 난 SKY 출신이 아니어서 그랬을 거야.
-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방송을 만들고 싶습니다!
한창 방송 PD를 꿈꿀 때, 지원동기를 물으면 그런 식으로 적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편협하고 안일하고 원대한 희망이다.
언론사 취업을 준비할 때, PD가 되고 안 되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학창 시절 나의 멘트에 감동하거나 방송작품에 박장대소하는 관객들을 보고 희열을 느꼈던 그 맛을 못 잊어 지원했다. 그렇게 막연히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뛰어들었고, 결국 탈락의 쓴 맛을 보았다. 방송국을 뒤로하고 은행에 원서를 쓰면서, 금세 다시 방송국에 도전하려고 했다. 하지만 몇 년 후 종합편성 채널들이 무더기로 생겨나고도 방송국에 지원조차 하지 않았다. 은행 업무에 적응하고 결혼과 육아가 이어지면서 결국 '하고 싶은 일'은 저 뒤편으로 밀려났다.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고 사는 삶이 훨씬 많다. 그러다 보면 하고 싶은 것을 점점 잊어버리게 되고, 결국 잃어버린다. 대학 때 교육학 교수 중 한 분이 강의 도중에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했었다.
- 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해서 꼭 그것을 하면서 살아야 행복한 삶일까요? 저는 천체물리학자가 되고 싶었어요. 별에 미쳐있던 때가 있었죠. 교육학 교수가 된 지금도 서재의 반은 천체물리학 책들이고, 나머지 반은 교육학 책들이에요. 내가 그것을 직업으로 삼지 않는다고 해서 내 삶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죠. 저는 이 직업에 만족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계속 들여다볼 수 있어서 행복해요.
교사가 되고 싶은 학생들에게 교수로서 꼭 교사가 될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당당함에 반해버렸다. 그래도 행복할 수 있다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되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계속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내 기쁨을 찾아본다. 그림을 그리고, 피아노를 치고,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다. 내가 좋아하는 메뉴를 주문하고 예쁘게 보이는 옷을 사 입는다.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조금씩 늘려간다.
나를 위한 시간을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서 한 가지 규칙을 생각하였다. 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 나를 위한 시간을 '가장 먼저 배치'하는 것이다. 만약 시간과 장소가 여의치 않을 때는 일상에서 지켜 온 원칙들을 조금 내려놓기로 마음먹었다. 이를테면 혼자 책을 보고 싶은데 아이들이 만화를 보는 중이라면, 평소보다 10분 더 만화시청을 허락한다. 내가 무엇인가 쓰고 싶은데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먼저 나에게 10분간만 적는 시간을 허락한다. 그 10분은 남겨진 10분이 아니라, 주어진 10분이다.
- 그 선배가 너, 카드 팔러 다닌다고 그러더라?
내가 은행원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친구의 말 한마디가 나의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즐겁게 살던 꿈 많은 대학생이었는데, 고작 몇 달 만에 나는 '카드 팔러 다니는 애'가 되어 있었다. 카드 파는 데에 정신까지 판 나머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도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다. 슬펐다. '세상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할 망정, 카드파는 한낱 은행원으로 사는 것이 부끄럽고 속상했다. 그때도 자만심이 가득했던 거다.
돈을 벌기 위해 은행일을 계속하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인가. 아직도 그 고민은 진행형이다. 다만 오만함과 자만심을 좀 덜어낸 덕분에, 이제는 퇴근길에 혼자 끼적이기라도 할 여유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은행원으로 살다가 작가가 된 유명한 소설가들도 시작은 이렇지 않았을까. 아직도 꿈은 원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