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겨울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

by 코끼리 날개달기

3년 전, 주재원 발령을 받은 남편을 따라 필리핀 마닐라로 이사를 결정했다.


동네 아줌마들은 ‘주재원 와이프’가 되려면 3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며 대놓고 부러워했다. 나도 내심 워킹맘보다는 낫겠지 싶어 좋기도 했다.


적응기간으로 보낸 시간들이 얼마나 지났을까.


갑작스러운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로 WHO는 전 세계 팬데믹을 선언했고, 결국 주재원 생활 3년 내내 필리핀에 꽁꽁 갇힌 꼴이 되고 말았다.


이제 필리핀의 겨울이 춥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2019년 12월, 첫 번째 겨울.


필리핀에서 맞는 첫겨울은 상당히 생소했다. 잔뜩 더우니까.

기온이 30도가 넘는데, 검은 가죽바지 입은 필리피노를 보면 ‘저러고 멋 부리다 쪄 죽지.’ 싶었다.


그 겨울의 정점은 마닐라 근처 활화산의 폭발이었다. 화산재가 며칠에 걸쳐 날렸고, 눈처럼 베란다에 소복이 쌓였다.

회색이 된 바깥세상을 내려다봤다.


흠, 저게 화산재란 말이지…….’







2020년 12월, 두 번째 겨울.


팬데믹으로 인한 강력한 사회 제재(이하 락다운)로 어린이 ‘외출금지’ 상태가 무려 1년여 지속되던 때였다.


집에 있었고, 집에 있다가, 또 집이었기에 계절이 바뀌는 것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그 기간 내내, 나는 열심히 밥을 했다.

아이들과 남편이 집에서 아침, 점심, 저녁을 함께 먹었다. 나는 밥을 먹으면서 다음 끼니를 걱정하고, 설거지를 하면서 장 볼 고민을 했다.


그 겨울, 우리 집 앞을 가로막은 빌딩의 모습만은 뚜렷이 기억이 난다. 건물 뼈대만 올린 채 공사를 멈춘 40층짜리 빌딩이 오랫동안 보란 듯 서 있었다.






2021년 12월, 세 번째 겨울.


귀국 전 마지막 겨울이 왔다.


평균 아침 기온이 27도, 발끝이 시리게 춥다.


내가 긴 옷에 머플러를 두르게 되고서야 알았다. 필리피노의 가죽재킷은 과시욕이 아니라 그냥 겨울이 춥기 때문인 것을.


이번에야말로 필리핀의 겨울을 있는 대로 한껏 즐겨보고 싶었다. 매일 밤, 두 달 전 예약해 둔 고급 리조트를 생각하며 흐뭇하게 잠들었다.



그런데 여행 당일, 공항에서 짐을 부치고 기다리던 중에 갑자기 모든 예약이 취소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휴가를 망쳐서 어째.”

“필리핀에 환불이란 없는 거 알지.”

“공항은 아수라장이야!”

방학맞이 휴가를 떠나는 ‘주재원 와이프’들 사이에 수많은 메시지가 오갔다.


생각 못 한 변수, 태풍이 지나간 거다.

하지만 태풍은 어제 아침에 지나갔는데 왜 비행기는 갑자기 지금 취소되는 걸까.



그제야 어제 아침에 지나간 태풍에 대한 뉴스가 나오기 시작했다.


“태풍으로 어제부터 그 섬 전 지역 통신이 끊겼대.”

그런데 어제는 비행기가 떴다는군."

“지금 그 섬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연락이 안 돼."


사람들의 이야기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비용을 손해 보게 될까. 리조트는 연락도 안 받았다.

수하물 찾느라 몇 시간을 기다리며 밥을 굶었더니 정신도 몽롱했다.



그때,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


필리핀 친구가 보낸 메시지.



“ You’re sooooooo lucky girl! My friend! Thanks God!!!"

(너 정말 행운아야! 내 친구! 감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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