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관계는 없다
우리가 사는 이곳을 우리는 스스로 ‘럭셔리한 감옥’이라고 불렀다.
마닐라 제일의 부촌이지만, 정부의 강력한 락다운 체제는 누구도 피할 수 없었다. 외식, 등교, 모든 실내 활동 및 조깅 등 실외활동도 금지됐다.
팬더믹 이후 필리핀 정부는 집마다 ‘패스’를 1장씩 나눠주고 그 패스를 가진 사람만 생필품을 사는 목적으로 외출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필리핀의 강력한 락다운 체제 속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골프만은 예외로 허용되었다. 골프는 친구들과 넷이 함께 친다고 해도 아무런 제재가 없었다. 운명이었을까. 나는 그렇게 골프에 빠져들게 되었다
캄캄한 새벽 5시 집을 나선다.
5시 20분, 집 근처 골프장에 도착.
아이들의 쉬는 시간 시작되는 10시, 집에 도착.
기가 막힌 스케줄이다. 등교 금지로 집에 갇혀 있는 아이들이 불쌍하지만, 엄마도 살아야 한다.
새벽 5시에 아줌마 넷이 만나면, 차에 캐디백도 싣기 전부터 어디로 튈지 모르는 수다가 시작됐다.
모여서 다니는 시간이 늘어가니 수다의 질도 높아졌다. 남편과 시댁 흉보는 건 우리에게 너무 시시한 소재였다. 누구의 엄마, 사회의 일원이 아닌, 그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나눴다
인생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도 하고, 역시 골프도 인생 같다며 서로 공감하기도 했다. 골프가 재미있어 시작했는데 이제 사람들이 좋아서 더욱 푹 빠져버렸다.
처음 골프를 시작한 날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바람이 콧 속을 후비고 들어오는 순간들이 느껴졌다. 마치 물속에서 오랫동안 숨을 참았다가 뭍에 나온 것처럼 들숨이 느껴졌다.
- 웰컴 투 리얼리티.
- 혹시 내가 트루먼쇼에 갇혔던 건가.
등교 금지로 몇 개월간 교사 대신 아이들을 가르치고, 미용실 폐쇄로 미용사 대신 식구들 머리를 깎고, 택배기사 대신 물건 나르던 나는 갑자기 진짜 세상에 나온 기분이 들었다.
아줌마들의 수다에는 '핵심'이 없다. 그게 참 좋은 점이다. 감성과 감상과 감동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 보니 누군가 이 수다에서 핵심을 찾으려고 하는 바로 그때, 모든 관계의 문제가 시작되곤 한다.
누군가 핵심과 주제를 파악하려고, 갑자기 쓰지 않던 '이성'의 두뇌를 작동시켜 의문을 제기한다.
그렇게 우리 넷 중에 두 명의 싸움이 시작되었고, 중재하려던 나까지 보고 싶지 않은 상황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졌다.
갑작스럽게 우리의 수다 모임 혹은 골프 모임은 해체가 되었고, 나는 골프마저 관두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모임이 사라진 것은 상관없었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상처는 쉽게 아물지가 않았다. 상처를 치유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 모임을 하는 동안 락다운을 함께 보내면서 무엇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전우애'를 느꼈다.
그 모임이 끝났을 때, 역시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을 생각했다.
잠시 쉬었던 골프를 다시 시작해볼까.
골프의 가장 큰 장점은 새로운 사람들을 쉽게 사귈 수 있는 스포츠라는 것.
게다가 골프장마다 또 다른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역시 무엇을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좋은 사람들을 가까이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