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 ‘쏘리’란 없다.
- 죄송합니다, 고객님.
은행에 취직하고 나서 죄송하다는 말을 셀 수 없이 많이 했다. 신입행원일 때는 창구에 코팅된 병아리 그림을 붙여놓고, 오는 고객 모두에게 죄송하다고 했다. 심심치 않게 옆자리 책임자까지 와서 같이 죄송해했다.
은행 일을 익숙하게 처리하는 선임 직원이 되고도 죄송할 일은 여전했다.
기계가 고장이면,
- 죄송하지만, 옆 창구로 이동 부탁드립니다.
오자마자 서두르는 고객에게도,
- 죄송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대기 고객이 많아지면,
-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같은 상황에 필리핀 은행에 가면 직원의 응대가 사뭇 다르다.
자신의 점심시간이면,
고객을 신경 쓰지 않는다.
서두르는 고객에게는,
기다리라고 한다.
대기 고객이 많으면,
내일 오라고 한다.
같은 은행 직원으로서 부럽지 않을 수 없다.
마닐라에 살면서, 이쯤에서 내가 사과를 받아야 할 것 같은데, 누구도 ‘사과하지 않는 상황’을 꽤 여러 번 경험했다.
항공사 사정으로 비행기가 취소되었어도 사과하는 직원이 없었다. 취소되었다고 알려줄 뿐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해야 했다.
유명한 브랜드 매장들도 마찬가지다. 상품이 불량이어서 다시 매장을 찾으면, 환불은 불가하고 재고가 없어서 교환이 어렵다고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이런 상황에도 먼저 사과의 말을 하지 않는다.
비행기 취소나 상품의 불량이 직원의 책임은 아니니 사과 안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 직원들 입장에서 보면, 일하면서 쓸데없는 감정소비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 좋은 방법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렇게 일하고 싶다.
하지만 좀 당황스러운 상황은 여기서부터다.
직원 본인이 실수를 하더라도, 먼저 사과하는 대신 웃을 때가 많다. 멋쩍은 미소가 아니다. 박수만 안 쳤지, 거의 박장대소다.
마트에서 내가 고른 과일을 계산하는 직원이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리면, 나한테 사과하는 대신 동료직원들과 소리 내어 웃는다.
집에 등을 수리하는 기사들이 와서 수리할 곳을 더 망가뜨린 적이 있다. 그 상황이 웃겨서 동료들과 이야기하며 막 웃는다. 하지만 옆에서 등 하나 고치려고 3시간 기다린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실수한 직원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으니, 정말 솔직하게 그냥 웃겨서 웃는 거다.
짐작해 보건대, 그런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런 실수를 했을 때, 누구도 자신에게 화낸 적이 없기 때문에 사과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사과’하는 법을 나는 어려서부터 배워왔다.
어른이 되어 은행에 취직해서는 ‘쿠션 용어’라는 것도 달달 외웠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어려우시겠지만.. 등등
잘 배우고 열심히 해 온 것 같은데,
웃고 있는 건 그들이고,
화나 있는 건 나다.
왜.. 진 것 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