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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이슬 Dec 22. 2023

프롤로그>> '당신의 도착지는 어디십니까' 연재 시작

기사와 승객 둘 뿐인 택시 안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이야기



  나는 암환자다. 2년 전 발병한 유방암을 시작으로 최근 6개월 전에는 폐와 쇄골, 목의 림프까지 전이가 되었다. 주변에서 듣기로 전이가 되면 죽는다던데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담당 교수는 전이 환자의 경우 ‘생존 연장 차원’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 표현은 마치 삶의 유통기한을 정해준 것 같았다. 생존 연장 차원에서 기약 없는 항암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항암제가 내 몸에 맞아 암이 영영 사라질 수도 있지 않느냐며 황망히 되물었다. 전이 환자는 암이 영상학적으로 사라졌더라도 미세하게 잔존해 있기 때문에 혈관을 타고 계속 퍼질 수가 있어서 항암제로 가두리를 쳐야 한다고 했다.


  나의 세상은 완전히 무너졌다. 일상으로 복귀해 이제 겨우 숨통 좀 트나 했더니 신은 시련을 연이어 주셨다. 아이랑 막 놀다가도 갑자기 이 예쁜 애를 두고 가야 한다는 생각, 남편과 저녁밥 먹으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지금이 남편과 먹는 마지막 식사가 될 수도 있겠단 생각, 또 하천을 거닐다가 아름다운 꽃을 내년엔 볼 수 없겠다는 생각. 일상의 사방에서 삶의 끝이 떠올라 마음 놓고 웃을 수가 없었다. 실은 삶을 더 소유하고 싶은 현재에 대한 집착이었을지 모른다.


  일상의 사방을 검은 그림자로 만들었음에도 암이 전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치료를 바로 시작하지는 않았다. 항암을 두 번 겪고 나니 항암 소리만 들으면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두려웠다. 그런데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항암을 해야 한다니. 말도 안 된다며 쉽게 시작할 수 없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 기간 동안 우울함이 동반되었다. 정신과에 간 적은 없으나 스스로 우울증이라 명명했다.




  그렇게 시작된 우울증의 첫 증세는 아침을 맞이하기가 싫다는 것이었다. 일어나기가 싫었다. 흔히 직장인들이 아침 일어날 때마다 생각하는 ‘오늘 일어나기 싫은데 휴가나 낼까.’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정말이지, 몸이 말을 안 들었다. 왜 이러지 싶을 정도로 머리로는 오늘 하루를 시작해 보려는데 몸은 바닥에 붙어있는 느낌. 항암으로 몸이 가라앉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이었다. 항암은 오히려 살고자 하는 의지를 불태우는 반면에 우울증은 살고 싶은 의지를 꺾었다. 일어나는 일은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와 같다. 우울증은 그 시작을 하고 싶지 않게 했다. 모순적이게도 죽기 싫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충돌했다. 생각이 한길로만 통해서 하루 종일 두려움에 사로잡힌 생활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생각을 일으켜 잊어보려 해도 원점으로 돌아오는 뇌 컨베이어벨트가 심어져 있는 듯했다. 이로 인해 하루를 맞이하는 게 힘들었고 그것은 ‘차라리 이대로 일어나지 않았으면.‘으로 이어졌다.



  그다음 증세는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싶은 마음을 강하게 일으킨다. 이것도 모순을 안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속마음을 알리고 싶으면서도 그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둠 속으로 깊이 더 깊이 몸을 숨겼다. 포기하고 싶다는 내 말을 들은 몇몇 지인은 ‘아이를 보고 힘내라’고 했다. ‘무너지지 말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고 덧붙였다. 그 순간 왜 우울증 환자들이 상담을 받고도 자살을 선택하는지 조심스럽지만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라고 그런 생각 안 해봤을까. 우리가 아는 희망이 깃든 말들. 우울증을 겪고 있는 당사자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누가 내게 힘들다고 마음을 열어보이면 어떠한 조언을 해주지 않아도 되는구나 하는 것을. 자신도 이 상황에 대해 다 아는데 통제가 되지 않는다. 컨트롤타워가 무너진 기분이었다. 나는 그간 일이 터지면 얼른 메꾸고 방법을 찾기 위해 애쓰며 살아왔다. 먹구름이 올 때마다 이 또한 지나갈 거라고 의연하게 대처했었다. 그러나 연이은 좌절에 쓰러져 숨고만 싶었다. 더 이상 위로도 받기 싫었다. 내 상황을 토로하는 것도 힘에 부쳤다. 누군가와 듣고 말하는 일에 에너지가 바닥나 관계를 끊고 싶었다. 세상은 혼자 살아갈 수 없지만 우울증 상태에서 어떤 모든 관계는 남아있는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우울증은 뭘 해도 피로하며 무기력하다. 운동을 하면 좀 나을까 싶어 낮은 언덕길을 따라 산을 올랐다. 그러나 한편에 자리 잡은 생각은 여전히 떠나질 않았다. 걸핏하면 눈물이 쏟아졌다. 우울증은 세로토닌, 멜라토닌 등등 신경계 호르몬과 관련이 있다. 그러니 의사가 약으로 조절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럼에도 나는 정신과 약에 편견을 지우지 못해 호르몬 약을 처방받고도 먹지 않았다.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약은 당연히 먹어야 하는 약으로 인식되어 있는데 왜 아직도 정신과 약은 의지박약으로 비추어지는지. 하여간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 하나는 변함이 없었다.



  금년도 4월에 폐 전이 진단을 받고 세 달 가까이 우울증에 시달렸다. 어느 날 갑자기 우울한 날들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항암을 하지 않아 치료시기가 늦어질수록 암성 통증(암으로 인해 생기는 통증)은 점점 세졌다. 그러다 보니 더욱 두려움에 떨었다. 항암은 두렵고, 커지는 암은 무섭고, 우울증은 괴롭고. 사생결단이 필요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치료를 받지 않아 암으로 죽거나 우울증으로 죽거나 둘 중 하나였으므로. 결국 3개월을 방치하다가 7월부터 항암을 다시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결정을 하고나서부터 우울증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항암을 다시 한번 해보기로 마음을 먹자 치료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사정이 생겨 병원을 전원 했다. 전원한 병원이 가깝지는 않다. 버스 1회 환승과 전철 20 정거장으로 대략 1시간 30분 소요 거리다. 그러다 보니 항암은 체력전이라 택시 타는 일이 잦았다. 평소 나는 돈을 아끼고자 택시 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하나 그건 옛날 일이고 이제는 체력 방전 방어비용으로 택시를 타며 내 몸을 덜 힘들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택시를 탄 기사님과 우연히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처음엔 그저 사는 이야기로 시작을 했었다. 그러다 기사님은 자신의 사연을 풀었다. 듣다가 내가 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되레 기사님은 덤덤했고 나만 훌쩍인 택시 안은 서로가 서로에게 잔잔한 울림을 주고 있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연재 브런치북까지 오게 되었다. 사실 연재 브런치를 할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다. 치료로 심신이 지치는 날이 많아서 글쓰기가 버거울 때가 많다. 다른 한편으로는 브런치는 블로그와 다르게 우아하고 정돈된 분위기를 풍기기에 글발행에 있어 보다 자신에게 엄격해진다. 독자를 더 의식하게 된다는 뜻이다. 글 잘 쓰는 사람도 많고 실제로 책 출간 하는 사람도 많은 공간에서 과연 나의 위치는 어디쯤 일지, 일면식 없는 사람들과 여전히 비교를 하게 된다. 아울러 연재는 정해진 날짜에 발행해야 하는 독자와의 약속인데, 얼마나 쓸 수 있을지 장담하지도 못하면서 그래도 일단 시작해 본다. 커밍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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